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말도 안 된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려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딘가 긴장돼 보이는 한결의 모습이 전이돼 나까지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랑 앞으로도 이렇게 저녁 먹자.”
“그러니까 밖에서라면….”
“밖에서든 안에서든. 너랑 맛있는 거 먹고 이렇게 소소하게 일상 얘기하고 싶어. 그동안 못 해 준 만큼 더.”
이게 무슨 얘기일까. 그는 나에게 항상 잘해 줬는데….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무렵,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손잡고 싶으면 이렇게 손잡고,”
“선배, 잠깐만요.”
그와 손을 잡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닌데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이전에 한결이 페어를 요청할 때 지었던 미묘한 눈빛이었다. 그 미세한 변화가 오늘은 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정확히 짚어낼 수 없지만 좀 더 다정하고 더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그러니까.
“입 맞추고 싶으면 입 맞추고.”
“네?”
그에게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욕망이 엿보였다. 나는 너무 놀라서 목소리가 날 서게 올라갔다.
“안 될까?”
“갑자기 이건….”
“갑자기 아니야.”
그가 잔뜩 움츠러들어 머뭇거리는 내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나는 너 여자로 본 지 꽤 됐어.”
한결이 나를 여자로 보다니. 내가 여길 오면서 추측했던 선택지엔 전혀 없던 내용이었다.
“언제부터요?”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침착하게 물었다.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그가 나를 여자로 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나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 그 사실은 과거에 여러 번 확인 받았고, 그와 있으면 그걸 매일같이 체감했다.
오늘도 계속 애 취급하지 않았었나.
“너 중학교 올라가고 센터 기숙사 나간 다음에 우리 안 본 지 꽤 됐잖아. 연구소 가도 바쁘다며 안 만나 줬고.”
“네.”
그때 나는 사춘기였다. 그 당시 그를 보면 뭔가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피해 다녔다. 결국에는 그가 나를 보러 학교 앞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에스퍼에게 관심이 있는 친구들은 S급이자 어려서부터 활동해 온 한결을 단박에 알아봤고 무슨 사이냐고 물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냥 아는 오빠란 말을 하기 싫어서 그를 모른 척했다. 그 후로 한결은 많이 불편했냐며 학교엔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가이드로 각성했다고 알파 팀 들어왔지. 나한테 한마디 언질 없이.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가 나를 이성적으로 보지 않는 건 내가 일반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밤 가이드가 되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내 기도가 닿은 건지 나는 열여섯 살에 S급 가이드로 각성했다. 아카데미를 수료한 후에 곧바로 알파 팀에 지원했고 한결을 오랜만에 마주했다.
“하지만 그때….”
“그래. 내가 일부러 차갑게 굴었지.”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가 가이드가 아니어서 한결이 나를 여자로 보지 않은 것이 아니구나. 그는 내가 가이드가 돼도, S급 뱃지를 달아도 나를 전혀 여자로 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연애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과거 그의 행동을 되짚어 볼수록 지금 하는 말과 앞뒤가 맞지 않아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땐 너랑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한결의 입에서 의미 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왜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꽤 긴 시간이었다. 나는 그가 입을 뗄 때까지 기다려줬다.
이윽고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너무 무거운 얘기라…. 나중에 기회 되면 알려 줄게. 지금은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아.”
대체 무슨 얘기길래. 그에게 무거운 얘기라면… 친모와 관련된 얘기일까.
한결은 언뜻 보기에는 차분한 것 같았지만, 그를 오래 본 나로서는 도무지 좋아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 캐묻기 어려웠다. 그의 어머니가 크리먼에게 공격받았기에 크리먼과 연관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한결은 내가 크리먼인 걸 모르는데…. 나는 순간 떠오른 불안감에 이를 까득 씹었다.
“이미 부담스러우려나.”
그는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무튼 그가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고 예전부터 내게 마음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나에겐 지금 이 상황이 무척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답은 정해져 있다. 백한결과 그의 어머니, 크리먼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그것만으로도 그의 앞에 서면 가슴이 빠듯하게 조여 왔다. 크리먼이 된 후로 누굴 사귈 생각도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한결은 더욱 그래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과거에 무슨 이유가 있었건, 나 또한 이제는 그와 가까워져선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크리먼인 나는 한결과 이어질 수 없다. 이건 고민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또 미안해?”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어릴 적 한결을 좋아했던 마음 또한 아이돌이나 잘생긴 교생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마음을 접는 것 또한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아니야?”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 아니었더라도 내 인생에서 한결만큼 신뢰하고 인간적으로 호감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기고 인품이 바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를 신뢰하고 존경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내가 가이드가 돼서 그를 찾아왔을 때 한결이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관계가 발전되어 사귀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 크리먼이 됐으니까 어차피 헤어졌겠지만.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너는 이런 쪽으로는 항상 칼같이 끊어 내던데.”
