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은 당황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 형 개코네.”
“너 그거로 사월이 협박했어?”
“그게 협박거리가 되나. 가이드들 그 피 추출해서 마시면 가이딩 효율 높아진다는 소문 돌아서 뒤에서 먹는 거 흔한데.”
“그래도 들키면 센터에서 제재는 가해지겠지. 사월이는 자기가 그런 상황 되는 거 끔찍하게 싫어할 거고.”
“잘 아네.”
“……?”
“구사월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한결이 눈매를 좁혔다. 턱을 문지르며 지그시 바라봤다. 그가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려 할 때 짓는 습관이었다.
유건은 최대한 얼굴에서 감정을 지웠다. 눈만 꿈뻑꿈뻑 깜빡이자, 한결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사월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네 말이 맞다면 유건이 네가 오늘 한 행동 불편했을 거야.”
“지금 잘못은 걔가 했는데 내 탓 하는 거야?”
“네 탓이 아니라. 후…. 괜히 가만히 있는 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고.”
한결이 사월을 예뻐하는 건 알고 있었다. 사월도 한결을 믿고 따르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이라기에 지금 한결의 행동은 과한 느낌이 있었다.
“형이나 조심해.”
유건이 한결에게 반발했다.
“구사월이 센터에서 구설수 오르는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렇게 대놓고 끼고 다녀?”
엘리베이터에서 일을 말하는 거였다. 한결은 마치 작고 귀여운 것을 보는 듯 따듯한 눈빛으로 사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반쯤 갇힌 채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건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치솟았다.
“그건 너니까.”
“내가 뭐. 나는 센터 사람 아니야?”
혹시 서로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재앙 같은 예감을.
유건이 한결에게 선을 긋듯이 딱 잘라 말했다. 한결은 유건을 낯설게 바라보다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앞에서도 조심할게.”
“그리고 나 내일 구사월이랑 페어 요청할 거야.”
잘 못 들었다는 듯 한결의 눈썹 한쪽이 날 서게 올라갔다.
“왜? 구사월 누구든 일단 페어부터 하는 게 우선이라고 형도 말했었잖아.”
이건 사월이 크리먼에게 습격을 당했던 날, 브리핑하며 말했던 거였다.
“그게 협박해서라도 너와 하라는 말은 아니었어.”
“구사월도 동의한 거야. 협박 같은 거 없었고. 의심되면 구사월한테 물어봐도 좋아.”
“…….”
“그러니까 ‘내 가이드’랑 앞으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유건은 일부러 ‘내 가이드’ 라는 단어를 꾹 눌러 말했다. 한결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 후로 고개를 푹 수그려서 유건의 말을 듣고 어떤 기분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살갗이 따갑도록 흉흉한 파장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한결은 유건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기숙사를 나갔다. 쿵, 하고 커다랗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유건은 단호한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먼은 인간의 냄새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피 냄새에는 더더욱.
뉴스에서 일상생활을 하다가 사고를 친 크리먼들은 보면 피에 대한 자제력이 종잇장보다도 얇아 보였다. 센터는 게이트를 밥 먹듯이 드나드는 각성자들뿐 아니라, 몸에 상처를 두르고 사는 에스퍼들 소굴이었다.
그 때문에 사월의 비밀을 안 후로, 사월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만 보면 자신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해졌다.
하물며 한결은 자기 가족이었다. 사월이 한결의 사정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사실도 과연 알고 있을까?
한결의 어머니가 크리처에게 물려 크리먼이 되고, 어린 한결을 물려 했단 사실을.
한결은 다섯 살이었다. 에스퍼로서 각성도 안 했을 적이었다. 그때 정말 물리기라도 했다면 크리먼이 되든가, 독을 이기지 못해 죽었을 수도 있었다.
한결은 그날 할퀸 상처가 목에 흉터로 남았고, 오랫동안 정신과에 다닐 정도로 고통받았다. 지금은 나아진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얼마나 큰 상처가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유건도 건들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그런 한결이 아무리 사월을 예뻐한대도 그녀의 정체를 안다면, 그래도 그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유건은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당사자가 아니니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사월이 한결에게 자신이 크리먼인 걸 밝히기 싫어한다는 거였다.
“너 형이 이걸 알면 뭐라고 할 것 같아?”
“…….”
“캡슐에서 뭘 하고 올라왔길래 얼굴은 시뻘게져서 올라오냐고.”
사월이 그때 짓던 표정. 유건이 죽일 수 없을 것 같냐고 사납게 물어볼 땐 초연한 태도였으면서 한결의 이름이 나오자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건 반대로 말하면 한결에게 이 사실을 들킨다면 사월이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것이 없어진다는 게 아닌가.
“차라리 죽여.”
“내가 너 못 죽일 것 같아?”
죽인다는 협박에도 사월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 죽음이 무섭지 않아서인지, 그저 객기인 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유건은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크리처가 세상에 나타나고, 크리먼 역시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 센터는 크리먼을 크리처로 분류하며 발견 즉시 사살령을 내렸다. 크리먼을 숨겨준다면 공범 역시 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처음 사월이 크리먼인 걸 알았을 때, 진짜로 사월이 어디론가 떠나 버렸으면 싶었다. 땅이 갑자기 꺼져서 사라지거나 갑자기 이민을 가 버린다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 바랄만큼 패닉에 빼졌다. 자신이 본 것이 제발 거짓이길 바랐다.
