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따라온다는 것은 예상 못 한 전개는 아니었다. 그는 요새 이상하리만큼 내 옆을 따라다녔으니까. 그래서 내내 껄끄러워 하루 종일 말을 못 하다가 지금 꺼내게 된 거다.
하지만 유건이 오면 안 됐다. 나는 에밀리와 흡혈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항생제에 대해 조사한 정보를 나눴다.
에밀리는 연구원의 행방과 이번 습격 사건까지 알아봐 준다고 했다. 유건이 내 비밀을 알게 돼서 페어까지 해 버렸지만, 더 이상 그와 내가 깊게 연관되지 않길 바랐다.
만약 센터에 내 정체가 밝혀지면 유건은 숨겨 준 것만으로도 공범으로 취급될 텐데, 더한 정보를 공유한다면 그에게 더 큰 피해가 갈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기억 안 나? 그날 습격한 크리먼, 내가 다 해치운 거. 만약 습격당해도 문제없다고. 헛소리 말고 시계나 내놔.”
“안 돼. 나랑 같이 가는 거 아니면 너도 못가.”
“그럼 센터 한복판에서 크리처화가 진행되는 진귀한 상황이 벌어지겠네. 와, 재밌겠다.”
내가 비꼬듯이 말하자, 유건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거란 걸 알아서 일부러 세게 말한 거였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나를 설득했다.
“그냥 같이 가면 되잖아. 나 아직도 못 믿어? 그 친구 신고할 거면 그때 쫓아갔겠지.”
“다른 사람한테 피 먹는 모습 보여 주기 싫어. 부끄럽고 자존심 상해.”
나는 괜히 다른 이유를 덧붙이며 약한 척을 했다. 사실 유건이 그 모습을 보는 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처음에야 자괴감에 빠졌지만, 지금은 주기적으로 흡혈을 하고 취향까지 고려하며 먹을 만큼 여유를 찾았으니까.
하물며 나는 유건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나를 징그럽게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이미 내 허리도 세상 맛있게 꼭꼭 씹었으면서 새삼스럽다고 생각 안 해?”
“…….”
그 생각을 단숨에 들켜 버렸다. 이제 와서 부끄럽다고 하기엔 내 욕망에 너무 충실했던 탓이었다.
그렇게 꼭꼭 씹진 않았던 것 같은데. 피 좀 빤 것 가지고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닌가. 나는 머쓱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너 흡혈하는 거 이상하게 생각 안 해. 취향이 조금 독특하다고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일반인 중에서도 먹는 사람 있잖아.”
“그거랑 그거랑 같냐. 그건 기호가 맞아서 먹는 거고, 나는….”
안 먹으면 뒤져서 먹는 건데. 유건은 너무 가볍게 대꾸했다.
“네 비밀 숨겨 주려면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나도 알아야 해. 내가 다 알고도 페어를 하자고 한 건 맞지만, 너도 나한테 들키고 모른 척해 달라고 했잖아. 이 상황 너한테도 책임은 있어.”
알고 있었다. 내 비밀을 알게 돼서 유건 또한 난감한 상황이라는 걸. 그래서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건데, 녀석은 좀처럼 협조해 주지 않았다.
“같이 가자. 나 진짜 네 옆에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게. 너 센터에서 나 공기 취급 잘하던데. 그렇게 해.”
그는 내 팔을 붙잡고 칭얼거렸다. 그가 이미 내 일에 휘말린 건 맞아서 모른 척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이 녀석을 어떻게 떨구지.’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데, 유건이 인심 썼다는 듯 말을 보탰다.
“그래. 오늘만 특별히 내 피도 조금 줄게.”
나는 본능적으로 움찔 떨었다. 순간적으로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솔깃한 제안이었다. 머리로는 당연히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벌써 폐를 깊게 들이마시며 유건의 다디단 향을 맡았다.
내가 힐끔 유건을 바라보자 유건이 바로 도끼눈을 키며 말했다.
