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31)

“근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건데.”

“사월이가 크리먼한테 습격당하고 잠적했던 날, 너한테 사월이 소식 전해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

그날 유건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뒤늦게 지원하러 온 알파 팀에게 상황을 그럴듯하게 거짓으로 꾸며냈다.

하지만 다음 날 사월이 말없이 무단결근해서 유건은 2차로 당황했고 한결 또한 차분한 척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회의 시간에 어딘지 멍해 보인다던가,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온다던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듯한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실수들.

유건은 그 모습을 보고 한결에게 사월이 저에게 따로 몸이 안 좋아서 쉰다고 전했다고 말했다.

“그날 수상했던 점이 한둘이 아니야. 근데 너랑 사월이가 숨기려고 하니까 더 파고들지 않는 거, 알지?”

S급 가이드가 습격받았으니 긴급대책 회의를 열었지만, 진행 상황은 더뎠다. 묘하게 제자리를 맴도는 흐름이었다.

누군가 주도적으로 이끌지 않았고, 초점은 사월의 사건보다 이전에 사건을 재조명하는 식으로 흘러갔다. 그건 한결이 상황을 그렇게 만든 거였다.

“근데 둘이 한동안 말도 안 섞더니, 갑자기 페어라니. 그럼 내가 무슨 생각을 할까, 유건아.”

한결이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지만, 어딘가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왠지 모를 서늘한 감각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유건은 한결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모른 척해 준 건 고마운데, 그럴 거면 끝까지 모른 척해 줘.”

유건은 속이 답답해졌다. 사월만으로도 자신의 평화로운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련을 맞닥뜨린 기분인데, 한결까지 이렇게 몰아세우니 스트레스를 받았다.

“형이 보기엔 걔랑 내가 철부지처럼 보일 수 있어도, 우리 어린애 아니야.”

유건은 아직도 크리먼인 사월과 자신이 페어를 맺은 것이 옳은 선택인지 판단이 서진 않았지만, 일단 우기듯이 말했다. 현실은… 계속 신경 쓰이게 하는 사월을 잃을 수 없어서 당장에 겪을 혼란을 보류한 것이다.

“형이 걱정할 만한 일 없다고.”

그렇다고 아예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유건의 계획대로 항생제가 개발되고 사월이 인간이 된다면, 그것은 한결과 유건 모두에게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했다.

그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내린 결론이었다. 다만 찔리는 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위험 요소에 대해선 눈을 감고 모른 척하는 중이란 거였다.

“그래. 너희 어린애 아니지. 그래서 더 불안한 거야. 너희 둘이 있는 게 더 이상 소꿉장난처럼 안 보여. 몰래 비밀을 만든 게 불쾌하게 느껴진다고.”

“불쾌하다고?”

“그래.”

“…형. 구사월 진짜 좋아해?”

한결은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은 그 어떤 대답보다 큰 확신을 주었다.

“미안하다, 유건아.”

한결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한결이 불안해하는 모습이 생소했다. 그는 유건에게 항상 친구 같은 어른이었다. 바로 옆에서 친근하게 굴다가도 항상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감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백한결은 구사월을 좋아한다. 진심으로. 유건은 한결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확인하게 되자 꽤 큰 충격을 받았다.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만날게. 만약에 스킨십을 하더라도 사월이가 파장 제어할 거고.”

페어는 서로의 유대감에 따라 매칭률이 오르내리기 때문에 페어가 있는 각성자에게 과하게 호감을 보이는 것은 비매너 행동이었다.

하지만 페어의 허락 없이 가이딩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있지만, 그 외에는 마땅히 정해진 게 없었다.

사월은 숙련자이니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사고 같은 가이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3단계는 장담 못 해. 나는 요구하지 않을 테지만, 사월이가 원하면 나도 거절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2단계까지 얘기였다. 3단계, 즉 잠자리에서까지 가이드의 파장 제어가 가능하다고는 유건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또한 같은 에스퍼의 파장은 서로에게 예민하게 반응해서 한결이 사월을 만진다면 유건 또한 알아챌 수 있었다.

만약 사월이 한결과 입을 맞추고, 그다음 유건과도 입을 맞춘다면 유건이 사월과 한결이 입을 맞춘 걸 알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건 네가 페어니까 알아서 논의해. 나와 페어 하지 않고 너와 할 정도면 그 정도는 설득할 수 있겠지.”

“형 진짜 제정신이야? 그만둬. 나 진짜 형한테 화날 것 같아.”

유건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단 것처럼 말했다.

“서로의 영역만 지킨다면 충분히 가능한 관계라고 생각해.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거고 난 물러설 생각 없어.”

한결이 사월을 만난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여기 오기 전,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자신 없어? 하긴, 우리끼리 이렇게 얘기해 봐야 뭐 해. 이런 관계에선 가이드가 결정권이 있는 건데.”

