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수아는 그렇게 걸리진 않았다. 뭐라고 하든 미안하게 됐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뒤에서 욕을 하더라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결은…. 생각만 해도 속이 얹힌 것처럼 더부룩해졌다. 만약 한결이 장난으로 페어를 하자고 한 게 아니라면, 속으로 얼마나 어이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고 유건의 제안을 거절할 순 없었다. 지금 내 상황은 그와 페어 하는 조건으로 그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한결에게 내가 크리먼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았다. 그러니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가자.’
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 준비를 했다. 준비하는 내내 한결이 무슨 말을 할지 상상하며, 대답할 말도 연습했다.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되긴 뭐가 그렇게 돼.
“백유건이랑 저랑 매칭률이 높아서요.”
이건 그동안 밀어내던 게 설명이 안 된다.
“그동안 아등바등해 온 모습이 불쌍해서요.”
차라리 이게 그나마 납득할 만하지 않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막 말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
나는 1층 사내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고 곧장 사무실로 올라갔다. 잠시 자리에 들러 짐만 놓고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가이딩 대기실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한결과 마주치는 건 불가피한 일이지만, 웬만하면 오늘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서자, 가장 안쪽 자리에 사람이 보였다.
몸집이 커서 가려지지도 않는다. 한결이었다.
“안녕하세요.”
“…….”
나는 자리에 들어서며 한결에게 인사했다. 한결의 자리 바로 앞이기 때문에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한결은 답이 없었다.
‘먼저 페어 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공기가 답답해졌다. 사람이라도 많으면 묻어갈 텐데. 괜히 텀블러를 만지작거리다 컴퓨터를 켜고 애먼 센터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구사월 가이드.”
“네.”
한결이 나를 불렀다. 나는 차분한 척 대답하며 그의 자리로 걸어갔다. 한결은 내가 오자, 종이 하나를 건넸다.
“백유건 에스퍼랑 페어 한다면서요?”
페어 요청서 양식이었다.
“…네.”
“페어 요청서는 수기로 써요. 처음 해 보니까 설명해 줄게요.”
“네.”
“일단 개인정보를 간략하게 작성하고, 그동안의 가이딩 이력을 살펴봐야 해요.”
한결의 태도는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그는 센터에서 업무를 지시할 때는 친절하되 선을 지켰고,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계속해서 한결의 표정을 살폈다.
근데 지금 사무실에 우리밖에 없는데 왜 존댓말을 하지?
“복용 중인 약은 없죠?”
“네.”
“그럼 이렇게만 쓰고 진단원 가서 매칭률 테스트하면 됩니다. 테스트 완료 후 저한테 결재받으러 오세요.”
“알겠습니다.”
한결은 나에게 종이를 건네고 곧바로 눈길을 거뒀다. 모니터 창에 문서를 띄우더니 업무를 시작하려 했다.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꽤 오랜 시간 서 있었으니 왜 가지 않느냐고 물어볼 법한데도 투명 인간 취급이었다.
“저….”
내가 결국 눈치를 보며 먼저 입을 뗐다. 한결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왜 사유 안 물어봐요?”
“그건 내가 설명해 줬을 텐데.”
페어 요청서에 사유란이 있었다. 한결 말대로 그는 조금 전에 예시까지 들어주면서 보통 ‘매칭률이 이 정도 나와서 가이딩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한다’라고 쓴다고 설명해 줬다.
하지만 이런 서류상 필요한 사유 말고, 진짜 이유 말이다. 한결이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의미로 궁금할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물론 이 상황에서 내가 이 말을 묻는 건 내 무덤을 파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나가면 찝찝할 것 같아서.
그리고 그가 어제 캡슐에서 했던 행동들이 마음에 걸렸다. 진짜 내가 누구랑 페어를 하든 관심이 없는 거라면, 이번엔 내 입장에서 황당할 것 같았다.
‘어제 했던 말이 그저 장난이었단 거잖아.’
나는 한결의 페어 요청을 거절하면서 내내 마음이 쓰였고, 어제 있었던 간지러운 행동들에 대해 고민했었는데.
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한결도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화난 표정도 아니었다.
“…….”
“…….”
얼마간 우리는 눈싸움하듯 눈빛을 교환했다. 이윽고 내 얼굴에 서운함이 서리려고 할 때였다.
“…그.”
“안녕하세요.”
한결이 무언가 말하려는데 밝은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그 사람은 넓은 보폭으로 순식간에 우리 앞에 섰다.
“어? 다들 빨리 왔네?”
백유건이었다. 한결은 유건의 등장에 입술을 달싹이다 다른 주제로 돌렸다.
“백유건 에스퍼. 구사월 가이드한테 페어 요청서 설명해 줬으니까 듣고 오전까지 결재받으세요.”
“알겠습니다.”
유건이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여전히 한결의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늦지 말라며.”
“왜 이렇게 말을 잘 들어? 이럴 거면 진작 페어 할걸 그랬다. 그렇지?”
유건이 싱숭생숭한 내 마음도 모르고 실실 웃고 있었다. 나는 눈을 흘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작성하자.”
“왜?”
“답답해.”
굼뜨게 행동하는 유건을 끌고선 회의실로 이동했다. 알파 팀 사무실에서 가장 먼 곳으로.
***
“백유건. 우리 페어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돼?”
“뭐?”
유건이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사실 어제 너랑 얘기하기 전에 선배가 페어 요청했었어.”
“근데.”
