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31)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유건은 내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심 한결의 페어 요청을 거절하고 유건과 해서 찜찜했었는데 잘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최근에 내게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내가 유건과 페어를 한 이후에도 별다른 말은 없었으니까.

나는 그 침묵으로 그동안 묘하게 굴던 그의 행동을 모두 장난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어차피 유건과는 페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날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은 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에스퍼가 매칭률이 가장 높은 가이드와 페어를 하는 건 최고의 선택이니까.

나도, 한결도 각성자로서는 가장 좋은 선택을 한 거다.

유라 캡틴이 변덕이 심한 편이긴 하지만 선배가 차분하니까 잘 지낼 것 같았다. 나는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대화에서 빠지고 업무에 집중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유건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오늘은 조기 퇴근을 하려고 했는데, 이것저것 눈치를 보다가 정시에 퇴근하고 말았다. 한결은 퇴근 시간이 넘어서까지 유라와 회의 중이었다.

내가 인사하며 사무실을 나오자, 유건이 나를 뒤따라 나왔다. 기숙사는 센터 뒤편에 있는 공원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그 짧은 거리를 유건은 매번 데려다주려고 했다.

과잉보호라고 나무랐지만, 한결의 지시라며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출퇴근을 같이하고 있었다.

센터와 기숙사 사이에 있는 공원 입구는 한창 녹음이 우거져 짙은 냄새를 풍겼다. 상쾌한 풀 향이 멀어질 때면 드넓은 공터가 펼쳐졌다.

공터 정가운데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는데, 오늘은 물줄기 모양 그대로 얼어 있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진 안 저랬는데.’

아마 자연계 에스퍼 중 하나가 퇴근길에 장난으로 얼려 버린 것 같았다.

“한결 형, 유라 캡틴이랑 페어 할까?”

“글쎄.”

유건이 그 얼음 조각을 힐끗 바라보더니 허공에 주먹을 쥐었다. 뽀각, 소리와 함께 얼음이 순식간에 부서져 내렸다. 분수대는 다시 원래 모습을 찾아 우아하게 물줄기를 퍼트렸다.

‘나도 이왕 크리먼이 될 거였다면, 저렇게 뛰어난 살상 능력을 가졌다면 좋았을 텐데.’

내 능력은 스피드이기 때문에 공격보다 방어, 도망치기에 특화된 능력이었다. 숨어 다니기엔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오래 얘기하는 거 보니까 안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겠네.”

“너는 둘이 어떻게 할 것 같아?”

“나야 모르지.”

“아, 좀 대충 듣지 말고. 제대로 생각해 봐.”

내가 계속해서 심상하게 굴자 유건이 불러세웠다. 유건은 한결의 페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자기 형이니 당연한 건가.

나는 유건이 또다시 채근할 것 같아 관심이 없지만 그럴듯하게 말했다.

“웬만하면 하겠지. 요즘 파장량 보니까 30% 아래까지 떨어져서 버티기 힘들어 보이던데.”

“…그렇겠지?”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봐.”

“…….”

유건은 곧바로 침묵했다. 그러고 보니 둘은 언젠가부터 같이 다니지 않았다. 예전엔 유건이 한결을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는 형색이었지만, 꽤 사이좋게 붙어 다녔었는데.

“선배랑 싸웠어?”

“아니.”

“근데 왜 요새 같이 안 다녀?”

유건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속상하단 표정을 보아하니 뭔 일이 있긴 있나 보네.

“형한테서 독립할 거야. 센터에서 한결 형 동생이 아니라 내 입지를 다질 거라고.”

그런 표정을 하면서도 꽤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도 자립심을 가지려는 건 좋은 생각 같았다.

“그럼 유라 캡틴은 한결 형하고도 폐어만 하고 사귀진 않는 건가?”

“그러지 않을까?”

“너는 페어와 애인이 다른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또 그 얘기냐.”

나는 슬슬 이 주제가 지루했다. 그런데 문득 그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방향이 ‘한결의 페어’가 아니라 ‘페어와 애인이 다른 관계’에 초점이 맞춰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무실에서도 유라의 말을 듣곤 무척 놀라 했었으니까. 나는 내 생각을 말하려다, 멈칫하며 입을 다시 다물었다.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떠보는 건가?

“너 혹시 여자 친구 사귀고 싶어?”

“뭐?”

입 밖으로 꺼내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유건은 한창 젊은 나이이고, 각성자들의 외견이 아름다운 만큼 센터에 처음 들어오면 연애를 많이 했다.

“난 상관없어. 네 마음대로 해.”

“아니. 내가 다른 여자를 어떻게 만나.”

“왜 못 만나?”

“…하여튼 너는 어떠냐고. 페어와 남자 친구가 달라도 상관없어?”

유건은 순간 당황하더니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나 말고 다른 남자 사귈 수 있어?”

“이걸 대답해야 해?”

“응.”

나는 그의 질문이 황당하게 느껴졌다. 근데 유건의 표정이 퍽 진지해서 일단 대답을 하긴 했다.

“안 사귀어.”

“진짜?”

그가 밝게 상기됐다.

“어. 크리먼이 무슨 연애야. 이것저것 간섭하면 숨기기 골치 아파.”

“아…. 그렇지…. 네가 크리먼이지.”

이어진 내 말에 다시 축 늘어졌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걸 묻는 거지?’

이 녀석은 내가 크리먼인 걸 가끔 잊고 지내는 걸까. 나는 크리먼이 된 이후로 모든 결정을 내 비밀을 들키지 않는 걸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선택했다.

