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
“아니요.”
“그럼 좋아?”
“그게….”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는 것처럼 따뜻한 온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선배.”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언젠간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서 여러 번 연습했던 대답이었다. 크리먼 주제에 인간과 페어를 한다는 건 욕심이니까. 나중에 알게 될 파트너가 얼마나 배신감에 떨 것인가.
나는 누구보다 한결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결은….
“알아. 괜찮아.”
“…….”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고요했다.
다른 사람에겐 수백 번도 했던 거절의 말인데, 왠지 목구멍으로 모래를 씹은 것처럼 까끌하게 느껴졌다.
“괜찮다고 했잖아. 신경 쓰지 마.”
눈을 감고 있으면서 내가 불편해하는 건 어떻게 안 건지, 그가 나를 달래듯 말했다.
“어릴 때 나한테 시집온다고 했을 때 데려올 걸 그랬네.”
그러다 돌연 뜬금없이 옛날얘기를 꺼냈다. 초등학생 무렵이었나. 그건 내 나름대로 인생에서 첫 프러포즈였다. 나는 조금 웃음기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대체 그게 언제 적이에요.”
“그러게. 그 어린 게 언제 이렇게 컸대.”
“가이딩에 집중 좀 합시다.”
하지만 모두 어린 시절 이야기다. 이성적인 호감보다는 동경하는 마음이 더 컸고, 내가 크리먼이 된 이후로 그런 감정들은 모두 잊고 살고 있었다.
“사월아.”
“…….”
“사월아아.”
“왜요.”
그가 또 장난을 치려는 것 같아서 무시하려는데, 그가 집요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랑 안 할 거면 다른 사람이랑도 페어 하지 마.”
“누구 인생 망치려고 그런 말을 해.”
나는 부끄러워져 말투가 괜히 퉁명스럽게 나갔다. 장난기 있는 말투여서 나도 맞받아친 건데, 어느새 한결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다려 줄 테니까 오빠랑만 이런 거 해.”
그가 엄지로 내 손가락 마디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러더니 손을 입가에 가져가 그의 입술로 도장을 찍는 것처럼 짓눌렀다.
말랑말랑하고 뜨끈했다. 그의 숨이 내 손등 위로 흩어졌다. 내가 눈에 띌 정도로 뻣뻣하게 굳자, 한결의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것이 살갗으로 느껴졌다.
그 미소에 내가 어이없고 놀라서 입이 허, 하고 벌어지자 그가 픽, 웃고는 손깍지를 끼었다. 손바닥에 송송 땀이 솟았다.
‘미치겠다. 오늘따라 왜 이래?’
“어차피… 어요.”
“응?”
열이 올랐다. 이건 가이딩으로 인해 성감이 차올라서도 아니고 갈증이 느껴져서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런 거 할 수 있는 사람, 선배밖에 없다고요.”
나는 고개를 한결의 반대편으로 홱 돌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아니 이게 불안해서가 맞나. 너무 울렁거려서 거북스러울 정도였다. 한결이 둘만 있을 때면 장난을 많이 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치진 않았다. 그가 오늘 뭔가 이상했다.
흘려듣기엔 신경 쓰이는 말과 간지러운 행동들. 대체 왜 이러지?
“착하네. 우리 사월이.”
“…짜증 나.”
서서히 가열되는 열기에 금세 목덜미며 귀까지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한결은 그런 나를 보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파장이 자꾸만 몸속으로 들어올 듯 말 듯 걸쳐 있었다. 조금만 힘을 놓거나 당기면 한쪽으로 끌려가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
한결과 가이딩을 하고 캡슐에서 나왔다. 원래 한 시간가량 가이딩을 하는데 두 시간은 족히 넘은 것 같았다.
통유리로 된 창 너머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주황빛 석양이 오늘따라 고요하고 평화롭게 느껴졌다.
“사무실 들렀다 갈 거지?”
“네.”
“하마터면 잠들 뻔했네.”
“…….”
한결은 오늘 가이딩 내내 편안해 보였다. 난 그 후로 남몰래 열을 식혀야 했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더운 숨을 내쉬니, 한결이 내 옆얼굴을 보며 물었다.
“더워?”
“네.”
아직도 얼굴이 붉은 상태인가 보다. 딱히 변명할 생각도 안 들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한결이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며 어깨에 손을 두른 채 내 볼을 콕콕 찔렀다.
“말랑말랑하고 따듯해.”
“건들지 마요.”
“열 있는 건 아니지?”
“없어요.”
“얼굴 터지는 거 아냐?”
“장난치지 말라고.”
내가 얼굴을 뒤로 빼며 피해 봐도 작정했는지 이곳저곳을 찌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얼굴이 사정없이 뭉개졌다.
“그만하라고요. 13층 도착해요. 진짜 손 풀어요, 빨리.”
“괜찮아. 들켜도 되는 사람이야.”
한결은 알파 팀 13층에 도착할 때까지 나를 괴롭혔다. 에스퍼는 감각이 예민해서 가까이 있으면 눈 감고도 파장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챌 수 있다고 하던데. 한결이 저렇게 말하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센터에서 우리 사이를 들켜도 되는 사람이 누가 있지?
띵.
청명한 알림음이 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달큼한 향이 밀려들어 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숨을 참았다. 그 잠깐 사이에 나도 이 앞에 누가 있는지 알아챘다.
“둘이 뭐해?”
백유건이네.
