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지윤과 티엔이 아이를 찾으러 떠나고 나서, 회의실 안은 잠시간 정적에 휩싸였다.
지윤이 흑귀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달라져버린 그녀의 태도 때문에 당황한 탓도 있었다.
"그런데 부영수님, 윤하를 살리기 위한 그 작전... 단순히 희생할 아이만 있으면 되는 것인지요."
귀술은 혹시 자신도 도울 일이 없을까 하고 유나에게 물었다.
"물론... 마지막에 지윤씨의 아이의 몸에 들어간 우리 윤하가, 제 몸에 남아있는 기적의 힘을 조금 물려받아서 남자아이의 몸을 이용해 염원력을 사용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죽은 몸이나 다름없을 자신의 몸에다 대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할 거구요..."
아마도 지금 데리러 간 지윤의 아이는 분명 강한 염원력이 남아있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렇다고해서 무조건적으로 작전이 성립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려면 분명... 둘이 굉장히 긴밀한 사이여야 하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윤하가 저 아이를 위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리 없으니까요."
그 순간 귀술은 머릿속에 한가지 방법이 생각났다.
어떻게든 자신이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유나를 위해 도울 수 있는 길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 아이, 아니... 저희 형님의 아이도 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옆에 데리고 있던 우주를 안아올리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유나는 어린 아이들을 둘도 아니고 셋이나 끌어들이는건 너무나 무리수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들 역시 자신들의 운명이 있을 텐데, 어린시절부터 정해진 길을 가게하는 건 가혹한 일이라고도 이야기했다.
"그렇..군요..."
거절당한 뒤 귀술은 우주를 꼭 안았다. 자신의 형이 남긴 유일한 혈육인 그를 또다시 힘든 일에 빠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역시 들었던 것이다.
"그래, 미안하다 우주야. 아빠가 이상한 생각 했네... 우리 우주는 하고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커야지?"
"응! 아빠!"
과연 귀술의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주는 해맑게 웃으며 귀술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벼댔다.
"그나저나.. 그 아이가 완전하게 작전에 동원되기 위해서는... 조작된 기억이 조금은 필요할지도 모르겠구나 유나야."
규찬은 유나의 옆에 어느새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음.. 아무래도 그렇죠... 지윤씨가 저렇게 어떻게든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세뇌같은 경우는 제가 절대로 원하는 일은 아니지만..."
분명히 지윤의 아이는 완전히 윤하를 모르는 상태이고, 지금까지 지윤의 아이가 어떤 상태로 지내왔을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윤하와 그 아이가 깊은 관계, 즉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 위해선 지윤의 아이에게 어느정도는 조작된 기억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조금은 가혹할지도 모르지만... 지윤씨가 어떻게든 하겠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자신의 죄를 어떻게든 씻어내고 싶어하는 게 너무나 눈에 띄일 정도로 보이고 있기도 하구요..."
유나는 아이들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것이 조금 꺼림칙하긴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임을 통감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 귀술아, 이런 건 우주라도 가능할 지도 모르겠구나."
한숨쉬는 그녀를 보고 있던 규찬은 뭔가 생각났는지 귀술을 따로 불렀다.
"아무리 조작된 기억이라도.. 그 아이도 소꿉친구가 하나정도는 필요할 테니, 그 소꿉친구를 우주에게 맡기는 건 어떠하겠느냐? 그정도면 너도 안심할 수 있겠지?"
귀술은 그 말을 듣고는 물론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우주에게도 조금의 기억 조작은 필요하겠지만, 소꿉친구가 지윤의 아이라는 기억뿐이라면... 부담도 되지 않을 테니.
*
약 네시간 쯤 뒤, 심연에서 돌아온 티엔의 품에는 잠들어있는 사내아이 하나가 있었다.
너무나도 귀엽게 생긴 아이, 그는 지윤을 완전히 똑 닮아 있었다.
유나는 그 아이를 받아 한번 안아 보더니 지윤에게 물었다.
"아이 이름은요?"
하지만 지윤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마 태어나고 나서 복수만을 준비하느라 아이에게 신경써줄 시간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이름도 없는 아이라니...
규찬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럼 이렇게 하자면서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있을 재(在)자에, 바랄 희(希)자를 써서 재희라고 짓도록 하지. 성은... 그래 내 아내의 성인 한씨를 따서 짓고..."
그렇게 해서 한재희라는 이름이 지윤의 아이에게 내려졌고, 규찬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 아이가 아무리 희생될 아이라고 해도... 분명 자신의 삶을 살아야하고, 희생되고, 작전이 성공된 후에도 온전한 삶을 살아갈 아이인 건 분명하오. 그러니... 지윤 자네는 끝까지 이 아이의 어머니로 상황을 쭉 지켜보아야만 할 것이오."
그리고 그는 완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누군가가 채우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누굴 아버지로 세울 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건 티엔이었다.
"제가,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모두가 놀랐지만, 그는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여자가 언제 또 못된 마음을 먹고 배신할 지도 모르는 일이니, 저도 끝까지 작전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어느정도는 핑계인 듯 했지만, 분명 티엔 역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소중한 흑향을 죽인 이 여자를 용서할 순 없지만... 그래도 세계를 구해주신 저희 스승님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스승님의 손녀인 그 아이를 살려야겠습니다."
티엔은 그러더니 유나가 안고 있던 아이를 건네받아 안아들었다. 한참을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피식 웃더니 다시 아이를 지윤에게 건넸다.
