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184화 (183/188)

184화

"저... 전.... 왜 데려 오셨나요..."

마치 지금까지 흑귀를 연기했던 지윤의 인격은 다른 인격인것마냥, 소심한 소녀로 돌아온듯한 그녀의 말투.

티엔은 그런 그녀가 가식을 떨고 있다며 비아냥거렸지만, 귀술은 일단 그녀가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니 뭐라도 물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럼,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이야기 해 주시지요."

지윤은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마치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의 과거 기억을 모두 스스로 봉인해버린 듯한 느낌을 풍기는 그녀. 하지만 봉인한다고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린 건 아닌 듯 했다.

이전의 기억들을 떠올리자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에이 씨 빌어먹을... 지가 뭘 잘했다고 자꾸 우는건지."

장 티엔은 옆에서 그런 지윤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녀 때문에 발생한 사상자가 수도 없이 많은데 지금 저렇게 우는 걸로만 무마하려 들고 있는 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폭력적으로 반응하려는 장 티엔을 가까스로 막아선 귀술이 지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봐 도지윤. 이제와서 네녀석이 모든 잘못을 느끼고 있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언제까지 죽은 사람처럼 살 텐가? 그리고 행여나 자살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 하지 않는 게 좋을걸세."

그는 현재 인고의 방에 같혀 있는 청명의 이야기를 하면서, 세빈의 이야기도 함께 했다.

"우리 영수님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있었고 그걸 어쩔 수 없이 숨겨왔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밝히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았다고. 잘못이 있으면 밝히고 스스로 죗값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한 게 그분이었고, 모두가 그 생각에 동의했지."

하지만 지윤은 지금 어떤가. 자신에게 드는 죄책감에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피하려고 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것 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넌 어떤가. 네녀석이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그럼 너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란말이다. 죽음이 아닌, 평생이 걸리는 속죄와 봉사를 하게 되더라도, 그래도 네녀석은 그래야만 한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지윤은, 귀술의 말에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장 티엔이 먼저 들어가겠다면서 꼴보기 싫다는 말과 함께 광백 안쪽으로 사라졌고, 그를 보내고 나서 귀술은 한참동안이나 지윤의 곁에서 그녀에게 뉘우치라는 말을 계속했다.

십분 쯤 뒤 간신히 지윤은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그쳤다.

하지만 죽어있는듯한 그녀의 표정은 여전했다.

"내가... 내가 어떤 방법으로 내 죄를 속죄할 수가 있죠? 죽음 말고 어떤 방법으로 분노한 사람들의... 그들의 이 고통과 슬픔을 대신해줄 수 있느냔 말이에요..."

어떠한 방법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귀술은 강하게 따귀를 때렸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청명 님처럼 인고의 방에서 네가 죽인 생명만큼 반성의 시간을 갖던가, 아니면 영수님처럼 누군가의 잘못을 고쳐잡으면 된다고!"

지윤은 뺨을 맞았지만 다시 귀술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귀술을 보고 있을 땐, 그녀의 눈동자에 조금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알겠나? 이 세상엔 잘못이 넘쳐난다. 네가 그 중에 고쳐잡을 수 있는 잘못 역시 많을테고."

분노에 가득차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지윤을 바라보면서, 귀술은 소리쳤다.

"당장 나만 해도 네 녀석에 의한 피해자... 가까운 곳에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네녀석의 도움이 아니야. 어서 심연에서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다오."

엄청난 분노를 절제하며, 그는 지윤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윤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더니 뭔가 결심이 섰는지, 마침내 마음을 잡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둘중 한 사람은... 차원의 균열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반대쪽 구덩이 가장자리에 있었는데 제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사라져있었습니다."

*

광백 안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유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지만 희생자가 적은 건 아니었다.

티엔에게 심연의 상황을 전해들은 규찬은 자신의 아내가 또다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심연은 완전히 대파되었고... 우리 도시도 거의 생기를 잃고 말았지. 생존자는 처음에 있던 사람의 1/3정도가 아닐까 싶군..."

그리고 2/3 이상의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규찬을 괴롭게 했다. 가능만 하다면 자신의 생명을 버리더라도 그들의 목숨을 지켜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통한스러웠다.

"혹시 염원력은... 남아 있습니까?"

티엔의 질문에 규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주로 인해 힘을 잃었다고 말했다. 특히 자신도 잠깐이었지만 저주에 노출된 탓에 대부분의 힘을 잃은 상태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같이 다니던 아가씨는 어찌 되었지?"

