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확실히 사월이가 페어를 한 이후로 유건이 파장이 처음으로 안정기에 들어섰어요. 어찌 됐건 사월이가 둘 중 하나와 페어를 맺은 건 축하할 일이 맞아.”
지상은 사월에 대한 보고서를 주기적으로 받았다. 사월은 국내 세 명밖에 없는 S급 가이드 중 하나이자, 유일하게 센터에서 복무하고 있는 가이드이다. 나머지 둘은 질병 퇴직으로 일찌감치 센터를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등급뿐 아니라 여러 면모에서 뛰어났다.
그동안 그녀와 가이딩을 진행한 에스퍼 중 폭주를 한 에스퍼는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며, 파장 관리뿐 아니라 건강관리까지 가이드로서 탁월한 실력을 입증했다.
지상은 사월이 둘 중 누구와 페어를 맺든 상관없었다. S급 가이드인 사월이 탐이 났던 것이기 때문에, 백씨 집안 에스퍼와 페어를 맺은 것 자체만으로도 흡족했다.
어딘가 지지부진 끌고 있는 한결이 불안했는데, 다른 에스퍼에게 뺏기지 않고 유건과 페어를 맺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던 참이었다.
“그래도요…. 나는 사월이를 한결이 짝으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한결이가 지금까지 선 자리 거절하던 것도 그렇고, 아직 사월이가 어려서 기다려 주나 보다 싶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들이 이어지지 않은 걸 가장 속상해하는 건 우습게도 유건의 친어머니 수련이었다.
“한결아. 너는 정말 사월이한테 생각 없는 거니?”
수련이 보기에 한결은 사월에게 관심이 있었다. 한결이 가족 외에 곁을 잘 주지 않는 아이인데, 십여 년간 인연을 지속해 온 것만 봐도 뻔했다.
“없어요.”
그런데도 한결은 무슨 꿍꿍이인지 제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답답할 따름이었다. 주변에서 이렇게 부추겨도 당사자는 이렇게 냉하게 구니, 더 이상 억지로 엮어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수련이 아쉽지만 이제 더는 묻지 않으려고 할 때, 한결이 말을 덧붙였다.
“페어를 하고 싶냐고 묻는 거라면요.”
“그게 무슨 소리니?”
“가이드로서 사월이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연애 상대로는 생각이 있다는 얘기예요.”
한결은 스튜를 먹다가 물로 입가심하며 말했다. 모두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하고서는 여유로운 태도였다.
“형.”
유건이 한결을 불렀다. 이곳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한결에게 말을 붙이는 거였다.
한결이 시선을 건네자 유건이 그만 말하라는 듯이 잘게 고개를 흔들었고, 한결은 무감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너, 너 언제부터? 아니, 사월이랑 결혼 생각 없다면서?”
수련이 놀라 하며 물었다.
“집안에서 사월이가 가이드로 발현하고 나서 말씀하신 거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잘됐지. 등급도 딱 맞고 매칭률도 그리 나쁘지 않다며.”
어른들 입장에선 당연했다. 에스퍼가 일반인과 결혼하는 건 메리트가 없으니까 사월이 일반인일 땐 아무리 둘이 가깝게 지내도 엮지 않았다.
지상 또한 수련과 재혼을 결심했을 때, 한결의 할아버지인 센터장과 척을 질 뻔했다. 지상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한창 힘을 키운 지상을 이겨낼 수 없어서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재혼이었다.
하지만 한결이 사월에게 마음이 있는 거라면, 이제 가이드가 된 사월을 밀어낼 이유가 없었다.
“저는 유건이랑 달리 사월이보다 매칭률 높은 가이드는 많아요.”
그런데 가이드로서 사월을 원하지 않는다니. 사월은 가이드로서 결격 사유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뛰어났다.
“네 말을 잘 이해를 못 하겠구나.”
지상은 점점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가이드인 사월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 같은데. 그럼 페어를 하지 않고 연애만 하겠다는 소리냐.”
“연애만 한다는 소린 아니에요. 만약 결혼하게 돼도 사월이한테 ‘가이드로서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결혼한 에스퍼의 가이드로서의 짐. 한결은 자기 친어머니의 말로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이는 낳지 않을 생각입니다.”
지상은 한결의 말을 듣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모두가 놀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지상은 그렇지 않았다. 다만 착잡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유건이 페어 상대로 사월이 아니면 페어는 의미 없어요. 저도 사월이가 유건이랑 페어 해도 상관없고요. 연애만 저랑 하면 돼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형제끼리 한 가이드를 두고….”
지상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험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말을 줄였다. 숨을 가다듬고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월이도 합의가 된 거냐.”
“아니요. 제 생각을 물으셔서 일단 말씀드린 거예요. 사월이 마음에 들도록 이제 노력해 봐야죠.”
테이블의 공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유건은 이제 대놓고 한결을 노려봤다. 지상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눌렀으며, 수련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평온한 표정을 하는 건 한결뿐이었다.
“그럼 사월이가 페어는 유건이랑 하고 결혼은 한결이랑 한다는 얘기예요?”
뒤늦게 수련이 이해를 마쳤는지 재차 물었다. 휘둥그레 뜬 눈은 제발 자신의 추측이 틀렸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정말 그래? 여보, 지금 제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죠?”