“…….”
“혹시 다른 이유가 있어?”
그런 것까지 알아챘을지는 몰랐는데. 조금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 볼 걸 그랬나. 조금 난감해져서 침묵을 지키는데 한결이 다시 한번 물었다.
“유건이 때문이니?”
그 질문은 다행히 완전 헛다리를 짚었다. 나는 잠시 그에게 거짓말을 할까 고민했다. 이럴 때 페어는 꽤 쓸모 있는 변명거리였다. 페어를 생각해서 일부러 남자 친구를 만들지 않는 가이드도 더러 있었으니까.
다만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한결에게 유건을 좋아하는 척까진 아니더라도 사이가 좋은 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상상만 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내 비밀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필요 이상으로 안 해도 될 거짓말까지 하는 기분이었다.
“그거라면 이미 허락했어.”
“네?”
“유건이가 너랑 나 만나는 거 허락했다고.”
속으로 어떤 대답이 나을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있는데, 한결의 말에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그래도 걸려?”
“아니, 잠깐만요. 백유건이 허락했다고요?”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진짜요?”
“그래.”
그가 나와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도 잘 이해가 안 됐다. 마치 이계의 언어를 듣는 것처럼 재차 확인받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백유건이 허락했다니. 무엇을? 내가 선배를 만나는 걸? 왜?
손끝이 점점 떨려 왔다. 심장 박동이 점점 속도를 높였고, 뜨거운 온기가 발끝부터 차올랐다.
“사월아. 괜찮아?”
내가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자 한결이 내 안색을 살폈다. 이유 모를 날 것 같은 분노가 차올랐다.
쾅쾅쾅쾅!
한순간 무거운 분위기를 깨트린 건 둔탁한 소음이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 소리는 연이어 내 귀에 때려 박혔다.
쾅쾅쾅!
“구사월!”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챌 수 있었다. 유건이었다. 그가 한결의 집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너 여기 있지! 다 알고 왔어!”
한결은 이걸 열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사월! 문 열어!”
문과 가까워질수록 문을 두드리는 마찰음과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내 뒤로 한결이 곧바로 따라왔다.
“괜찮겠어?”
“네.”
중문을 지나 현관에 도착하자 금속 재질의 문이 유건의 주먹 자국으로 움푹 패어 있었다.
덜그럭거리는 손잡이는 내가 굳이 문을 열어 주러 오지 않았어도, 그가 곧 부수고 들어왔을 거란 생각이 들게 했다.
도어 록 잠금을 풀자마자 문은 사나운 기세로 열어젖혀졌다.
“구사월.”
유건이 희번덕한 눈을 하고 있었다. 갈색 눈동자엔 노란빛이 일렁였다. 각성자가 감정적 동요를 크게 일어나면 일시적으로 홍채가 발광하는 현상이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밥 먹으러 왔어.”
“그니까 왜 밥을 한결 형 숙소에서 단둘이 먹냐고.”
게이트에서 급하게 달려왔는지 유건의 옷차림은 여전히 전투복이었고, 곳곳에 크리처의 체액이 묻어 있었다.
연락도 없이 곧바로 여기로 달려온 걸 보면 휴게실에서 한결과 나의 대화를 들은 누군가가 유건에게 알린 것 같았다.
‘하긴, 센터 놈들은 남 얘기하는 거 꽤나 좋아하지.’
피곤하단 눈으로 가만히 서 있는데 돌연 유건이 내 옷을 이리저리 살폈다. 마치 어떠한 흔적을 찾는 것처럼 집요하게 이어지던 시선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내 얼굴 한 부분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뭐 하는 거야.”
유건이 내 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힘 조절이 전혀 안 되는 거친 손길이었다. 짜증을 내며 그의 손을 치워 내자,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
뒤늦게 유건의 손가락이 닿았던 입가를 닦아 냈더니 손가락에 붉은 립스틱이 묻어났다. 아까 한결이 생크림이 묻은 걸 닦아 내고 손등으로 비볐는데, 그 때문에 화장이 번진 모양이었다.
유건의 눈에서 맹렬한 불길이 번졌다.
“너 나와.”
“유건아.”
“놔. 형.”
유건이 내 손목을 잡아당겼고, 한결이 반대쪽 손목을 붙잡았다. 유건이 한결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 없는 틈에 얘 데리고 뭐 했어? 왜 숙소까지 끌고 가냐고.”
“그때 말했잖아. 규칙 지키겠다고.”
“근데 얘 입술이. 왜 이렇게…!”
그가 차마 입에도 담기 싫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나와 한결을 아주 불쾌한 것을 보듯 번갈아 봤다.
별안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유건이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어이없는… 오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