“이거 봐. 이게 무슨 부끄럽단 태도야. 너 나한테 그런 거 신경 전혀 안 쓰잖아.”
저 녀석이 가끔 쓸데없이 예리하지.
“친구한테 물어보고.”
“당장 전화해 봐.”
“친구가 안 된다고 하면 진짜 안 돼.”
나는 이 문제를 에밀리에게 미뤘다. 에밀리는 분명 안 된다고 할 테니까. 그가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에밀리에게 백유건도 가도 되냐고 문자를 했다.
「너랑 페어한 친구 맞지? 같이 와!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그 친구는 뭐 먹고 싶대?」
하지만 에밀리는 내 기대를 배반했다. 되려 유건이 오는 걸 격렬하게 환영했다.
유건의 음식까지 만들겠다니. 이럴 리가 없는데. 혹시 둘이 짜고 친 게 아닐까.
‘둘이 그날 사실 만났나?’
내가 답신을 보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유건이 슬쩍 고개를 내려 내 휴대폰 화면을 훔쳐봤다.
“뭐래?”
이미 다 봤으면서 되묻는 것이 얄밉게 느껴졌다. 에밀리가 사람을 좋아하고 밝은 성격이라지만, 이건 과한 것 아닌가.
‘비밀을 들킬 위험성을 못 느끼는 거야?’
유건은 생글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해 놓은 말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툭 내뱉었다.
“30분 후에 내 기숙사 앞에서 만나.”
“좋아.”
“가서 진짜 입 닫고 있어야 해.”
“그럼.”
“숨도 쉬지 마.”
“응!”
이 상황이 못마땅하여 심술을 부렸지만, 유건은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더 불안해졌다. 저 철딱서니 없는 녀석이 분명 사고를 칠 것 같았다.
***
우리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내가 기숙사 입구에서 나오자, 그는 내 행색을 보고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고 갈라고?”
“왜.”
“너무 휑한 것 같지 않아?”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가슴까지 아슬아슬하게 파인 스퀘어 넥 티셔츠와 골반 라인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센터 제복은 목까지 올라오는 방탄 소재의 티셔츠나 블라우스 위에 정장을 입는 형태였다.
나는 원래 목이 답답한 걸 싫어했다. 제복의 그 숨 막히게 조여 오는 목 폴라와 블라우스가 질색이라, 나는 퇴근하기가 무섭게 옷부터 벗어 던지곤 했다.
‘딱히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은데. 노출이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차나 타.”
“아니, 잠깐. 지금 차 타고 출발하면 밀려서 B 지역까지 두 시간은 걸려. 내 오토바이 타고 가자.”
“오토바이를 왜 타. 안전한 자가용 놔두고.”
“네 친구 기다리다 지쳐 잠든다니까?”
“그 위험한 걸 왜 타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별로 안 위험해. 내가 얼마나 운전을 잘하는데.”
“죽을 거면 제발 혼자 죽어. 나는 치명상 입으면 바로 변한단 말이야.”
오토바이를 탄다고 바로 교통사고로 귀결시키는 게 예민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위험한 상황은 피했다. 만약 치명상이라도 입는다면, 바로 크리먼화가 진행돼 눈동자 색이 바뀌기 때문이다.
“알았어. 빨리 가자.”
유건은 내 말을 듣더니 고집을 부린 게 언제냐는 듯 냉큼 내 차에 올라탔다.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짜증 난다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놀러 나가서 신난다는 것처럼 표정이 밝았다.
나는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운전석에 올라탔다. 유건 말대로 가는 길이 막혀, 도착했을 땐 이미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여기야?”
“어.”
에밀리는 크리먼인 걸 제외하면 평범한 사회인이었다. 그녀의 직업은 물리치료사로 B 지역에서 투룸 크기의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익숙하게 16층을 눌렀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순식간에 16층에 도착했다.
