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가 뭐냐.”
“이유가 뭐가 있어요. 제 스타일 아니에요.”
“네가 언제부터 스타일 따지고 여자를 만났다고.”
“…….”
지상이 반박하자 유건이 멈칫 입을 다물었다. 과묵한 한결과 달리, 유건은 지상에게 애교 있는 아들이었다. 자주 대화를 나누고 언제나 제게 곰살맞게 구는 편이었다. 지상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엄한 체하며 말했다.
“솔직히 사월이 정도면 너한테 과분하다. 잔소리 말고 페어 한 김에 네가 결혼해.”
“아니, 아버지. 사월이도 저 싫어해요. 나 혼자 결혼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건 사실이었다. 사월은 유건을 싫어한다.
그리고 그녀는 크리먼이다. 백씨 가문에게 크리처는 물리쳐야 할 대상이고,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절대 악이었다.
유건은 에스퍼가 아닐 때에도 지상에게 크리먼은 크리처와 다름없다고 가르침 받아왔다. 이 극단적인 사상은 선대 백씨 가문 에스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크리처에겐 어떠한 용납도 배려도 없었다.
때문에 사월에게 감정이 생기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단속하고 있지만, 크리먼이 아니더라도 사월과 엮일 일은 없었다.
페어 요청이긴 했지만, 이미 유건은 사월이에게 여러 번 차였었으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럼 네가 보기엔 사월이가 한결이한테 마음이 있던?”
“…저보단 좋긴 하겠죠.”
자존심이 상해서 소극적으로 말했지만, 사월이 유건보다 한결을 좋아하는 건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사월이 유건에게 크리먼인 걸 들키지 않았다면, 유건은 사월과 말도 제대로 섞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건과 결혼이라니. 당사자인 사월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였다.
“하긴…. 나 같아도 너보단 한결이가 더 믿음직할 것 같구나.”
“아빠. 내가 더 귀엽다고 했잖아요. 나한테 왜 그래?”
“네가 귀엽긴 하지. 하지만 남자로서 매력은 글쎄.”
“나도 밖에서 인기 많아요! 자꾸 형 그늘에 가려지는데 형보다 페어 요청도 많이 받았다고!”
“그래, 그래. 한결이보다 네가 키는 3cm 작지만, 가이드들한테는 인기가 더 좋은가 보구나.”
“아니, 진짜!”
지상이 장난스레 대꾸하자 유건은 씩씩거리며 반문했다. 심각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누그러들어 지상은 막내아들을 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건이 각성하고 나서부터 지상은 자신이 상사이니 센터에선 격식을 차리려는 것 같았지만, 유건은 쉽지 않았다. 조금만 놀려도 이렇게 방방 날뛰는 게 아직도 어린 티가 났다.
“어쨌든 그렇게 가이드들한테 인기가 좋으면 사월이한테 어떻게든 어필을 해 보란 말이야. 나는 네가 사월이와 페어도 결혼도 했으면 좋겠구나.”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저도 사월이한테 S급 각성자 낳으라고 압박하는 건 싫어요.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우리 집 그 꼰대 문화 싫다고.”
유건 역시 한결처럼 집안에서 등급 높은 가이드와 결혼하라는 말이 싫었다. 그 압박은 유건이 일반인이었을 때는 자유로웠지만, 이제는 그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알았다. 센터장님도 예전 같지 않으셔. 네가 사월이만 잘 구슬려 본다면 아빠가 그건 막아 주마.”
유건은 심란했다. 여기서 절대 싫다고 안 된다고 말한다면 눈치 빠른 지상이 뭔가 있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사월이 크리먼이어서 안 된다고 말하면 바로 납득할 테지만 그 말은 절대 해선 안 됐다.
“…예.”
그래서 결국 알았다고 말하곤 집무실에서 나왔다. 지상은 유건의 대답을 듣자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
유건이 2층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3인용 소파에 한결이 앉아 있었다. 어릴 때는 그 자리에서 같이 대형 스크린으로 스틱 게임을 하며 밤을 새우곤 했다.
크고 나서는 그렇게 열 올리면서 하진 않지만. 마지막으로 같이 게임을 한 것이 언제더라. 아마 작년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데도 왠지 까마득히 옛날처럼 느껴졌다. 유건은 한결의 옆에 앉지 않고 소파 앞 테이블에 걸쳐 앉았다. 삐딱한 표정과 자세는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왜 오늘 먼저 갔어?”
한결이 먼저 유건에게 물었다.
“문자 보냈잖아. 밖에 있다가 따로 간다고.”
“5시 58분.”
유건은 몸을 움칠 떨었다.
“너 오토바이 타고 기숙사에서 출발하는 거 로비에서 보이던데.”
“…….”
한결은 유건의 출발 시각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평소보다 일찍 출발한 건데 왜 한결은 그 시간에 기숙사 로비에 있었을까.
유건은 별 시답잖은 일로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그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결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유건아. 요새 나 피하니?”
“동선이 겹치지 않았을 뿐이야.”
“게이트에도 내가 있으면 빠진다던데.”
“…한 게이트에 S급이 둘 있는 건 비효율적이니까.”
“그런 거 신경 안 썼었잖아?”
한결의 말이 맞았다. 유건은 그동안 비효율적이란 걸 알면서도 한결을 따라다녔다. 유건은 염력을 사용하는 장거리 딜러고 한결은 근접 딜러인 육체계 에스퍼이지만, 근접전은 에스퍼에게 필수라서 배울 점이 많았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유건은 한결과 게이트에서 같이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재밌고 신나는 일이었다.