그리고 규찬이 문득 흑향의 부재를 깨닫고 그에게 묻자, 장 티엔은 곧바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심한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옮겼던 흑향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던 것일까?

"... 흑향은.... 전사했습니다."

그 말에 앉아서 쉬고 있던 이노우에와 혼다 역시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규찬은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하고 얼마 안되어... 저주가 터져나와서 그녀를 휘감더군요... 저 역시 저주에 휩싸여 정신을 잃었는데... 눈 뜨고 보니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너무나 서글픈 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는데... 절대 이 전란 속에서 그녀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그처럼 의지가 강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건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지만, 흑향을 잃은 슬픔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그에게 눈물은 아주 값싼 것이었다.

규찬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내가 행방불명된 지금 순간, 어짜피 자신도 거의 같은 처지였기에 그는 티엔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두 번째 아내의 행방불명.

규찬은 어떤 생각을 하며 지금 시간을 버텨내고 있는 걸까?

*

그들이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변의 부상자와 사망자들을 옮기는 걸 도와주고 있는데, 입구쪽에서 귀술이 지윤을 데리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규찬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갔고, 귀술은 규찬에게 곧바로 절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총수님. 영수님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절한 채 자신을 벌해달라고 말하는 귀술에게 규찬은 괜찮다고 말하며 그를 일으켜세웠다. 그는 옆에 함께 온 지윤을 보더니 곧바로 누군지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그때.. 그때 그 아이로구나. 그 일 이후 행방불명되어 매우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살아있어서 너무나 다행이구나..."

그리고 지윤은 자신이 흑귀라는 걸 못 알아본 채 오로지 과거의 잘못에 대한 기억만을 떠올리며 자신을 대하는 규찬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자신은 오로지 증오로만 그를 대해왔었는데, 그는 일평생 자신에게 미안함을 가지면서 살아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입구로 들어오면서 생각한 자신의 내면 속에서 무언가가 바뀌었음을 느끼고 있었고, 절대로 자신을 숨기지 않겠다고 다짐한 듯, 규찬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사정을 들은 규찬은 굉장히 괴로워하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사정을 안타까워 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도, 규찬은 그녀에게 단 한가지만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것은 입구에서 귀술이 그녀에게 말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흑귀, 아니 지윤이 네가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였더라도... 죽음으로 갚을 생각은 말거라. 너에겐 네가 해야할 일이 있을 거고, 넌 그 일을 마칠 때까지 절대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책임감, 그리고 죄책감, 그 두가지를 평생 끌고 가라는 규찬의 말.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돼. 어떻게든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노력하는게... 그게 진짜 사람이다."

지윤은 참아왔던 눈물을 다시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평생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며 증오해왔던 그로부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을 들으니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찌하여 나를 용서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 생각과 함께 그녀는 죽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걸 느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은 죽어선 안 된다.

어떻게든 그들이 생각하는... 그 대가, 업보를 치러야만 한다.

죽을때까지 자신이 가진 업보를 얼마나 고쳐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할 수 있는 만큼, 가능한한 모든 자신의 업보를 해결해야만 했다.

"아버님!!"

규찬이 바닥에 주저앉아 뉘우치고 있는 지윤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는데, 멀리서 유나가 뛰어왔다.

그녀는 갈라진 온 몸으로 인해 여기저기 피투성이였고, 팔은 완전히 피부가 벗겨진 탓에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이게 마지막 예언몽이 아닐까 싶어요...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끊기는 꿈이 아닌... 마치 흩어져가듯 부스러지는 꿈이었습니다."

어서 병원에 가라는 규찬의 말에도 그녀는 사태를 더 지켜보고 움직이겠다고 이야기했고, 마침내 그녀가 원하던 예지몽을 아주 힘겹게 받아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예언몽 역시도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니더군요. 저희에겐 아직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그녀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히 그녀에게 있어 굉장히 슬픈 일이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했고, 규찬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고 어서 이야기해보라고 말했다.

"제 딸... 윤하 때문이에요 아버님. 그리고 현재 여기 살아계시는 모든 분들의 운명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말,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능력자들의 운명에 대한 유나의 마지막 예언몽.

그것은 필시 저주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 그들에게 남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작품 후기 ============================

부산에서 보내드립니다... 모바일이라 오타가 있을수도 있으니 양해바랍니다 ㅠ.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 선추코 감사합니다.

-리리플

신의탑hello님 // ㅠㅠ

바라미84님 // 죄송해서 어쩌죠.. 약간은 새드 엔딩이라서. 이미 미래에서 유진이 누구였는지 눈치채셨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