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1/131)

한결이 묵고 있는 ES동 기숙사는 에스퍼 전용 기숙사로 S급에서 A급 에스퍼를 수용한다. A급에서도 희귀한 정신계나 자연계 에스퍼만 자격이 되며, A지부 에스퍼 기숙사 중 가장 좋은 퀄리티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건물 외관은 여느 5성급 호텔 못지않게 화려했으며, 숙소로 들어가자 모노톤의 세련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거실은 최소한의 가구만 있었고, 주방엔 그래도 음식을 자주 해 먹는 건지 조리 도구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잠깐 거실에서 티브이라도 보고 있을래? 금방 만들어 줄게.”

“어떻게 그래요. 저도 도울게요.”

“손님은 앉아 있으세요.”

“가만히 있는 거 불편한데….”

“그럼 집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그가 한사코 도움을 거절하는 통에 나는 겸연쩍어하며 거실로 걸어갔다. 한결의 숙소는 전체적으로 층고가 높고 내가 지금 사는 숙소보다 넓었다. 이 숙소는 그가 정식으로 배정받은 숙소였고, 나는 임시로 거주하는 곳이라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벽면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벽에 다양한 그림이 계단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평소엔 예술에 그렇게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그 그림들을 천천히 감상했다. 대부분 크리처와 싸우는 상황을 실감 나게 표현한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림이 마지막으로 한 점 남았을 때, 그 그림을 다른 그림보다 더 유심히 들여다봤다. 아름다운 반나체의 남자가 용맹하게 상공에 떠올라 있었다. 날카로운 창으로 크리처의 뱃가죽을 찌르는 잔악무도한 장면이었다.

크리처는 귀가 뾰족하고 뿔이 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괴물보단 악마와 더 비슷해 보였다. 흡사 신이 악을 처단하듯 정의로워 보이게 묘사되었지만, 나는 그 그림을 보고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굳이 이런 그림을 숙소에 걸어 둘 필요가 있나. 일부러 경각심을 주려는 게 아니고서야….”

혼잣말하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림 아래 필기체로 휘날린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백자강

한결의 할아버지 성함이었다.

‘그러고 보니 센터장 님이 취미로 그림을 그리신다고 했었지.’

한결의 집안은 대대로 명망 높은 에스퍼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백지상은 현재 A지부 지부장에 재임 중이었고, 할아버지 백자강은 센터 회장님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전성기 때는 S급 에스퍼였으며, 그중 센터장 님은 오래전 A 지역에서 S급 게이트가 출연했을 때 활약한 나라의 영웅이었다.

센터장 님은 지금은 현장을 떠났지만, 센터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단상에 올라가 연설하곤 했다. 그때마다 각성자가 가져야 할 긍지와 자부심, 그 책임의 무게에 대해 설파했다.

그리고 나도 백자강 회장님과 여러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자꾸 아는 체를 했다.

“구사월 가이드. 알파 팀에서 맡은 업무를 무척 잘 수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구사월 가이드에게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앞으로도 가이드로서 소임을 다해 주세요.”

“예. 회장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그저 눈도장을 찍는 것처럼 회장님은 판에 박힌 칭찬을 하고,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게 다였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한결의 어머니가 크리먼에게 목숨을 잃지 않았더라도, 그가 크리처의 피가 반 섞인 크리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뿌리 깊은 백씨 가문에서 자랐으니 어릴 때부터 크리처는 세상 만악의 근원이고, 맞서 싸워야 할 존재라고 세뇌되듯이 교육받았을 것이다.

나 또한 학교에서 그런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크리먼이 되고 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크리먼 또한 반은 인간이다. 에밀리와 나처럼 주기적으로 흡혈만 한다면 충분히 일반인처럼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분별하게 인간을 살해해 온 크리먼 때문에 무조건 괴물로 배척받아 왔다. 그건 불합리하고 답답한 걸 넘어서, 우리에게 인권이 없다는 걸 여실히 느껴지게 했다.

이 억울함은 자신이 그 처지가 돼보지 않는다면 깨닫기 어려운 종류였다. 한결처럼 등급이 높고 집안도 좋은, 굳이 그들의 입장을 헤아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

나도 크리먼이 되지 않았다면, 무조건 크리먼을 크리처로 간주하며 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본능을 억누르고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크리먼이든 야만적인 크리먼이든 관심조차 두지 않았겠지.

‘근데 백유건은 뭐지. 돌연변이인가.’

“뭐 해?”

상념에 잠겨 있는데 한결이 불쑥 찾아왔다.

“아. 아무것도요. 다 됐어요?”

“어. 내려와.”

“네.”

그는 내가 주시하던 그림을 힐끔 바라보더니 뒤돌아섰다. 나도 찝찝한 감상을 뒤로하고 그를 따라갔다.

주방과 가까워지자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테이블엔 바질이 버무려진 파스타와 샐러드. 리소토와 와인이 올려져 있었다. 잠깐 사이 만들었다기엔 놀라운 수준이었다.

“와인 괜찮지? 아니면 음료수로 줄까?”

“아니요. 와인 먹을래요.”

원래 한결과 술을 마실 계획은 없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한결이 음료수를 운운하는 걸 보고 또 애 취급을 하는 것 같아서 반발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결은 가볍게 웃더니 오프너로 코르크 마개를 뽑았다. 뽕, 소리와 함께 향긋한 포도 향이 퍼져 나갔다.

그는 튤립형으로 된 내 와인 잔에 3분의 1 정도 채워 줬다. 내가 곧바로 잔에 손을 대자 한결이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봤다.

“잘 자랐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보란 듯이 잔을 반쯤 비웠더니, 이번엔 이까지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술꾼이 되어 버린 줄은 몰랐네.”

“이 정도는 다 먹거든요?”