구사월과 페어를 하기 전까지는.
“나도 이제 어느 정도 센터에 적응돼서 신경 좀 써 보려고.”
적어도 3개월은 옆에 따라붙으면서 배울 생각이었지만 유건은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보단 못하지만 스스로 훈련하는 방법을 택할 생각이었다.
사월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은 유건이 한결과 이전처럼 친하게 지낸다면, 자연히 사월과 한결이 마주치는 일이 많아질까 봐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한결은 그런 유건을 보고 느긋하게 웃었다. 그 여유로움은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나 말해. 형 진짜 사월이랑 만날 생각이야?”
“사월이만 좋다고 하면.”
“내가 내 가이드한테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 그리고 난 그때 분명 대답은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랬다. 그 대화를 했던 날, 한결은 대답 없이 유건의 집을 나갔다. 한결에게 느껴졌던 파장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사월이랑 페어 할 때 말리지 않았잖아. 나는 그래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어.”
“사월이가 너와 페어 하는 건 정말 상관없으니까.”
“정말 사월이를 나눠 가지겠단 소리야?”
“나눠 가지겠단 표현은 좀 그런데.”
사월이 물건도 아니고 사람을 두고 할 소린 아니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를 배려하며 말하기엔 유건은 정신이 없었다.
가끔 뇌를 거치지 않고 거칠게 튀어나오는 유건의 말본새를 한결은 종종 지적하곤 했는데, 그는 역시나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근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네.”
유건을 질책할 거란 생각과 달리 한결은 순순히 인정했다. 유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한결이 피식 웃곤 말을 이었다.
“네가 경고한 대로 사월이랑 가이딩 할 생각은 없어. 너도 사월이랑 가이딩 하는 거 말고는 관심 없잖아.”
이전에 한결과 사월에 관해 대화했을 때 말한 적 있었다. 사월이와는 만약 페어를 하게 돼도 친해질 수 없을 것이고 연인관계는 저도 싫다고.
에스퍼와 가이드가 페어를 하게 되면 과장해서 80% 정도는 사귀곤 했으니, 충분히 미래를 생각해 봄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유건은 매일 사월에게 싸늘한 말로 페어 요청을 거절 당하던 입장이라,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사월이를 연애 감정으로 만나든 말든 상관없는 거 아니야?”
“어떻게 없어? 둘이 뭘 할 줄 알고. 접촉하면 파장 흘러갈 텐데.”
“나는 어쩔 수 없지만 사월이가 그 정도 파장 제어를 못 할 가이드는 아니란 거 알잖아.”
가이드는 에스퍼와 깊게 접촉하면 자연스럽게 파장이 퍼지지만, 의식적으로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월은 오랜 센터 생활로 파장을 다루는 데 숙련자였다. 그녀가 실수할 일은 0%에 가까웠다. 저도 모르게 가이딩이 되는 상황은 없을 거란 말이었다.
“그래도 안 돼. 사람 일은 모르지. 지금은 몰라도 내가 나중에 구사월한테 마음이 없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바로 저번 주까지 별생각 없다고 말했는데 부침개 뒤집듯 말을 바꾸면 의심을 살 것 같아서 유건은 충분히 여지를 두며 말했다.
이대로 뒀다가는 한결이 큰 사고를 칠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한결과 사월이 가까워지는 걸 막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분명 형도 사월이 이성적으로 본다고 안 했잖아.”
“그랬지.”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냐고.”
한결의 표정이 순간 서늘해졌다.
“사월이는 나랑 엮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
한결이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유건은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은 그의 친모를 사월과 겹쳐보고 있었다.
“너랑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가 사월이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물러난 것도 있어. 둘 다 서로 감정 없으니까 내가 우려하는 일은 안 생길 줄 알았고.”
“무슨 우려?”
“네가 사월이 여자로 보는 거.”
“그건 아직도….”
“네 입으로 말했잖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만약 유건이 사월과 결혼을 해도 백씨 가문과 엮이게 된다. 한결은 사월이 백씨 가문과 엮이는 거 자체가 싫은 것 같았다.
“방금 아버지랑 얘기했는데, 만약 내가 사월이랑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런 강압에 관한 건 막아 주신다고 하셨어.”
“넌 아버지를 믿어?”
한결은 이미 과거에서 답습했다. 친모가 미쳐 가고 있을 때 지상은 그녀를 방치했다. 지상은 자신이 변했다고 말했지만 한결은 아직 그를 믿고 있지 않았다.
“유건아. 난 원래 너한테 주는 건 그게 뭐든 별로 아깝지 않았어. 네가 사월이와 페어를 하고 만약 연애까지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
처음 유건이 사월과 페어를 해도 되냐고 한결에게 물었을 때 한결은 1초의 주저함 없이 그러라고 말했다.
나중에 사월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유건도 한결이 사월과 각별하단 걸 알고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이다.
정말 괜찮다고 말해서 그 당시에는 진짜 마음이 없는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 또한 한결이 유건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이렇듯 옛날부터 알게 모르게 한결은 유건에게 양보하는 것이 많았고 유건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한결은 지금까지 자신이 양보해 온 것들에 대해 한 번도 불만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더 못 줘서 안달이 난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둘이 대립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