유건은 가드 없이 맞았던 곳을 계속해서 가격당하는 기분이었다. 뒤통수가 얼얼하고 목 끝까지 열이 차올랐다.

선택은 사월에게 달렸다고 말하는 한결의 표정은 유건과 상반됐다.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반대로 유건의 안색은 점점 흙빛으로 변해 갔다.

한결이 유건의 기숙사로 찾아오던 날, 그는 혹시 사월을 협박했냐고 물었었다. 가깝게 지내던 한결 말고 유건을 선택한 이유에 무언가 있을 거라고, 그는 예전부터 의심해 왔다.

하지만 유건은 아니라고 말했고, 은근히 한결에게 우위에 선 것처럼 말했다. 내 가이드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고, 지금도 나중에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니 사월에게 다가오는 걸 그만두라고.

표정을 보니 한결은 그동안 유건을 봐줬을 뿐, 유건이 허세를 부리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유건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월의 약점을 잡았으니까 한결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한다면 사월이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결이 대놓고 사월에게 감정표현을 한다면 사월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순간 사월과 나눴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그럼 선배랑도 난 이제 가이딩 못해?”

“당연하지.”

“…….”

“왜. 하고 싶어?”

“어.”

사월은 한결과 가이딩을 하고 싶어 했다. 그 모습은 어쩌면 유건 몰래 둘이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했다.

사월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유건의 자신감은 갑자기 저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다 갑자기 소름 끼치는 예감이 들었다. 만약 한결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이드로서 사월까지 탐낸다면….

“하나뿐인 동생의 목숨 줄 같은 가이드인데, 나도 너한테 가이드는 뺏고 싶지 않아.”

한결은 유건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그는 역시나 유건이 반대할 경우 가이드로서의 사월까지 뺏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감정이 주체가 안 됐다. 그에 따라 파장이 흉포하게 날뛰었다.

“유건아. 생각 잘해. 난 네가 사월이한테 연애 감정만 없다면, 내가 폭주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영역 지킬 생각이야.”

유건에게 사월을 연애 상대와 가이드로 나누자고 제안한 건 한결의 배려였다. 그는 이미 사월이 어떤 선택을 할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건 또한 깨달았다. 만약 사월이 원해서 한결과 3단계까지 가게 된다면 아마도 막을 수 없을 거라는 걸.

“그래. 형 말대로 해.”

유건은 인정해야 했다. 한결이 이렇게 나온다면 애초에 유건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유건과 사월이 이성으로서 감정이 있다면 해결될 문제이지만, 사월은 크리먼이었다. 때문에 유건이 사월에게 연애 감정을 갖는 건 금기 사항이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건의 대답에 한결이 빙긋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남자가 봐도 근사한 미소였다.

자신에게 없는 진중함과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 그를 보면 언제나 자랑스럽고 든든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한결 앞에서 자신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 품에 사월을 완전히 뺏긴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화가 났다.

이건 같은 에스퍼로서 질투일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 한결과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을테니까. 자신보다 더 강한 에스퍼에게 제 가이드를 뺏기고 싶지 않은 본능일 뿐이길 바랐다.

유건은 절박해졌다. 전부 다 빼앗길 순 없다. 일부라도 좋으니 어떻게서든 가져야 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 기분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형에게서.

“근데 그 말 꼭 지켜. 구사월 이성적으로 안 볼 테니까, 형도 구사월 가이딩 절대 넘보지 마.”

“그래.”

유건의 분노를 담은 파장이 사방에 날카롭게 퍼져나갔다. 그들이 격 없이 공유하던 공간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한발이라도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칼로 베어 버릴 듯한 서늘한 공기가 그들 사이를 에워쌌다.

***

나는 월요일 아침부터 유건과 가이딩을 했다. 주말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 파장량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주말에 뭐 했는데.”

“잤어.”

“잠만 잤는데 이렇게 떨어진다고?”

“악몽이라도 꿨나 보지.”

계속되는 추궁에도 저렇게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겨우겨우 안정기에 들어서게 한 건데, 고작 이틀 만에 다시 불안정기로 만들어 놓다니.’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가이딩을 제법 세게 집어넣었다.

“아야. 살살 해.”

가이딩을 대충 끝내고, 나는 캡슐에서 크리스털을 충전했다. 어차피 한 번에 끌어 올리지는 못할 수치였다. 요즘은 유건이 훈련소에서 훈련 중일 땐 옆에 있지 않아도 돼서, 시간이 나면 캡슐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제 일상이었다.

그리고 곧 녀석이 훈련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유건은 가이딩이 끝났는데도 나갈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 오늘 훈련 안 해?”

“어제 했어.”

“오전에 매일 하잖아.”

“매일 하니까 오늘은 안 해도 되지.”

“옆에 있을 거면 가만히 좀 있어. 정신 사납게.”

있을 거면 가만히 좀 있든가, 유건은 어느새 내가 충전해 놓은 가이딩 크리스털 3개를 염력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을 쳤다.

저러다 깨부수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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