유건은 별다른 것 없는 상황에도 연신 오, 엄청 빠르다 등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치 놀이동산에 놀러 온 어린애 같았다.
“어서 와! 오는 길 많이 막혔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에밀리가 우리를 맞았다. 긴 웨이브 머리에 귀여운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1층 현관에서 벨을 눌렀으니 요리하다가 우리를 마중 나온 것 같았다. 미세하게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나는 유건을 바라봤다. 그는 내가 시킨 대로 말없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배고프겠다. 일단 들어가자.”
에밀리는 평소보다 상기된 얼굴로 우리의 등을 떠밀며 집으로 안내했다.
나는 먼저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었다. 손을 닦고 거울을 가까이에서 보니 눈에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만약 오늘 피를 섭취하지 않았으면, 내일이라도 센터에서 크리먼화가 진행됐을지도 몰랐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렇듯 백유건에게 비밀을 들킨 이후로 내 크리먼으로서 생활 패턴이 엉망이었다.
크리먼이 되고 나서 이제 어느 정도 몸 상태가 안정기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이딩 중에 갑자기 크리처화가 진행되지를 않나…. 이젠 흡혈하러 가는 것까지 감시받아야 하다니.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불편했다. 아무리 내가 습격받았대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막말로 다시 습격받으면 내가 죽이면 되는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곤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테이블 앞에 있어야 할 유건이 자리에 없었다.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응! 꾹 눌러!”
“너무 많이 나오는데? 원래 이래?”
“완전 잘 했어. 에스퍼라더니 힘이 좋긴 하네.”
대화 소리에 코너를 돌아 주방에 가보니 유건이 에밀리의 요리를 돕고 있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크리처 고기에서 피를 빼내는 일이었다. 착즙기에 피가 흥건한 고기를 집어넣고 압축기로 누르고 있었다.
“네가 먹을 거면 과일도 넣으면서 해.”
“이 중에 뭐 넣어야 해?”
“비린 맛 싫어하면 레몬? 라임? 과일 뭐 좋아해?”
“귤 종류 다 좋아해. 여기 있는 거 다 넣어도 돼?”
“그래그래. 처음에는 역할 수도 있으니까 많이 넣어.”
유건이 열대 과일 종류를 한 움큼 집어서 착즙기에 집어넣었다. 도중에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걸 에밀리가 날렵하게 잡아채자 잘했다는 듯 엄지를 척 내밀었다.
둘은 오늘 처음 본 사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친근하고 편안해 보였다.
‘말하는 걸 보니 설마 저걸 백유건이 마시겠단 건가? 아니, 그것보다 언제 에밀리와 말을 놓은 거지?’
내가 그들을 보며 점점 인상이 굳어지는 데 마침 유건이 나를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들켰다는 듯 입을 합 다물었다.
“사월아, 거의 다 했으니까 의자에 앉아 있어.”
나는 한 소리 하려다가 에밀리의 말에 눈을 흘기며 테이블로 돌아갔다. 유건은 여전히 주방에서 에밀리를 도왔다.
정말 유건이 입을 다물고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오자마자 저렇게 에밀리와 말을 놓다니.
내가 화장실을 있던 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둘 다 저렇게 친화력이 좋은 건지 놀라웠다.
곧이어 우리는 원형 테이블에 빙 둘러앉았다. 크리먼의 취향에 맞춰 살짝 구워진 고기와 크리처의 혈액이 담긴 잔이 함께 있었다. 정말 유건은 크리처 피를 마실 작정인지, 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듯 코를 들이밀었다.
“너 정말 그거 먹게?”
“응. 그렇게 비릿한 냄새는 안 나는데? 과일 넣어서 그런가?”
“괜히 허세 부리지 마. 네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하는 거 믿어 줄 테니까 오버하지 말라고.”
유건은 내 말을 무시하고 용감하게 잔을 입으로 기울였다. 용기는 가상했으나 표정은 썩 좋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