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빈소 안에 서 있는 티엔은 멍하니 자신의 앞에 있는 흑향의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향해 환히 웃어보이던 그녀의 모습을 이제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슬프게 그의 마음을 후벼팠다.
한참을 흑향과 마음으로 대화한 뒤, 티엔은 조심스레 빈소에서 걸어나왔다. 광백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그는, 정류장의 벤치에 앉아 있는 후드를 뒤집어쓴 소녀를 발견했다.
이 더운 날씨에 저렇게 꽁꽁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신경쓰이는 건 당연지사.
그가 무심코 그녀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소녀가 고개를 돌리더니 후드를 벗었다.
후드를 벗은 그 모습을 본 티엔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꼬.. 꼬마?!!"
신기하게도 그는 곧바로 그녀가 유진임을 알아봤다. 유진은 그가 자신을 알아본 것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고 나서 유진은 이야기했다.
"흑향 언니는... 결국 죽었군요..."
티엔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마지막 순간에 내게 엄청난 도움을 주고 떠났네요..."
깊은 상처를 입고 티엔에게 업혀 도망치던 그 때, 흑향은 예언몽을 받고 유진에게 입모양으로 말했었다.
[빨리 세빈언니에게로 가, 난 곧 죽어.]
그리고 그녀가 말한 대로, 흑향은 그날 죽음을 맞이했다.
"운명은 너무나 야속해요. '그 분'은 우리에게 운명을 거스를 힘을 주었지만... 결국엔 우린 다시 운명에 귀속된 몸이 되었네요."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미래로 넘어간 게 네가 아니라 스승님이었다니... 참으로 가혹한 운명이로구나."
티엔은 되려 유진을 걱정했다. 원래 돌아가야 할 자신의 시간대로 가지 못한 채 과거에 남아버린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걱정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제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유진은 티엔에게 미래에서 만났던 레이가 나이먹은 자신이라는 걸 알려주고, 앞으로 자신이 레이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임을 알렸다. 그리고 행여나 자신을 만나도 유진이라는 것을 말해선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운명에 의해 전 과거로 날려보내졌으니, 이제는 그 운명을 다시 제가 만들어낼 순서에요."
미래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담담하고 침착한 모습의 유진을 보는 티엔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땐 그저 피가 끓어오르는 소녀로만 보였던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속도로 어른이 되 가는 듯 했다.
"아저씨도 힘든 결정을 했잖아요? 원수의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들이고, 원수를 가짜지만 아내로 맞이한다는."
"뭐, 그렇지."
그녀는 대단한 일을 했다고 되려 그를 격려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다시한 번 악수를 청했다.
버스가 도착하고 티엔이 먼저 자리를 떴고, 그를 태운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지켜본 뒤 유진 역시 조용히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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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역시, 그이에게는 좀 사실을 다르게 해서 말하는게 좋겠죠?"
유나는 규찬과 함께 진을 설득할 작전을 짜고 있었다.
어떻게든 극적인 상황을 연출해가면서 그가 유나의 희생을 인정하게 만들고, 먼저 죽음에 이르게 될 규찬을 대신해서 작전을 이끌어나가게 만들어야만 했다.
아무리 완벽한 작전일지라 하더라도... 두 사람의 노력이 진에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윤하를 살릴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초토화된 광백이 원상태로 돌아올때까지 그들은 임시 거처를 현재 진과 윤하가 살고 있는 옆 집으로 옮긴 상태였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별도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태수(티엔)와 민아(지윤)가 재희와 함께 오랫동안 윤하의 옆집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재희에게 조작된 기억을 집어넣고, 그가 무조건적으로 윤하를 사랑할 수 있도록 세뇌를 걸어두는 작전은 현재 지윤의 주도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제 남은 건 진이 완전하게 그들을 믿을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 뿐이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짜내며 고민하고 있는데 이노우에가 누군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총수님, 기적입니다... 제 아이가 살아났어요!!"
그가 데려온 건 다름아닌 그의 딸 레이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살아돌아왔다는 소식에 모두가 놀라워했다. 게다가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아이가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모두 예언몽이 사라진 줄만 알았는데... 이건 기적이에요."
믿기지 않는다는 규찬의 말에 이노우에는 오늘 있었던 일을 예로 들며 그녀의 힘이 미약하지만 아직 남아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 정체는 특수분장 가면을 쓴 유진. 그녀는 미래를 모두 알고 있었기에 예언몽을 쓰지 않고도 미래를 예측하는 것 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부모님인 윤하와 재희에게 얽힌 이야기도 대강은 전해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규찬은 한참을 레이를 주시하더니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이 아이를... 이 아이를 통해서 진이에게 말을 전하면 되겠구나."