그는 우리를 보며 정색하며 물었다. 한결은 “왜?” 하며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고, 유건은 한결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 왜. 뭐 어쩌라고.’
유건에게 한결과 붙어 있는 걸 처음 들키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머쓱했지만, 그 후론 유건도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아서 부끄럽진 않았었는데.
오늘은 왠지 눈빛이 사뭇 달랐다. 그러니까 어디가 다르냐면….
“구사월 가이드. 수고했어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한결과 나는 여느 때처럼 딱딱한 말투로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유건이 우리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하.”
뭔가 화난 것 같은데?
마침 사무실에서 누군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갔나 보네, 백한결.
“오빠! 내 말 좀 들어 봐! 어? 캡틴, 사월 언니, 안녕하세요.”
뛰어오던 사람은 수아였다. 그녀는 한결과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 유건의 팔을 붙들었다.
“매칭률은 페어하면 점점 오르기도 한다잖아. 사월 언니 아니면 딱히 할 만한 다른 사람도 없는 거 아냐?”
수아가 유건에게 페어를 요청한다더니, 그 얘기를 하나 보네. 나는 괜히 불편해져서 발걸음을 옮겼다. 유건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어디가.”
“퇴근 시간인데 집에 가야지.”
“팔자 좋네.”
유건이 비릿하게 웃었다. 빈정거리는 말투에 내가 눈을 부릅뜨자, 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 너한테 줄 거 있어.”
“뭐?”
“따라와.”
“아니, 잠깐!”
유건은 수아와 대화 중에 나를 끌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내가 팔목이 잡힌 채 어설프게 끌려오니, 사무실에 아직 퇴근을 안 한 팀원들이 우리를 보고 수군거렸다.
“뭐야?”
“아무렴 그렇지. 백유건이 포기했을 리가.”
“우리 수아는 어떡해.”
수아가 뒤에서 따라 들어왔다. 우리를 보고는 크게 상심한 표정이었다.
“잠깐 기다려.”
유건이 자신의 책상 앞에서 내 손을 놓더니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자리를 뒤적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한참을 찾다가 서랍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언가 꺼내고 있었다.
“뭔데.”
“네가 놓고 간 거.”
“그러니까 대체 뭐….”
나는 짜증스럽게 재촉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익숙한 냄새였다. 순간 섬뜩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익숙하지만 여기에 있어서는 절대 안 될 향기였다.
“언제 줄까 싶었는데 이제야 주네.”
유건이 잡고 있는 것을 완전히 서랍 밖으로 꺼내 들었을 땐, 그대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네가 놓고 간 거 내가 보관하고 있었어. 그 먼 곳까지 가서 포장한 거였잖아. 왜 찾으러 안 와?”
“뭐야, 이거 그때 초콜릿이야?”
“초콜릿? 사월이가 애냐. 먹을 거로 꼬셔지게.”
유건의 행동에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비닐봉지를 보며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그들은 대부분 달콤한 초콜릿을 예상했지만, 이내 고약한 냄새가 사무실 내부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건 크리처화가 진행된 크리먼을 만난 날, 식당에서 포장한 고기였다. 피를 빼내기 위해 챙겨 두었던 건데 유건이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근데 이거 썩은 것 같은데?”
“완전 냄새 지독하네. 백유건, 넌 보관을 어떻게 했길래 상한 걸 주냐. 으이그.”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지한이 유건을 질책했다. 다행히 종이봉투에 비닐봉지까지 보통 식료품처럼 이중으로 곱게 포장되어 있어 크리먼 고기라고 예상하진 못하는 것 같았다. 유건은 웃음기를 머금고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선에 목구멍이 빠듯하게 조여 왔다. 정신이 아득한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게 뭔데?”
“만지지 마세요.”
그중 한 사람이 종이봉투의 내용물을 꺼내 보려 했다. 나는 재빠르게 낚아채고 유건을 노려봤다. 종이를 잡은 손끝이 떨렸다. 나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목소리를 내었다.
“백유건. 나랑 얘기 좀 해.”
나는 곧바로 뒤돌아 걸었다. 왠지 모를 주변의 환호성과 유건이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코끝을 찌르는듯한 역한 냄새로 인해 내가 크리먼이라는 주홍 글씨가 날카롭게 새겨지는 것 같았다. 역시 이렇게 쉽게 지나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의 후유증은 이제 시작이었다.
***
회의실에 들어와 모든 창에 블라인드 버튼을 눌렀다. 뒤를 돌아보자 유건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어쩌자는 거야?”
“뭘.”
“거기서 그걸 꺼내면 어떡하냐고!”
“신경이 쓰이기는 한가 봐?”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갑자기라. 유건은 다소 공감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넘었고, 그동안 백유건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크리먼이란 사실을 들킬 지도 모르는 단서를 들이미는 그의 행동은,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얼얼한 충격이었다.
“원하는 걸 말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녀석이 얌전히 있다가 이제 와서 까발리려는 걸 보면, 원하는 게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 설마 아직도 나랑 페어하고 싶어?”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너 미쳤어? 나 크리먼이야.”
“맞아, 그랬지.”
유건은 내내 여유로운 태도더니,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씩 다가왔다. 허리를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느리고 태평한 움직임이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유건이 조롱기를 머금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크리처에게서 국민을 보호하는 센터에서. 대체 크리먼이 왜. 왜 대체 선두로 서야 할 알파 팀에 있냐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총알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공격했다. 내 얼굴에서 눈과 코, 입술까지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다시 눈을 치켜뜨며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