내가 불퉁하게 대꾸하자 한결이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채우고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무슨 자기가 날 키운 것처럼 말해.”

와인 잔이 맞부딪치자 챙, 하고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유리 잔을 느리게 기울여 가볍게 입을 축였다. 그 모습은 현장에서 가장 몸을 과격하게 움직이는 육체계 에스퍼라기엔, 무척 고상해 보였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지. 센터에선 내가 너희 부모님보다 너를 더 많이 돌봐 줬는데.”

나는 부모님이 둘 다 A지부에 근무하는 연구원이었기에 어렸을 때는 센터 기숙사에서 지냈다. 한결은 그때 이미 알파 팀에서 최연소 에스퍼로 활약 중이었고, 그가 귀찮아할 걸 알면서도 한결에게 데려다 달라고 엄마에게 떼를 쓰기도 했다.

“뭐, 아빠라고 불러드려요?”

하지만 크고 나선 안 그랬는데. 갑자기 철없고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가 자꾸 흑역사를 들추는 것 같아서 쑥스러웠다.

“아빠 말고 오빠 소리가 더 듣기 좋아. 왜 이제 오빠라고 안 해?”

“그땐 내가 어려서 그랬고…. 선배랑 제가 그렇게 적은 나이 차이는 아니잖아요.”

한결과 나는 일곱 살 차이가 났다. 친구로 지내기엔 멀고, 격식을 차리기엔 그렇게 많은 차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 건 일부러 거리감을 가지려는 의도도 있었다.

“아. 내가 아저씨 같다?”

“서른 살이면 아저씨 아닌가….”

혼잣말하듯 말꼬리를 흐리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먹으라는 손짓에 포크로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한결은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스퍼는 신체 나이의 최전성기인 20대 초반부터는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괜히 다 알면서 그러지.’

그의 여유로움을 보고 있으면 가끔 심술이 났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밥을 먹으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분위기는 금방 부드러워졌다.

“이건 과일 많이 들어간 거, 이건 크림 많이 들어간 거. 뭐 먹을래?”

“음…. 크림이요.”

그는 내 접시가 거의 비워질 때쯤, 미리 만들어 놓은 파르페를 들고 왔다. 안쪽엔 크림과 견과류로 층을 쌓았고, 겉은 여러 과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파르페는 보기에도 좋았지만, 맛 또한 당장 밖에서 팔아도 될 정도로 일품이었다.

“그동안 요리 학원이라도 다녔어요? 혼자 배웠다기엔 솜씨가 너무 좋은데.”

나는 파르페 가장 위에 올려져 있던 꽃 모양으로 만든 사과를 뒤적이며 말했다. 마치 예술가가 공들여 조각한 하나의 작품 같았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컷팅하는 거야.

“어머니가 요리 솜씨가 좋으셔. 나도 써먹을 일 있을 것 같아서 곁눈질로 배웠고.”

그는 어릴 때도 내게 종종 숙소에서 먹을 걸 해 주긴 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혼자 살게 된 이후 저녁은 거의 인스턴트로 때웠는데, 예상치 못하게 양질의 식사를 했다.

‘선배의 어머니라면 백유건의 친모를 말하는 건가. 선배랑도 사이가 좋은가 보네.’

“맛있게 먹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잠깐 이리 와 볼래?”

그가 흐뭇하게 바라보다 불시에 내게 손을 뻗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손길에 내가 움찔 떨며 뒤로 고개를 당겼지만, 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의 손은 주저 없이 내 입가를 닦아 내고는 쓱 물러났다.

“애처럼 묻히고 먹네. 이래도 애가 아니야?”

“…….”

생크림을 먹을 때 입가에 묻은 모양이었다. 그의 엄지에 하얀 생크림이 묻어 있었다.

나는 머쓱해져서 다시 내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이제 말해요. 왜 갑자기 숨기는 거 그만뒀는지.”

그러곤 말을 돌렸다. 뭔가 민망하기도 하고 식사도 어느 정도 마쳤고. 딱 이유를 물어볼 타이밍이었다.

내심 식사 중에 한결이 먼저 말을 꺼낼 줄 알았는데 그는 내가 입을 뗄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평소에 뭐든 정확하고 신속하게 해결하는 한결과 상반됐다. 나는 그래서 더 궁금증이 일었다.

“답답해서. 고작 이게 뭐라고 그동안 눈치를 봤나 싶기도 하고. 그냥 예전부터 아는 사이인 것뿐인데.”

뭔가 있을 것 같단 예상과 달리 그는 가볍게 대꾸했다. 나는 정말 저게 오늘 나를 부른 진짜 이유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너는 안 답답했어?”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일단 센터와 관련한 얘기를 하려는 것 같진 않아서 나는 표정을 풀며 말했다.

“조금요. 근데 아무리 숨기는 걸 그만둔다고 해도, 선배 숙소를 들락거리는 건 이제 이상해요.”

“그래. 너도 이제 성인이고… 오해가 생길 수도 있긴 하겠네. 지금 유건이랑 페어를 하기도 했고. 그렇지?”

“…네. 저녁 먹을 거면 다음부터는 밖에서 먹어요.”

별일이 없다면 다행이어야 하는데. 되려 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 아무 일도 없는데 한결이 나를 숙소로 부른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말하는 걸 보니 모르고 한 행동이 아닌 것 같은데. 다 아는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그저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조심하는 게 답답했다는 이유 때문이라기엔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근데 네가 다 컸어도 사람들한테 안 이상해 보일 방법 있어. 네가 유건이랑 페어를 했어도 말이야.”

“무슨 소리예요?”

안 이상하게 보일 방법이라니. 그런 방법이 정말 있나? 한결과 가족이 아니고서야….

“사월아.”

“네.”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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