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에밀리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이 말 들었을 때 네가 가이드라서 핵이 없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렇다기엔 내 가이드 친구들은 핵이 있어서.”
“맞아. 그랬지….”
내가 죽고 싶어서 핵을 찾을 당시, 나는 내게 핵이 없는 이유에 대해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맞은 항생제가 잘못됐거나, 나를 문 크리처가 뭔가 특별했다거나. 내가 성인이 아니었던 것과 내가 가이드라는 사실까지.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라면 내 핵을 찾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세, 네 번째는 다른 크리먼으로 인해 확인했다. 그들은 모두 핵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흘려듣기엔 가이드를 먹어야 핵이 없어진다는 소문은 무언가 찝찝했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이전의 소문은 정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난 것이었지만, 이번엔 아닐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니, 나는 이게 부디 아니길 바랐다.
만약 가이드와 핵의 관계성을 알게 된다면, 항생제를 기다리지 않아도 내 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소문의 근원지를 알고 싶은데. 그건 찾기 힘들어?”
“그렇지. 크리먼들이 은밀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함정 파고 기다리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럼 힘으로 제압해야 하는데 크리처화를 개방하면 네가 크리먼인 걸 들키잖아.”
“그거야 정보 빼내고 죽이면 되는 거고.”
나는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한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눈치를 보다가는 비밀을 들키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그 녀석들 조직적으로 움직일 가능성도 있어. 섣불리 다가갔다간 네 정체만 까발려지고 못 잡을 거야.”
에밀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런 짓을 할 정도면 개인이 벌인 일은 아닐 것이다.
소문이 나서 마음이 맞는 크리먼들끼리 작당한 것이겠지. 나는 골치가 아파졌다.
“일단 기다려 보자. 그 사건 때문에 센터에서 조사도 들어갔다며. 지금은 너무 위험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답답했다.
“항생제는 어떻게 됐어?”
나는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물었다. 항생제만 찾아낼 수 있다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 그거? 그 연구원이 C 지역에 있다던데 행방이 아직도 묘연해.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하지만 이렇게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더욱 조바심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손을 놓을 수만은 없겠단 생각이 들어서 더욱 깊숙이 캐물었다.
“그 정보 알아다 준 친구 이름이 뭐랬지? 내가 대화해 볼 수 있어?”
“네가 만나려고?”
나는 원래 나서지 않았다. 센터에 몸을 담고 있는 만큼 들켰다간 바로 사살이었고, 인간이 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요즘엔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건이 엮이고 나서 달라졌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숨긴다고 해도 사람 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날 들킨 사람이 유건이 아니라 한결이었다면, 난 더 큰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유건이 바라던 대로 말없이 센터를 떠났을 수도 있었겠지.
나는 한결에게 그만큼이나 크리먼으로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끔찍해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내 부모님과 겹쳐 보일 것 같았다. 그 원망 섞인 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서든, 한결에게서 떳떳해지고 싶어서든. 마음이 조급해졌다.
“응. 만나는 게 좀 그러면 연락처라도 구해 줘. 이제 내가 알아볼게.”
“…찾아는 볼게.”
에밀리는 뭔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성격인 건 알지만 가끔 소극적이라고 느껴졌다.
C 지역에 있다던 연구원의 행방은 처음엔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니, 6개월째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나는 최근에 혹시 에밀리가 크리먼인 이대로 안주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녀는 나 말고도 크리먼인 친구들이 많았고, 그중엔 스스로 크리먼이길 자처한 이들도 있었다. 크리먼을 끔찍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능력을 숭배하고 편리하게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에밀리는 나처럼 자신의 의지로 크리먼이 된 게 아니었다. 그녀도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이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 거냐고 입을 떼기 어려웠다.
‘만약 그런 거라면 속 시원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인간이 되고 싶지 않대도 나는 실망하거나 화가 나진 않을 것 같았다. 처음이야 어쨌든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적응하게 돼 있고, 또 거기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저 에밀리와 내가 다른 건 그녀가 크리먼으로서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것뿐이다.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즐기는 방법은 알게 됐지만, 내 마음 한구석의 불안은 점점 더 몸집을 불려 가고 있었다.
크리먼이 된 후 짙어진 화장이 최근에 연해지는가 싶었는데 유건에게 비밀을 들키고 나서 더욱 두껍게 변해 버렸다. 계속해서 화장을 덧대면 불안감이 조금 나아졌다. 내가 크리먼이란 사실을 스스로가 여전히 끔찍해한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여전히 자괴감이 들고 숨고 싶었다. 내 유일한 치부이고 약점이었다.
잠시 우리 사이 정적이 흘렀다. 에밀리가 내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이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조용해? 내가 너무 늦게 왔어?”
유건이 에밀리가 부탁한 치즈와 다른 손에는 양주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니야. 뭘 그렇게 많이 사 왔어?”
“양주 괜찮은 것도 있어서. 고기 있는데 술 빼놓으면 아쉽지. 구사월은 운전해야 하니까 우리끼리 먹자.”
