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상황 파악 못 하고 날뛰는 망아지를 일단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서 한결의 손에 붙잡힌 손목을 흔들어 풀어냈다.
“너도 놔.”
그러곤 절대 떨어뜨리지 않겠단 의지가 느껴지는 유건의 손도 떼어 놓기 위해 손목을 비틀며 말했다. 그러나 내가 벗어나려 할수록 유건은 더욱 세게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백유건. 이 손 놔. 아프다고!”
결국 내가 소리치며 신경질적으로 뿌리치자 그는 내 손목을 놓았다. 손목엔 붉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부분을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에스퍼의 흥분이 묻어난 파장까지 덕지덕지 느껴졌다.
“사월아. 괜찮아?”
“네.”
한결이 자국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손을 마사지하듯 주무르자 유건이 날 선 목소리로 물어왔다.
“내가 방해꾼이지. 그렇지? 둘이 분위기 좋았는데 내가 깽판 놓은 새끼인 거잖아.”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식사 때만 해도 좋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그가 들이닥치기 직전엔 전혀 좋은 분위기였다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점점 열이 오르던 중이었다. 다름 아닌 지금 눈앞에 있는 백유건 때문에. 차라리 이 타이밍에 그가 온 것이 잘됐단 생각이 들었다.
“나가서 얘기해.”
나는 신발을 신고 백유건을 끌고 나가려 했다.
“사월아.”
한결이 그런 나를 불러 세웠다.
“괜찮아요. 저도 백유건이랑 할 말 있어요. 선배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걱정스러운 눈을 한 한결을 두고 유건을 잡아당기자, 그가 한결을 노려보더니 나를 따라 나왔다. 이윽고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조금 전까지 큰 소리를 들어서인지 귀에 지잉, 하고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너 나랑 한 약속 잊었어? 내가 한결 형 옆에 가까이 있지 말라고 했지. 크리….”
“백유건 입 닥쳐. 여기가 어디라고 그 말을 꺼내.”
나는 짓씹듯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유건이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결국엔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를 낮추며 대화하기엔 유건뿐만 아니라 나도 흥분 상태였다. 괜찮은 척했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점점 참기 힘들었다. 너무 열을 받아서인지 두통까지 느껴졌다. 나는 잠시 이대로 헤어지고 내일 다시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유건과 내가 둘 다 감정적으로 격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는 하기 힘들 것 같았다.
“너 한결 형이랑 키스했어?”
그런데 유건이 자꾸만 내 신경을 긁었다.
“아니. 한결 형이랑 혹시… 그런 건 아니지?”
“…야.”
“대답해.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면 되잖아.”
그는 기어코 내 아슬아슬하던 신경 줄을 끊어 버렸다.
“백유건. 너도 이 기숙사 살지? 집 어디야?”
그는 내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하단 눈을 했다.
“어디냐고.”
“…아래층.”
“안내해.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는 한결 누그러진 내 목소리에 순순히 앞장서 계단을 내려갔다. 유건의 숙소는 그의 말대로 한결의 바로 아래층이었다.
그가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내가 먼저 들어가자, 현관 센서가 어두운 내부를 밝혔다. 유건이 뒤따라오고 문이 완전히 닫혔다.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 복도에서 이야기하다가 밀폐된 공간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내가 그의 집으로 온 건 들킬까 봐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 나 또한 유건에게 할 말이 많았다.
“내가 누구랑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뭐?”
돌연 순식간에 변한 태도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선배랑 뭐,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어쩔 건데. 내가 말했지. 페어 했다고 네 거라도 된 것처럼 취급하는 거 불편하다고.”
내가 쏘아 대듯 말하자 그는 잠깐 주저했다.
“그리고 뭐? 너 선배한테 나 만나는 거 허락했다면서.”
“그건….”
“참나, 웃기지도 않아. 네가 뭔데 나를 만나는 걸 허락을 하네 마네 해?”
이건 처음 한결의 입에서 들었을 때부터 열 받던 내용이었다. 한결도 유건도 순서가 한참은 잘못됐다. 한결이 나랑 연애라도 할 생각이었으면 내게 먼저 마음을 전했어야 했다. 페어에게 허락을 구한다는 건 의무가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예의를 가장한 것이지, 가이드가 누굴 만나던 에스퍼가 제어할 권리는 없다. 꼭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 가이딩. 오로지 가이딩뿐이었다. 그것 또한 일반적인 페어라는 가정일 때의 얘기였다. 당사자인 나를 두고 저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불쾌했고 또 열이 받았다.
“게다가… 이건 또 뭐야? 그렇게 말해 놓고 막상 내가 누구 만나니까 눈깔이 뒤집히니?”
유건과 나는 서로 좋아서 페어를 한 게 아니었다. 까놓고 말하면 난 크리먼인 걸 들켜 협박을 당했고, 그는 약점을 잡고 제멋대로 내 일상을 들쑤셨다.
조금 전에도 당사자는 이렇게 마음을 졸이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꺼내려 했다. 나는 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래. 네가 다른 사람 만나는 거 상관 진짜 안 해. 근데 한결 형은 만나지 마. 어려운 일 아니잖아.”