왜 사월은 가이드이고, 왜 유건과 매칭률이 가장 높으며, 왜 하필 유건에게 그 상황을 들켰는지. 이 상황이 너무 거지 같고 화가 났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
그런 얼굴로, 그런 향기로, 그런 말투로 자신을 죽여 보라 말하는 사월이 너무 독하게 느껴졌다.
“후…. 사월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할까.”
유건이 사월을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사월이 유건 앞에서 사라졌으면 했지만, 죽는 걸 바라진 않았다.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찾아온 고요한 평안. 정신을 괴롭히는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고통 또한 원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월의 목에 잠깐 닿은 손바닥이 아직도 저릿할 정도로, 유건의 몸은 본능적으로 사월을 원했다. 매칭률 90%에 가까운 가이드는 에스퍼에게 그런 존재였다. 유건은 사월을 숨겨주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항생제 개발되면 인간이 되고 싶긴 한 거지?”
“…….”
“아니야?”
“맞아. 당연하지.”
그래서 물었다. 사월은 어딘가 찝찝하단 표정이었지만 다행히 긍정의 답을 줬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건 또한 이것이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지 알았다.
“그럼 됐어. 그리고 나랑 페어 해.”
하지만 이런 실낱같은 가능성에 기대야 할 만큼 유건은 간절했다. 사월이 죽으면 안 되니까. 크리먼인 사월이 센터를 나갈 생각도 없고 이대로 정체를 숨긴 채 지내고 싶다면, 자신의 옆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아서.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오고 나서야 선명하게 알게 됐다. 유건이 사월에게 에스퍼로서 꽤 높은 집착을 보이고, 그녀와 닿길 바란다는 것을. 자신의 가이드인 그녀가 살길 바랐다.
하나보다는 둘이 힘을 합쳐서 비밀을 지킨다면, 거짓말이 더욱 견고해지지 않을까. 들키지 않으면 괜찮을거다. 들키지만 않으면 사월이 유건의 옆에 있어도.
결국 사월과 페어를 하기로 합의를 봤고, 나름대로 며칠째 고민하던 것이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다만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참기 힘들 정도로 갈증 나게 하는 건 너뿐이라고.”
보통 크리먼이 이런 말을 사람에게 한다면, 공포에 떨지도 모를 말이었다. 그런데 유건은 놀랍게도, 그 한마디에 언제 화가 났냐는 것처럼 사르르 녹아 버렸다.
사월에게 센터를 나가라고까지 했으면서 태도를 완전히 바꾼 건 그 말을 듣고 나서가 맞았다.
‘그러니까 나를 피하던 게 내가 싫어서가 아니었단 소리잖아.’
그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왜 이 사실이 기분이 좋은 건지 당최 이해가 안 됐다.
그 이유에 대해 유건은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그럼 나 봐주는 거야?”
유건이 사월을 봐준다니. 그건 예전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사월은 유건에게 항상 단답형으로 말하고 꺼지라는 말만 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답지 않게 눈치를 보며 묻는 말투가 꽤 귀엽게 느껴져서, 유건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다 정색하며 하나의 가정을 떠올렸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자신이 한결같이 사월에게 느끼는 감정이 에스퍼로서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지키려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호감을 품게 된 것이라면….
“미친. 진짜 작작 해라, 백유건.”
유건은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마치 그건 자살골을 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각하는 시나리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런 까칠한 녀석을 좋아하게 될 리 없었다. 아예 가능성을 배제해야 했다.
‘무슨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유건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라도 사월은 인간이 아닌 ‘크리먼’이었다.
“정신 차려. 백유건. 구사월은 크리먼이야.”
유건은 혼잣말하며 가슴에 되새겼다. 자꾸만 떠오르는 사월의 체온과 얼굴을 밀어내며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아무래도 제일 조심해야 할 건 본인 자신이었던 모양이었다.
***
사월은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유건에게서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용은 한결이 크리처 고기인 걸 알았고, 유건이 다른 말로 둘러댔으며, 그러니 한결이 물어봐도 당황하지 말라는 거였다.
“하… 진짜. 그러게 그걸 왜 거기서 나한테 줘서….”
확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오전에는 기분이 안 좋은 편인데, 더 낮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너랑 내일 페어 할 거라고 했어.」
뒤늦게 도착한 메시지 하나 더. 이건 방금 온 거였다.
「뭐래?」
「아무 말 안 하던데?」
답장은 곧바로 도착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알았어.」
그리고 끝이었다.
사월은 그날 유건이 그렇게 회의실을 나가고 곧바로 가방을 챙겨서 퇴근했다. 한결이 사월 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한결이 마음에 걸렸다. 하필이면 그날 자신과 페어를 하지 않을 거라면 다른 사람과도 하지 말라는 소릴 해서.
그 말에 대해 나는 확답은 아니지만, 긍정에 가까운 답을 했었다. 수아에게는 관심 없다고 마음대로 하라고 해 놓고선, 내가 유건과 오늘 페어를 한다면….
“…진짜 돌겠네.”
엉겁결에 나는 여러모로 앞뒤가 다른 사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