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31)

수백 년 전 도심 한복판에 게이트가 생성됐다. 게이트에는 동물도, 인간도 아닌 흉포한 유기체가 출현한다. 그들을 ‘크리처’라고 부른다.

유례없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춘 크리처는 인류를 공황 상태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인류는 그대로 멸종 위기까지 이를 뻔했으나 소수의 사람이 각성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에스퍼’라고 부른다.

그들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면서 크리처와 상응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한계를 벗어난 능력은 얼마 안 가 정신을 망가뜨리고 생명력을 갉아먹었다.

그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또 다른 각성자가 나타나는데, 그들을 ‘가이드’라고 불렀다.

각성자의 수가 점차 늘어나자 정부는 이들을 관리하고, 크리처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지역마다 센터를 설립했다.

센터는 각성자들을 고유의 특성과 파장의 세기에 따라 등급을 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건은 1차 각성으로 비교적 늦은 시기인 스물세 살에 무려 S급 에스퍼로 각성했다.

등급이 권력이 되는 세상인 만큼, 앞에 펼쳐진 꽃길만 따라 걸어가면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왜?”

“…….”

“내가 왜 네 페어가 되어야 하냐고.”

S급 가이드 ‘구사월’을 만나기 전까지는.

“왜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보냐….”

“뭐가 당연한데.”

칠흑처럼 어두운 머리카락과 차가운 잿빛 눈동자. 그것보다 더 시린 말투가 흘러나왔다. 그저 페어를 하자고 제안한 것뿐인데 사월은 엄청난 모욕을 당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사월의 기다란 속눈썹이 어디 더 해 보란 것처럼 느리게 깜빡인다. 어깨 위로 똑 떨어진 머릿결이 그녀만큼 날카롭게 느껴졌다.

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혀 하늘을 보다가 땅을 보다가 다시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너, 나랑 매칭률 89%인 건 알지?”

“매칭률 높으면 무조건 페어를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이렇게 말하면 유건은 또 할 말이 없었다. 마치 오류가 난 것처럼 멈칫거리는 유건을 향해 사월이 “그래?” 하며 재차 물었다. 조금도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왜 얘 앞에만 서면 바보 천치가 되는 기분인지.

“못 들은 거로 할게.”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유건을 보고 사월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이렇게 또 보내면 안 된다. 어떻게 대화할 기회를 얻은 건데.

유건은 다급하게 사월의 팔목을 붙잡았다.

“잠깐만! 할 말 안 끝났어!”

탁.

사월이 유건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평소 그녀답지 않게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유건의 손은 허공 어디엔가 어정쩡하게 멈춰 있었다.

“만지지 마.”

또 그 눈빛. 마치 더럽고 끔찍한 벌레를 보는 듯한 경멸 섞인 시선이었다. 사월은 숨까지 색색 몰아쉬며 씨근덕거렸다. 그러곤 이 모든 게 귀찮다는 듯 표정을 갈무리하며 뒤돌아섰다.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데! 이유라도 좀 알자!”

유건은 억울하다는 듯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언제나처럼 무시하고 갈 줄 알았건만 사월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녀가 뒤를 휙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몰라서 물어?”

“당연하지! 네가 말을…!”

“너한테 냄새나.”

“뭐라고…?”

되묻는 말에 증명이라도 하듯 사월이 자기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한테서 냄새난다고.”

유건은 잘못 들어서 물은 게 아니었다.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너무 얼토당토않은 이유여서.

유건의 일반인 인생과 에스퍼 인생 전부를 통틀어 이렇게 모욕적인 순간은 없었다. 사월은 충격에 빠진 유건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지도 마.”

기어코 접근금지령이 떨어졌다. 사월이 유건을 지나쳐갔다. 비 오는 날을 연상케 하는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

“유건. 가이딩 받으러 안 가?”

“받고 있잖아요.”

유건은 안 보이냐는 듯 지한에게 들고 있는 가이딩 크리스털을 흔들었다.

“그게 가이딩이냐. 보조 배터리지. 급속 충전 받으러 안 가냐고.”

“됐어요. 이거로 충분해요.”

“또 차였구나?”

유건은 지한을 눈을 흘기며 째려봤다. 지한의 입에서 유쾌한 웃음이 터졌다.

“그러게, 신입이 어딜 넘봐. 감히 우리 A지부 여왕님을.”

“여왕님은 무슨. 걔 또라이에요?”

“왜. 또 무슨 일인데.”

지한이 어디 얘기해 보라는 듯 유건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유건이 사월에게 페어 요청을 차인 것도 수십 번. 처음에나 충격을 받았지, 이제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유건은 상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보고 냄새난대요.”

“뭐?”

“저를 싫어하는 이유가 냄새나서래요. 이제 가까이 오지도 말래요.”

“푸하학. 그러게 잘 씻고 다니지 그랬어.”

“아, 진짜 형까지. 저한테 진짜 냄새나요?”

유건은 억울하다는 듯 지한에게 물었다. 같은 팀 동료인 지한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바닥까지 굴러가며 낄낄거렸다.

“와, 진짜 웃기네. 아이고, 사월아….”

제삼자에겐 그저 이 상황이 마냥 재밌는 모양이었다.

유건은 애써 눌러 오던 열기가 다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매우 깔끔한 편에 속했다.

에스퍼들 사이에서도 결벽증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하루에도 3번 이상은 샤워하곤 했으니까.

높은 등급으로 각성해 다른 이들보다 후각이 민감해진 탓이었다. 체향은 물론이고 게이트에 다녀올 때면 크리처 특유의 비린 냄새를 참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말이 안 된다. 사월이 유건을 어떻게든 떨어뜨리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일 터였다.