"네?"
유나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규찬을 바라봤다.
"모두 힘이 없어진 줄로만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윤하를 살릴 수 없게 된 절박한 상황... 그러나 살리기 위해선 유나 너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직 힘이 존재한다는 걸 진이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렇게 힘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린 뒤, 몇 명의 지원자를 통해 윤하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처럼 속이는 작전. 진이 아직 힘이 남아있다고 믿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실제로 결전의 날 윤하를 다시 중간계로부터 끌어내리게 되는 건, 지윤이 보호한 덕분에 남아있던 재희의 염원의 힘이 그 열쇠가 되어 유나의 힘을 불러들임으로써 가능한 것이겠지만...
"이 아이를... 진이와 굉장히 가깝게 지내도록 해야겠구나. 가능하면 윤하나 재희의 눈에 띄지 않도록,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함께 지내며 이 아이를 통해 나와 유나가 죽은 뒤에도 작전이 무사히 수행될 수 있도록..."
유나와 규찬으로부터 이어지는 작전, 하지만 두 사람이 죽고 나서 진에게 작전을 넘겨주기 위한 징검다리의 역할을 바로 유진이 맡게 된 것이었다.
"유나야, 이 방법은 정말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지만... 진이 녀석에게도 조금의 세뇌와 기억 조작이 필요하겠는데... 괜찮겠느냐?"
유나는 작전의 수행 가능성을 생각해보고는, 역시 그러는 편이 낫겠다고 이야기했다.
설득은 직접 자신들이 해야 하는 부분이긴 했어도, 그들이 죽고 난 뒤의 미래를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는 약간의 기억 조작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 고맙다."
규찬은 그길로 지윤에게 기억조작을 부탁하기 위해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아가, 이름이 뭐지?"
그는 일어나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레이를 보더니 이름을 물었다.
유진은 너무나도 태연하고 침착하게,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레이요. 이노우에 레이. 올해 14살이에요."
이름을 듣고 나서 규찬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하마. 힘든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구나 레이야. 괜찮겠니?"
규찬을 똑바로 바라보던 유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얼마든지요."
규찬이 나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혼다가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엄청나게 기쁜 표정으로 들어와서는 굉장히 차분한 집 안의 분위기를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유나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고, 혼다는 자신의 아들이 무사히 살아있음을 모두에게 전했다. 순간 이노우에의 표정에 씁쓸함이 보였지만, 그는 이내 자신의 곁에 있는 유진을 안으며 표정을 삼켰다.
자신을 안고 있는 이노우에에게, 유진은 나즈막히 말했다.
"굳이 감정 숨기지 않으셔도 되요. 절 딸로 생각하시면... 마음이 좀 편해지시려나요?"
그 말에 이노우에는 친절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내걱정 보다는 자기 걱정이나 하라며 유진을 나무랐다.
"물론... 지금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내 딸 레이가 인정해준다면 말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노우에는 자신의 딸과 완전히 판박이인 모습을 하고 있는 유진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고, 그런 그를 보며 유진 역시 그의 손을 잡아 화답했다.
*
한편 기억이 조작된 재희와 우주는, 그 시간 새로이 마련된 태수와 민아의 집에서 사이좋게 놀고 있었다.
마치 매우 어릴 때부터 친했던 사이처럼, 누가봐도 완벽하게 소꿉친구로 보였다.
티비를 보고 있는 두 아이를 태수와 민아가 바라보고 있었고, 두 아이는 저들끼리 뭐라고 떠들며 웃고 있었다.
"우와 재희야 저 여자 봐. 완전 이쁘다."
마침 미녀 연예인이 티비에 나오고 있었고, 우주는 그녀를 가리키며 엄청 이쁘지 않냐며 재희에게 물었다.
하지만 재희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저 여자는 별루야."
우주가 무슨 소리냐며 엄청 이쁘지 않냐고 되물었지만, 재희는 뭔가 확고한 이상형이 잡혀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글쎄. 내 이상형은 일단 아닌데?"
<7. 종식> END
============================ 작품 후기 ============================
다음화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
-리리플
-신의탑hello님 // 드뎌 대장정의 끝이네요 ㅠ-은하수보며님 //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