소설리스트

25화 (24/131)

“그리고 나 네 가이딩 때문만은 아니야. 네 비밀… 지켜 주고 싶었어. 옆에서 돕고 싶었다고.”

“그랬겠지. 내가 크리먼인 거 밝혀지면 S급 가이드이고 뭐고 총살당하니까.”

“그러니까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진짜 이해하고 가까워지고 싶었다고. 옆에서 지켜볼수록 네가 그동안 나한테 까칠하게 대한 게 이해가 가서 잘해 주고 싶었단 말이야.”

“위선 떨지 마, 백유건. 너한테 도와 달라고 한 적 없어. 도와 달라고도 안 했는데 나대는 걸 보통 오지랖이라고 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유건의 진심처럼 보이는 눈빛도 떨리는 목소리도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그가 나를 속였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질 나쁜 사기꾼처럼 느껴졌다.

“너 그냥 내 정신까지 휘둘러서 너만 의지하게 만들려고 한 거잖아. 내가 너만 가이딩 하길 바라니까. 솔직히 말해. 그럼 네 태도 다 이해 가.”

“너 왜 이렇게 삐뚤어졌어? 내가 가이딩이 아닌 이유로 너한테 잘해 주면 안 돼? 그래서 네가 나한테 의지하긴 했어? 내가 널 휘둘렀다고? 지금 휘둘리고 있는 게 누군데?”

그는 내 말을 인정 못 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나는 이제 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았다.

어디 짖어 봐라,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들며 무시하고 있는데, 돌연 그가 포기한 듯이 말했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그래. 페어 때려치워.”

일순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내 예상이 틀렸다는 생각에 힐끗 바라보자, 그가 마지막으로 진심을 호소하듯 말했다.

“가이딩 너한테 안 받아도 돼. 그럼 내가 너 진심으로 걱정하고, 돕고 싶어 했단 거 다 믿을래?”

그러나 나는 이 역시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가 연기하는 것이라 느껴졌다. 내가 느낀 바로는 그가 이렇게 내 가이딩을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허세 부리지 마. 이제 안 믿어.”

“어떻게 하면 믿을 건데.”

“뭘 해도 안 믿는다고.”

“넌 뭐가 그렇게 다 꼬이고 어려운데.”

“네가 너무 가벼운 거겠지.”

“…그냥 잘해 주고 싶어서 그랬어. 그게 그렇게 믿기 어려워?”

그의 연한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데도 절대 피하지 않는 눈빛은 애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냥 잘해 주고 싶었다니.’

어떤 이유든 갖다 붙여도 모자랄 판에, 논리도 성의도 없었다.

그럼에도 문득 그 말이 너무 유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지만 그가 내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던 순간들이 있었다.

‘근데 그것이 정말 유건의 진짜 모습일까.’

지금은 회의감이 들었다. 지나칠 정도로 가이딩에 집착하는 유건의 모습이,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나에게 선의를 베푼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 그냥 잘해 주고 싶었다고?”

나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가 내가 내디딘 만큼 뒤로 물러섰다. 나는 더 앞으로 다가섰고, 그가 또 거리를 넓혔다.

그의 머리통이 신발장에 부딪칠 정도로 내몰리자, 유건의 표정이 금세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렇게까지 가이딩 받고 싶어? 너 지금 페어 깨기 싫어서 무리수 두는 거지? 내가 이걸 속아 줘야 해?”

“그러니까, 아니라고. 제발 내 말 좀 들어….”

“착한 척하는 거 역겨워.”

나는 그 순해 빠진 얼굴에 침을 뱉듯이 말했다.

“차라리 나를 회유할 거면 네 피를 가지고 딜하는 게 어때?”

내 가이딩을 받고 싶어서 개수작을 거는 것들은 유건 말고도 많았다. 온갖 술수로 꾀어내려는 파장 거지들. 나는 그들에게 화가 나기보단 무시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유건에게 이리도 화가 나는 건, 인정해야 했다. 나도 그 따듯함에 어느새 맥없이 경계를 풀어 버린 것을. 그에게 잠시나마 온기를 느끼고 의지하려던 사실을.

그에게 어떠한 희망을 품고 우린 서서히 가까워지려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것에 이토록 배신감이 드는 것이다.

“너 필요해서 먹는 거지 좋아서 먹는 거 아니잖아. 처음에 내가 말 함부로 한 건 맞는데, 아니란 거 알았어. 네가 다른 사람 피… 마시고 싶지 않아서 얼마나 자제하는지도.”

“네가 뭘 알아.”

“보면 알아. 네가 자제 못 하는 크리먼들 얼마나 끔찍해하는지 보여.”

“잘못 봤어. 나도 다른 크리먼들이랑 똑같아.”

“아니잖아.”

“그만해.”

이 이상 대화를 지속했다간 그의 말을 믿고 싶어질 것 같았다.

유건은 내가 다른 크리먼과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할까. 내가 그동안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면서. 고작 며칠간 페어를 한 것이 전부면서.