“미안하다고 했지. 내가 어떻게 페어를 해.”
“…….”
유건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봤다.
“근데 선배가 그럼 다른 사람이랑도 페어 하지 말라고 그래서….”
“너는 그러겠다고 한 거고?”
“어. 나도 어차피 다른 사람이랑 할 생각 없었으니까.”
유건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내게 차분한 어조로 질문했다.
“내가 너랑 페어를 하려는 이유가 뭐인 것 같아?”
“가이딩하려고.”
“아니, 그거 말고.”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이딩하다가 네가 다른 사람 물어뜯을까 봐 그런 거잖아.”
이 녀석은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유건은 내가 어제 가이딩을 손만 잡고 할거고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했지만, 전혀 내 말을 믿고 있지 않았다.
“물론 너랑 가이딩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그게 주목적이라고.”
“거짓말하네.”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유건은 됐다는 듯 손사래 쳤다.
“아무튼 안 돼. 다른 사람이 너랑 붙어 있는 것만 봐도 신경 쓰여. 가이딩하러 간다고 하면 더 그렇고. 페어 하면 가이딩 요청 내가 다 반려시킬 거니까 그렇게 알아.”
페어를 하면 서로에게 우선권이 생긴다. 유대감에 따라 매칭률이 오르내리는 만큼 파트너가 반대한다면 거부권 또한 쓸 수 있었다.
다른 에스퍼와 가이딩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나로서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가 걸렸다.
“그럼 선배랑도 난 이제 가이딩 못해?”
“당연하지.”
“…….”
“왜. 하고 싶어?”
“어.”
센터에 들어온 후, 한결과 나는 밖에서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그가 서로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건 알지만 그 모습은 일부러 내게 선을 긋는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캡슐에서는 여전히 다정했고, 사고 때 나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한결이었다. 그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생존자들이 크리먼일지도 모른다고 기피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내가 캐비닛에 숨어 있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단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 줬다.
그는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그와 있으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어린 날로 돌아간 것처럼 편안했다. 그런 한결을 믿고 의지했다. 그와의 가이딩은 내게 몇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중에 인간 되면 실컷 해. 그땐 터치 안 할 테니까.”
내 뻔뻔한 대답에 유건은 어이없어하거나 조롱하지 않았다. 마치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만약에 인간이 못되면?”
“영원히 못 하는 거지.”
유건이 서류를 바라보다 눈을 치켜떴다. 어느 때보다 단호한 눈빛이었다.
“이 얘긴 그만하자. 이거 작성 어떻게 하는 건데?”
유건이 의자를 내 쪽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나도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애초에 받아줄 것 같지 않았다. 유건은 어제도 확고하게 말했었으니까.
아마 여기서 내가 더 말을 꺼냈다간 다시 센터를 나가라는 말을 할지도 몰랐다. 나는 볼펜을 들고 한결이 설명해 줬던 대로 유건에게 알려 줬다.
유건은 내가 말하는 동안 작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건 왜 쓰냐는 둥 간단한 질문을 건넸다.
나는 알고 있는 건 답해 주었지만,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쓰라면 써.”라며 괜히 차갑게 대답했고 그는 그런 나를 웃어넘겼다.
“그럼 이제 진단원 가면 되는 거야?”
“어.”
“오전까지면 빨리 가야겠네. 가자.”
“아, 잠깐만.”
“왜?”
회의실을 나가려는 유건을 붙잡았다.
“매칭률 테스트 어떻게 할 거야?”
“뭘?”
진단원에 가면 매칭률 테스트해야 했다. 유건과 내가 각자의 파장 기록표로 컴퓨터가 추려낸 매칭률이 있기는 하나, 페어 요청할 때는 더욱 정확한 정보를 환산하기 위해 여러 테스트를 겸했다.
근데 그 과정이 좀….
“나 가이딩할 때도 키스 안 해.”
가이딩 단계는 3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는 간단한 스킨십, 손을 잡거나 포옹한다. 2단계는 짙은 스킨십, 애무 수준의 접촉과 키스를 나눈다.
그리고 3단계는 잠자리였다. 다행히 매칭률 테스트는 3단계까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2단계도 걱정됐다.
내 말에 유건이 빙글 웃었다. 그러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목만 좀 빠는 건 어때? 매칭률 높은 편이니까 그 정도면 되겠지.”
유건은 여유로워 보였다. 하긴 각성자들은 직업 특성상 스킨십에 거부감이 적었다.
그런데 이 녀석 센터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됐잖아. 뭐 하는 녀석이지?
“그래…. 근데 다른 것도 문제여서.”
나는 미심쩍었지만 일단 넘어갔다. 중요한 건 저 녀석이 이전에 방탕하게 놀았든 말든 그런 사실이 아니었다.
이 얘길 할까 말까 어젯밤에도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사고를 미리 방지하려면 확실한 게 좋으니까.
“잠깐 그대로 서 있어 봐.”
나는 유건에게 다가갔다. 처음엔 유건이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다가 내가 생각보다 더 가깝게 다가오자,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왜, 왜 그래?”
유건이 화이트보드로 된 벽에 쿵 부딪혔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어깨를 그러쥐고 까치발을 들어 더욱 가깝게 밀착했다.
“야. 자, 잠깐. 구사월?”
“뭐.”
“이런 건 이따가, 그러니까 블라인드라도 좀 치고? 응?”
그의 목에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다디단 냄새에 나도 모르게 침이 고여 입을 달싹였다.
“야, 야. 잠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