“좋아.”
“…….”
***
유건과 에밀리는 늦게까지 술판을 벌였다. 그녀는 유건에게 내가 만날 때마다 운전하고 가야 한다며 술을 안 마셔줬다고 토로하며, 오랜만에 재미나게 노는 듯했다.
나는 둘 사이에서 기가 빨려서 도중에 에밀리 방에서 잠깐 누웠다. 그런데 다시 눈을 떠보니 어느덧 새벽 2시였다.
방에서 나와 보니 거실에 에밀리와 백유건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하루 묵고 이른 아침에 센터로 향했다.
“아, 어제 너무 늦게까지 놀았어. 에밀리 술 잘 마시더라.”
“원래 애주가야. 매일 혼자 술 마시는 애라고.”
“나중에 취기 오르니까 크리먼화 해서 간 해독시키던데? 크리먼은 진짜 에스퍼랑 비슷한 것 같아.”
유건은 조수석에 타고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었다. 에스퍼는 웬만한 알코올에 취하지 않는다. 만약 취하더라도 파장을 간에 집중시키면 바로 해독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퍼부었는데도 유건은 숙취 없이 멀쩡했다.
‘어제 에밀리가 생각보다 많이 신났나 보네.’
크리먼이 아닌 애 앞에서 크리먼화를 개방시켰다니. 보통 일반인들은 우리의 외형을 무서워한다. 특히 검은자와 맹수 같은 노란 눈동자는 저절로 크리처를 연상시켰다. 유건은 그런 에밀리의 외양을 보고 놀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몇 번 내가 변하는 걸 보고 그사이 익숙해졌을 수도 있고.
“술 게임 하는데 둘 다 정신이 멀쩡해서 안 걸리는 거야. 나중에는 지쳐서 서로 간 해독시키지 말고 마시자고 했어.”
“잘들 논다.”
“아. 그리고 어제 모르고 잔을 깼는데 그거 치우다가 피가 났는데.”
“뭐?”
나는 유건의 말을 차분히 듣다가 돌연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끽, 소리와 함께 차가 앞으로 가파르게 기울다가 멈춰 섰다.
“아야.”
“어떻게 됐는데.”
유건이 급정거에 놀란 것 같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따지듯 물었다.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크리먼은 직접적으로 공기중에 인간의 피 냄새를 맡으면 갈증을 참기 힘들었다.
돌연변이라 느껴질 정도로 나는 잘 참는 편이지만, 일반적인 크리먼이라면 순간 파괴적인 욕망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에밀리가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가길래 무슨 일이냐고 두드렸더니, 문 사이로 대일밴드 빼꼼 내밀더라. 그거 붙이고 다시 같이 잘 놀았어.”
“…….”
“왜. 너 말고 다른 크리먼한테 피라도 내줄 줄 알았어?”
“아니…. 다행이네. 다음부터 크리먼 앞에선 조심해.”
나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부드럽게 엑셀을 밟았다. 내가 새삼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았다.
에밀리도 크리먼이 된 지 오래됐으니 충분히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으리라. 너무 놀라서인지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너도 그렇고 에밀리도 그렇고, 무서운 크리먼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언제는 나 무섭다며.”
“그땐 잘 몰랐으니까.”
유건은 그 말을 하면서 창문을 조용히 내다봤다. 평소답지 않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오히려 안쓰럽지. 너희가 원해서 그런 삶을 사는 건 아닌데.”
“뭐래….”
나는 그 모습이 어색해서 괜히 불퉁하게 대꾸했다. 내가 방출 게이트 사고로 크리먼이 된 것은 알지 못할 텐데. 어제 에밀리가 자기 얘기라도 한 건가.
유건을 보면 가끔 고민에 빠질 때가 있었다.
그는 분명 처음에 크리먼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 편견에 따라 우리를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겪고 있는지, 그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끊임없이 물어보고 궁금해했다. 심지어 스스로 겪어 보고 싶어하기까지 했다.
처음엔 이런 유건의 크리먼에 대한 관심이, 단지 신기하고 재밌어서인지 알았다. 아니면 우리를 위험하다 여기고 경계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문득 우리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이해해 보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과거에 잘못된 편견에 대해서도 인정했다. 어쩜 저렇게 단순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이런 솔직하고 단순한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 처음에는 의심하다가도 어느 순간 이 사람은 무해하다고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도 빠르게 친해지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에 비해 나는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익숙했다. 그렇다고 유건의 성격을 부러워하거나 저게 옳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우린 그저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 부러운 게 있다면 그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사람을 대해도 상처받지 않는 삶을 살 만큼 그의 인생에 고난과 역경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도 인간이 된다면 날 선 성격이 조금은 누그러질 수 있을까. 내가 S급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없었을까. 유건을 에스퍼 대 가이드인 관계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가 나에게 필요로 하는 게 없었다면… 그가 과연 나를 이해하려고 했을까?
문득 그런 허황된 상상을 했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밀어내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파도 같았다.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