“후…. 그래요. 아직 사월이도 동의한 건 아니라고 하니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식사합시다. 한결이 너는 식사 마치고 내 집무실로 잠깐 들르거라.”
“예.”
***
유건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대체 한결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아직도 제대로 이해가 안 됐다.
분명 저에게는 사월과 페어를 할 생각도 없고, 연애 감정도 없다고 말했었는데. 대체 왜 갑자기 말을 바꾼 거지? 자신에게 그동안 거짓말을 한 걸까.
물론 최근에 둘이 서로에게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긴 했다. 하지만 그저 추측만 하는 것과 한결의 입에서 직접 듣는 건 다가오는 무게가 달랐다.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한결이 이제 숨기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달칵.
유건이 지상의 집무실 앞을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는데 한결이 지상과 대화를 마치고 나왔다. 어찌나 방음을 잘해 놓았는지 청각이 좋은 에스퍼 유건에게도 둘의 대화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들어가. 안 그래도 너 불러오라시던데.”
“형.”
한결은 그 말만 마치고 지나치려는데 유건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생각인 거야?”
“일단 아버지랑 대화하고 그다음에. 네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한결은 유건이 불러 세울 줄 알았다는 것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반복적인 업무를 처리하듯 무감정해 보였다.
유건은 당장 마음이 급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지상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지상은 책상 앞에 앉아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미간에 깊게 골이 팬 것이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한결이 말론 너도 이 상황을 모르고 사월이한테 페어를 요청했다던데.”
“…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 유건은 한결이 사월이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 전에 알았다. 사월과 페어를 맺은 것이 한결에게서 그녀를 떨어뜨리려는 의도도 있었으니까.
“한결이 생각이 저렇대도 아직 사월이랑 진전된 건 없는 게 다행이지. 사월이도 너한테 마음이 있으니까 페어를 하려는 것 아니냐. 페어까지 했는데 네가 사월이를 놓칠 리도 없….”
“아버지. 저는 사월이랑 그런 관계 아니에요.”
유건은 지상의 말을 끊어내며 말했다. 막내아들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런 관계라니.”
“저도 형이 사월이한테 마음 있는 거 반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제가 사월이랑 연애 감정으로 페어를 한 건 아닙니다. 사월이랑 연애할 생각은 없어요.”
“…….”
지상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우려하던 문제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백씨 가문에 이런 개 족보는 안 된다.”
그는 결국 폭발하며 말했다.
“아무리 요즘 젊은이 중에 페어 따로, 결혼 따로 생각하는 부류가 있다지만, 너희는 상황이 달라.”
백씨 가문은 대대로 에스퍼로서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아무리 지상이 젊을 때보다 유해졌다고는 하나, 에스퍼 형제가 한 가이드를 두고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맺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형제 둘 모두 에스퍼인 확률이 적은 걸 차치하더라도 사월은 S급 가이드이다.
그런 사월을 어떻게든 한결 또는 유건과 엮이게 만들어야 한다. 그 이유는 식사 자리에서 한결이 사월에게 ‘가이드로서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연관이 있었다.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 사이에서는 S급 각성자가 태어날 확률이 높은데, 그런 사월이를 두고 둘 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백씨 집안에서 ‘가이드로서의 짐’은 S급 각성자를 낳는 일이었다. 가족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그들의 자식이 태어나면, S급 각성자를 기대했다. 모든 국민이 백씨 가문에 S급 각성자를 바라고 있었다.
지상의 첫 번째 아내인 한결의 친모 또한 S급 가이드였고 그들은 정략결혼을 했다. 하지만 한결은 안타깝게도 일반인으로 태어났고, 친모는 집안의 압박과 S급 각성자를 못 낳았다는 죄책감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후로 계속 유산을 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결국 한결을 크리처에게 물리게 해서 크리먼으로 만들려는 악수를 두었다.
핵이 있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크리먼의 능력치는 에스퍼와 같으니, 그렇게 집안에 한결이 크리먼인 걸 숨길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크리처는 한결이 아닌 친모를 물었고, 친모는 크리처의 독을 이겨 내지 못하고 크리처화가 진행됐다.
그녀는 이성을 잃고 한결을 공격했고 한결의 목엔 아직도 그때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한결에게 그 사건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렇기에 유건은 한결이 왜 사월이에게 그런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은지 충분히 이해했다.
한결이 뒤늦게 S급으로 각성하긴 했지만,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가 애를 낳는다고 반드시 S급 각성자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또다시 과거의 비극이 반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결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고, 이는 사월에게 조금의 짐도 안겨 주기 싫다는 뜻이었다.
“유건아. 다시 생각해 볼 순 없니? 사월이가 여자로서는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애가 예쁘고 착해 보이던데.”
유건은 지상의 말을 듣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예쁜 건 자신도 공감하지만 누가 봐도 사월이 착해 보이는 인상은 아닐 텐데.
어른들한테 깍듯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싹싹한 성격은 아니었다.
“아니요. 구사월을 여자로 볼 일은 전혀 없어요. 안 돼요.”
유건은 필요 이상으로 부정적인 의사를 보였다. 유순한 성격인 유건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지상은 점점 미심쩍었다.
왠지 어감이 이상했다. 싫다도 아니고 안 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