"부탁이 하나 있다. 어떻게보면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그는 지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흑향에게 스승님이 지어줬던 이름, 민아라는 이름을 네가 받아주었으면 한다. 그 이름을 받아 흑향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아이가 스승님의 손녀를 살릴 때까지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라."
지윤은 그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다시 만났을 때 복수심에 불타 자신을 죽였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내가, 자신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굉장한 친절이었다.
"흑향은 이제 없지만... 민아라는 이름만은 영원히 살아있으면 하는 내 바람이다."
말이 끝나고 나서 티엔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규찬은 혹시 모르니 티엔에게도 새로운 이름이 있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재희에게 두 사람이 완전히 원래 부모였던 것처럼 각인시키고, 과거의 조작된 기억을 집어넣기 위해선 그러는 편이 좋겠다 생각한 것이었다.
"클 태(太)자에 거둘 수(收)자를 써서, 한태수라고 하는게 좋겠네. 자네의 넓은 아량에 딱 걸맞는 이름이 아닐까 싶군."
티엔은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듣고는 규찬을 보며 피식 웃었다.
'크게 거둔다라. 틀린 말은 아니군.'
* * *
다음 날, 2000년 6월 13일.
병원에 도착한 이노우에는 흐느끼고 있는 자신의 아내를 발견했다.
그가 절대 아닐것이라 믿었던 사실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저주의 여파 속에서 하필이면 거역한 운명에 대한 대가를 가장 먼저 치르게 된 건 다름아닌 그의 딸 레이였다. 어렸을 때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났던 그녀가 죽게 된 건 운명의 수정으로 인한 게 분명했다.
마치 잠든 것처럼 편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자신의 딸아이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참을 아내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난 뒤 이노우에는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병원 옥상에 마련된 흡연장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그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유나가 본 마지막 예언몽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고, 어떻게해서든 더이상의 희생을 막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에게 그순간 들었던 건 왜였을까?
자신의 슬픔도 지금 너무나 큰데도, 그는 앞으로 닥쳐올 더 큰 슬픔을 막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힘든 상황이지만, 이런 슬픔을 더 많은 사람이 겪는 건 더욱 슬픈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조용히 찾아왔다.
"아저씨."
마지막 한까치의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이노우에는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그는 순간 비추는 빛 때문에 죽은 자신의 딸이 돌아온 것으로 착각했지만, 이내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보인 것은 꽤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 영수님?!"
그건 바로 어려진 세빈의 모습을 한 유진이었다.
그날 심연의 구덩이에서 모습을 감췄던 유진은 놀랍게도 다시 이노우에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자신이 세빈이 아니라 유진임을 설명하자 이노우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아저씨."
갑작스럽게 나타난 유진은 여전히 움직임이 꽤나 불편해보였다.
아직 치료를 덜 받은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멍들어있었고, 생채기는 거의 다 낫았지만 여전히 여기저기에 잔상처가 많았다.
"저에게 레이언니의 이름을 빌려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그녀의 부탁은 등장만큼이나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오늘 세상을 떠난 자신의 딸의 이름을 빌려달라는 유진의 부탁에, 이노우에는 굉장히 화가 나면서도 그 이유가 듣고 싶어졌다.
"제가 미래에서 온 건 아실테고... 그 미래에 레이언니가 살아있었기 때문이에요."
레이가 살아있다, 그것도 32년이 지난 뒤의 미래에? 이노우에는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며 일축했지만, 유진은 뭔가 강한 확신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전 어제 여러분이 회의실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고, 오늘 아저씨를 미행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레이 언니가 죽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하지만 미래에선 레이언니가 살아있었단 말이죠?"
게다가 살아있던 레이는 어째서인지 유진에게 윤하로부터 힘을 받는 방법을 알려줬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과거로 가는 차원의 균열을 여는 장소까지 귀띔해주었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이 과거로 넘어갈 걸 알고 있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소리였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그녀에게 이렇게 은밀한 지시를 내렸단 말인가?
유진이 생각하기에 그런게 가능한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다.
자신의 원래 시간계에서 양아치놈에게 납치당해서 위기였던 순간,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구해주고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풍겼던 레이 언니. 게다가 그녀의 말과 행동... 모든것이 그녀가 단 한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헐, 총알 없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오래 살다 보면 다 알게 된답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던 그 날, 균열로 넘어가는 자신을 향해 그동안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리고 윙크하는 그녀의 모습.
확실했다.
"미래의 레이언니는... 저였어요. 그것도 너무나도 확실하게."
미래에서 유진을 과거로 돌려보내고, 유진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던 그 사람.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의 멋진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사람.
바로 과거로 돌아와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 유진이었던 것이다.
이노우에는 믿을 수 없다며 부정했지만,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유진이의 증거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믿어야만 했다.
딸을 잃었다는 슬픔과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듣게 된 놀라움이 공존하며 그의 머릿속에 혼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일단 유진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일단은 미래에서 넘어온 아이, 그녀라면 확실한 미래를 향해 자신들을 이끌어 줄 건 하나는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특수분장을 해서... 당분간은 전 레이언니인 채로 살아갈거에요. 그 뒤 절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떠나게 되면 전 본 모습으로 돌아갈 겁니다."
레이의 어머님께는 말씀드리되, 절대로 백영 내의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녀는 한참동안 이노우에의 슬픔을 함께한 뒤 자리를 떴다.
============================ 작품 후기 ============================
이로서 마지막 떡밥이 회수가 되었군요. 반전은 아마 여기서 끝이 아닐까 싶네요!
다음 편 + 에필로그까지 해서 두 편 남았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리리플
-신의탑hello님 // !
-Z박령님 // 주인공은 레이로서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은하수보며님 // 다음화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