유건은 자기가 한 말이 있으니 반박하는 대신 지금 와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왜? 내가 선배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나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물어뜯을 것 같아서 그러지? 나는 이성이고 뭐고 식욕에 돌아 버린 크리먼이니까. 그렇지?”
“하…. 그런 거 아니라고. 나는 반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유건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한결 형이랑 연애라도 하다가 네가 형이랑 가이딩까지 하고 싶어지면? 난 그 꼴은 못 본다고.”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가이드가 에스퍼의 집에 가면 무조건 사귀고 나아가 가이딩을 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난 분명 한결과 가이딩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왜 이렇게 단정 지으며 얘기하는 거야?
나는 유건이 하는 말이 진심으로 이해가 안 돼서 그간 그와 있었던 일을 천천히 떠올려봤다. 처음 유건은 한결과 가까이하지 말라는 조건을 걸고, 페어를 하면 내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말했다. 내가 한결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후 다른 에스퍼를 경계하고 내 가이딩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줬지. 그다음 내가 크리먼이 아니라면 페어가 아닌 상대와 사귈 의향이 있다고 하자, 유건은 누구를 만나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은 상관없지만 한결은 만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내가 한결과 연애를 하면 가이딩이 하고 싶어질까 봐….
그러니까 결론은 다른 사람과는 연애 가능성이 없는데, 한결과는 가능성이 있으니 무조건 조심해라?
“씹, 진짜 어이가 없네.”
유건이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다고 말한 건, 내가 한결 외에 다른 사람을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외에 다른 에스퍼와 가이딩하는 게 그냥 싫은 거였다.
그래서 한결에게 나를 만나도 좋다고 해 놓고 이제 와서는 페어 관계에 지장이 갈까 봐 발작하던 거고?
곱씹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 너랑 페어 안 해.”
“뭐?”
유건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물었다.
“페어도 파기하고 내 비밀을 까발리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구사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더 이상 너한테 휘둘리기 싫어. 애초에 너랑 엮이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까지 형을 만나야겠어?”
“아니. 네가 하는 짓이 너무 짜증 나서 더 이상 못 해 먹겠다고. 네가 아무렇지 않게 내 일상에 끼어드는 것도 싫고, 네가 에스퍼인지 애인인지 구분도 못 하는 애새끼인 것도 싫어. 넌 첫인상부터 별로였어. 내가 잠깐 돌았었나 봐.”
“…….”
기분이 나빴다. 내 열에 내가 놀랄 만큼 팔팔 들끓었다. 내게 아무리 개 같은 놈들이 들러붙어도 내가 이렇게 열 받았던 순간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열감에 머리가 지끈지끈한 걸 넘어서 터질 것 같았다. 목 안이 따끔따끔해서 말을 잇는 것조차 힘들었다. 용암을 통째로 집어삼킨 기분이었다.
유건이 내 가이딩을 원하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날 처음 봤을 때부터 충전기로 대했다. 보자마자 예쁘다며 페어를 제안한 것만 해도 뻔했다. 그의 눈엔 성능 좋고 화려한 고급 충전기일 뿐이니 놓치기 아까웠을 테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유건에게 이렇게 화가 날까. 쟤는 원래 저랬는데.
“근데 애초에 가이딩이 목적이었으면 왜 그랬어? 페어를 했으니까 네 목적은 이뤘는데 굳이 피곤하게 왜 따라다녔냐고. 내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말하고, 위험하다고 걱정하는 척하고. 날 이해하는 척, 질투하는 척, 왜 사람 좋은 척 내 주변을 얼쩡거렸냔 말이야.”
그랬다. 유건이 그렇게 내게서 가이딩만 바랐다면 왜 그런 수고를 한 것일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그동안 유건이 내게 보여 준 모든 선의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조롱당한 기분이었다. 불쌍하게 봐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실컷 동정만 받다 다시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깨달았다.
“아. 넌 절대 내 비밀 발설 못 하겠구나. 너는 나 절대 못 버려. 그렇지?”
유건의 눈초리에서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그가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봤다. 나는 예감했다.
‘이건 내가 절대 갑이다. 처음부터 잘못됐구나.’
유건은 내가 갈증을 참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며,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떨어뜨렸다.
특히 에스퍼에게서.
그리고 내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제게 완벽히 의지하게 만들려고 날 이해한다는 둥 듣기 좋은 말을 했을 것이다.
내 가이딩을 저 혼자 독차지하기 위해서.
가이딩에 초점을 맞추니 유건이 이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전부 이해가 됐다.
내 가이딩에 미쳐서 내 정신까지 옭아매어 저만 보도록 계략을 꾸민 것이다. 그는 가이드에게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유형 중 하나. 그 첫 번째 유형인 거였다.
‘자신이 모두 다 가져야 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
“그래, 나 너 못 버려.”
유건은 순순히 인정했다. 나의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머리가 시리도록 차가워졌다.
“버리긴 무슨. 가진 적도 없는데 어떻게 버리겠어.”
그런데 왠지 계략을 꾸몄다기엔 묘하게 패배자 같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