그는 페어를 하게 된 뒤부터 과할 정도로 내게 온 신경을 몰두했다. 곁에서 지켜보며 하나하나 관심을 두고 궁금해했다. 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했던 유건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 잠깐 사이에 내 혼란과 야만적인 크리먼에 대한 경멸, 내 가치관을 알아챌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나를 믿어 주지? 다른 사람도 아니라 하필 왜 이 녀석이…. 도대체 백유건이 왜….

그는 이 순간만은 모든 사람이 나를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해도 믿어 줄 것만 같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가이딩을 위해서 연기를 하는 것이고, 진심이 아닐 거라고 외면하려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다 문득 만약 지금 이 상황이 오해라도 유건을 완전히 끊어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 나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잔뜩 비틀려 있었다.

매일같이 의심하고 불안에 떨고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밀어낸 것처럼 유건 또한 그런 나와 엮여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만약 그가 그저 잘해 주고 싶었다는 말이 사실이어도, 받는 사람이 의심하고 밀어낸다면 무슨 소용인가. 나는 계속 부정하고 벽을 치고 밀어낼 텐데. 그가 평생 내게 찾아오지 않을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나와 연관되선 안 됐다. 그가 나와 매칭률이 높다고 이 상황을 감내할 책임은 없었다.

“너 보면 물어뜯고 싶고 틈만 나면 피를 빠는 상상 해.”

“그러니까 너는 상상만….”

“너 왜 그날 사고에서 나만 살아남았는지 알아?”

나는 누구에게도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입에 올렸다.

“연구소 사람들은 다 죽거나 사라졌는데, 왜 나만 살아남았을까? 그 이유에 대해 생각 안 해 봤어?”

내 입가엔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유건은 내 얼굴을 못 박힌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다 죽인 거야. 크리처든 인간이든. 부모님이든… 뭐든 분간 못 하고 다 죽인 거라고.”

“구사월….”

“이제 좀 이해가 돼? 내가 너 다른 건 다 싫어도 네 피에는 환장하잖아. 페어 유지하고 싶으면 옷이라도 벗어 봐. 그럼 생각해 볼 테니까.”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던 표정이 일순 무언가 얻어맞은 것처럼 경직됐다. 일그러진 눈썹과 얇게 떨리는 입매. 미약한 경멸과 수치스러움이 엿보였다.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좀 편해?”

그는 역시 이 말조차 믿지 않았다. 내가 죽였다는 말 자체를 믿지 못하는 건지, 내가 피에 환장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를 완전히 밀어내려 한 말에 되려 내 심장이 육중한 돌멩이가 짓찢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저 아래 꾸역꾸역 묻어 놓은 과거의 기억이 서서히 부유하며 떠올랐다.

“가이딩 필요 없다 그랬지?”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유건이 나를 믿어 줄수록 기필코 끊어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럼 어디 거절해 봐.”

“야. 너 뭐 하는 거야.”

나는 그의 멱살을 끌어당겨 얼굴을 붙였다. 그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피해 보라고. 네가 나 밀어내면 믿어 줄게.”

그의 손이 당장에 내 어깨를 밀어내려 할 때였다.

“대신 밀어내면 너하곤 영원히 끝이야.”

“…….”

움직임이 멈췄다. 단단히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페어 파투 낼 거라고. 이제 너랑 가이딩도 절대 안 해.”

뒤로 기울던 상체도 멈췄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더 이상 멀어지지도 않았다. 이를 악다문 채로 혼란에 빠진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빠진 모습을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말을 잘 듣네. 이럴 거면서 왜 이렇게 앙탈을 부렸어?”

그리고 그대로 그의 티셔츠를 잡아당겨 입술을 찍어 눌렀다.

“읍.”

입술과 입술이 닿을 때, 그는 감전된 것처럼 움찔 떨었다. 뒤늦게 나를 밀어내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틀며 더욱 깊게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윽고 그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쪽, 쪽 소리 나게 빨다가 혓바닥을 세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의 윗니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어서 아무리 문질러도 진입이 막혔다.

“입 안 열 거야?”

방향을 틀어 입술 안쪽 점막을 혓바닥으로 부드럽게 핥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아랫입술을 감싸고 쭉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늘어난 입술이 찹, 하고 살이 부딪히는 마찰음을 냈다. 그는 내 입술이 잠시 떨어지자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낯선 침입에 유건의 혀가 이리저리 도망쳤지만, 좁은 입 안에서 도망쳐 봤자였다. 이윽고 유건의 혀가 얽히고, 그의 달큼한 향이 내 후각을 자극했다.

본능적으로 내가 그의 혓바닥을 쪽쪽 빨아 대자 그가 잘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아직도 혼란스러운지, 여전히 소극적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움직임이었다. 그가 얼굴을 비틀며 나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듯 부들부들 떨었다.

“구, 사월. 잠깐…. 그만. 읏.”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파장을 퍼뜨렸다. 다시 견고하게 다물린 입술을 열어 달라는 것처럼 쪼아 대듯 입을 맞췄다. 그가 곧바로 반응하듯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거기서 물러나지 않고 몸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의 흉곽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몸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활동복 덕분에 그 모습이 무척 야하게 느껴졌다. 점점 더 아래를 향하는 손길에, 그가 불시에 내 손목을 휘어잡았다.

“적당히 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장단을 맞춰주는 것뿐이지, 여전히 내가 함부로 구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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