그런데 연애라니, 그런 듣기만 해도 간지러운 관계는 어느샌가 내 삶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근데 네가 크리먼이 아니면 상관없다는 거야?”

“그런 가정을 왜 하는데.”

“나중에 인간이 될 거니까.”

유건은 마치 내가 나중에 인간이 되는 것이 확정된 일이라는 것처럼 얘기했다. 나는 따져 묻기 귀찮아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

유건은 또 풀이 죽었다. 간혹 지금 유건처럼 페어를 한 에스퍼들은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은 가이딩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하는 에스퍼의 심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즘 유건이 내 주변의 에스퍼들을 적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그는 에스퍼가 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페어도 처음 해 보는 것이어서 더 서툴지도 몰랐다.

나는 말이 나온 김에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너 나랑 사귀고 싶어?”

“아니!”

그는 발작하듯 말했다.

“근데 왜 내가 애인 만드는 걸 단속하듯이 굴어?”

이런 녀석한테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나았다.

“가이딩이 좋은 거랑 인간에 대한 호감이랑 착각하지 마. 페어란 관계를 일반인 관점에서 사귄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나를 네 것처럼 생각하고 단속하는 거 불편해.”

“…….”

“그동안 별말 안 한 건 네가 각성자 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시간 지나면 너도 익숙해지겠지 싶어서 놔둔 거야.”

“이게 익숙해진다고?”

유건은 이렇게 말했는데도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전혀 공감을 못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가이드에 대한 집착을 고치지 못하는 에스퍼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 소유욕에 미쳐서 모두 자기 것이어야 하는 이기주의자들.

나는 유건이 혹시 그런 유형일까 봐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유건은 혼자 끙끙 앓더니 불현듯 포기한 거처럼 말했다.

“맞아. 네가 누굴 사귀든 무슨 상관이람…. 그래도 관심 있는 사람 생기면 얘기해. 되도록 에스퍼는 피하고….”

“뭘 얘기해. 네가 내 엄마야?”

그리고 마지막 경우는 이 녀석은 절대 해당이 안 됐다. 페어를 가이드로서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 사랑하는 경우였다.

“물면 큰일 나니까 에스퍼여야 하나….”

“선배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다며.”

“하, 미치겠네.”

이제 내 말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또 다른 자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

‘에스퍼 성장통 한번 지독하네.’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이리 와 봐.”

“왜?”

어느새 GS동 기숙사 앞에 당도했다. 나는 우뚝 멈춰서 주위를 둘러봤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나는 오전부터 하려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나 오늘 ‘식사’하러 가야 하는 날이야.”

나는 바깥에서 대놓고 말하기 불안해서 크리먼끼리 통용되는 은어를 사용해서 말했다. 유건이 내가 크리먼인 걸 아는 만큼, 눈치가 빠르다면 알아챌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배고프면 근처에서 밥 먹고 갈까?”

그러나 유건은 내 기대가 우습다는 듯이 곧바로 배반했다. 눈치껏 알아들을 거란 생각은 내 오산이었다.

애초에 크리먼이 아니라면 알아채기 힘들긴 하지만…. 이 녀석은 내가 크리먼이란 사실을 평소에 자각을 잘 안 하는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곤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더욱 주의 깊게 살폈다. 인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유건에게 바짝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흡혈하러 가는 날이라고.”

그랬다. 오늘은 흡혈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마지막 흡혈을 한 지 2주가 넘었다.

원래라면 저번 주에도 먹었어야 했지만, 유건과 매칭 테스트 때 피를 빨기도 했고, 유건이 협박용으로 가져온 크리처 고기에서 분리한 피로 대충 때워서 참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주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유건과 근래 들어 같이 다니는 일이 많았기에 그의 냄새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슬슬 그의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센터 외부로 나가야 하는데, 가이드 혼자서 못 나가잖아. 같이 나가고 네 스마트 워치 좀 빌려줘.”

정문에서 검문하니 유건과 나가고, 스마트 워치를 빌릴 생각이었다. 위치 추적 기능은 스마트 워치에 있으니 그렇게 하면 둘이 같은 공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디로 가는데. A17 구역? 거기는 에스퍼랑 같이 있어도 못 가.”

“거기로 안 가. 다른 곳으로 갈 거야.”

A17 구역은 그 습격 사건 이후로 가이드는 제한 구역이 됐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한동안 제한될 것이다.

그래서 B 지역에 머무는 에밀리 집에서 피를 섭취하기로 했다. 지금 에밀리는 집에서 내 몫의 크리처 혈액까지 포장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갈 건데.”

“알 거 없어.”

“어딘데. 또 그 친구랑 먹어?”

유건의 입에서 그 친구란 말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에밀리에게 그날 상황을 물었었을 때, 분명 유건과는 마주치지 않았다고 말했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뒷모습 봤어. 너 도망가고 문 열어 보니까 머리 긴 애 뛰어가더라.”

“…….”

“걔도 크리먼이야?”

“아니.”

“솔직히 말해. 신고 안 해.”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일단 모른 척을 했는데 유건이 에밀리의 모습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에밀리를 신고할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크리먼이란 사실은 제삼자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목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했다.

“됐고, 가기 싫으면 시계라도 빌려줘. 내가 알아서 둘러대고 나갈게.”

“가기 싫은 게 아니라.”

“그럼 뭐.”

“혼자서 위험해. 습격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나도 같이 가.”

“피를 마시러 가는 데 따라오겠다고?”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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