“너같이 깔끔 떠는 에스퍼가 어딨다고. 사월이가 이제 쓸 만한 레퍼토리가 없나 보다. 아니면 변명할 성의도 없다거나.”

“저 진짜 어떡하죠?”

지한의 말을 듣자 더 암담해졌다. 이제는 정말 끝일 것 같아서.

처음 센터에서 S급 에스퍼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유건은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등급이 높으니 당연히 페어를 하려는 가이드가 줄을 설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페어란 에스퍼와 가이드가 하나의 파트너로 묶이는 관계를 말한다. 서로에 대한 우선권을 가지게 되며, 보통 50% 이상의 매칭률을 가진 각성자와 페어를 맺는다.

유대감에 따라 가이딩 효율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가이딩을 한 사람과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시스템이었다.

사월과 유건의 매칭률은 89%. 만약 각인을 하고 페어를 한다면, 유례없이 높은 매칭률을 기록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하필 A지부에서 가장 콧대 높기로 소문난 가이드가 자신과 매칭률이 가장 높을 게 뭐란 말인가.

“뭘 어떡해. 그냥 포기해.”

“저 진짜 심각하다고요. 이러다가 폭주할지도 몰라요.”

사월은 유건뿐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페어를 한 전적이 없었다. 그녀의 별명 중 하나인 ‘아이스 월’의 이름값을 하듯, 그녀의 견고한 얼음벽 앞에서 수많은 에스퍼가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매칭률 좀 부족해도 다른 가이드랑 3단계 가이딩을 하라고.”

가이딩 단계는 3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는 간단한 스킨십,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한다. 2단계는 짙은 스킨십, 애무 수준의 접촉과 키스를 나눈다. 그리고 3단계는 잠자리였다.

여기서 더 최악인 건 유건은 다른 가이드들과 매칭률이 30%도 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낮은 매칭률에서는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정도로는 유의미한 가이딩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지한의 말대로 3단계 가이딩을 해야 그나마 가이딩 효과를 본다는 말인데….

“싫어요. 처음 본 사람이랑 어떻게 자요?”

차라리 좀 아프고 말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다짜고짜 몸을 섞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건이 에스퍼 되려면 한참 멀었네.”

지한은 그런 유건이 태평한 소리를 한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가이딩. 에스퍼들이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됐어요. 아직 기회 있어요.”

“기회는 무슨. 어, 사월아. 안녕.”

지한과 대화를 나누는데 마침 사월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지한은 사월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사월은 지한에게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유건을 보고 코를 막으면서 도로 나갔다.

“푸핫. 지금 너 보고 코 막으면서 나간 거 맞지?”

“와. 진짜 돌겠네. 쟤 도대체 왜 저래?”

“하하하. 진짜 너무 웃기다 너희.”

머리가 딩딩 울렸다. 정상적인 가이딩을 받지 못해 피로가 쌓인 터라 별거 아닌 자극에도 열이 확 뻗쳤다. 손에 든 가이딩 크리스털을 당장이라도 집어 던질 것처럼 번쩍 들었다.

“후….”

당연히 던지진 못했다. 이건 자신을 끔찍해 하지만 89%의 매칭률을 가진 가이드. 구사월이 충전해 준 소중한 가이딩 크리스털이니까.

가이딩 효과는 접촉 가이딩의 채 반절도 나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이것마저 없으면 유건은 밤잠을 설치며 이명에 시달려야 했다.

유건은 다시 시무룩해 하며 손을 내렸다. 크리스털을 두 손으로 꼭 쥔 모습은 마치 신에게 기도하듯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무 웃겨. 죽을 것 같아.”

지한은 그 꼴을 보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있었다. 화 한번 제대로 못 내는 모양새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구사월.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런다고 내가 나가떨어질 줄 알아?’

유건은 속으로 이를 빠득 갈았다.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사월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페어를 할 거라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

“너 또 차였다며.”

“아…. 형은 또 어디서 들었어?”

유건은 머리라도 식힐 겸 훈련소로 왔다. 물을 마시던 한결이 유건에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해왔다. 들어오자마자 들리는 소리가 이거라니.

“지한이한테.”

사월과 있었던 일을 지한에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A지부 확성기라고 불리는 남자에게 제대로 이야깃거리를 던져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결은 유건에게 마시던 물을 내밀었다. 유건은 괜히 속 타는 마음에 생수를 바닥까지 비우고는 콰득 찌그러트렸다.

“사월이 너무 귀찮게 하지 마.”

“아니, 걔 다른 에스퍼랑은 가이딩하잖아. 왜 나만 안 하냐고.”

“우리랑도 손잡는 게 고작이야.”

“난 손도 못 잡아. 이제 나랑은 같은 공기도 맡기 싫어해. 페어하면 걔도 나만 케어하면 되니까 편해지는 건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냔 말이야.”

“그건 네 생각이고. 사월이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지.”

“형은 대체 누구 편이야?”

한결은 유건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성질 좀 죽이라는 듯 꾹 눌렀다. 유건은 이럴 때마다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유건은 자신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한결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형이 페어하자고 하면 구사월은 했을까….”

한결은 눈썹이 묘하게 구부러졌다. 그러곤 픽 웃음이 샜다. 유건의 말을 장난으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그렇잖아. 내가 S급이라도 갓 들어온 신입이라서 구사월 눈에 안 찰 수도 있는 거고.”

백한결. 그는 유건의 친형이자, S급 에스퍼이자, A지부 알파 팀 캡틴이다.

스물세 살에 발현해 아직 적응 단계인 유건과는 달리, 그는 열다섯 살부터 센터에서 근무하며 천재 소리를 밥 먹듯이 듣고 다니는 인재였다.

“그건 아닐 거야.”

“형은 구사월이랑 페어 안 하고 싶어?”

한결은 대답 없이 유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알기론 형은 사월과 꽤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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