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7. 종식>
1987년 가을, 인천 연안부두에서 세빈이 사건을 일으킨 지 약 3달 뒤의 어느 날.
"이번엔... 그 아이가 마음을 열어 줄까요..?"
소율은 매우 긴장된 표정으로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함께 걷던 이는 앞만 바라보며 걷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율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걱정 말라며 웃어보였다.
옆에 있던 사람의 정체는 다름아닌 상백.
"괜찮아, 녀석도 분명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일거야."
두 사람은 지금 세빈으로 인해 고아가 된 도경현의 딸을 돌보러 가는 중이었다.
무려 3달에 가깝게 지극정성으로 그를 돌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오로지 주는 밥을 떠먹고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살아있지만 죽은 인간인 채로 살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지윤아, 안에 있어? 아저씨랑 소율 언니 왔다."
규찬은 백영의 일과 스스로의 반성을 위해 폐관수련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첫 한달간은 규찬도 함께 지윤을 찾아왔지만, 한달동안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윤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규찬은 폐관수련의 길을 택했다.
반성, 그리고 속죄를 위해.
상백이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핏기가 없고 죽은 눈을 하고있는 소녀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대문과 현관문을 연 채 바로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 여전하네요..."
주말을 보내고 이틀만에 돌아왔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달라져있으면 했지만, 전혀 변함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소율은 눈물을 글썽였다.
상백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부터 나왔지만, 다행히도 그는 걱정하는 와중에도 지윤을 위해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잘못됨을 알고 규찬이 직접 마련해준 집은 혼자 살기엔 굉장히 큰 편이었다. 집의 크기가 커서인지 소녀 혼자 산다는 게 더욱 적막감을 주었다.
2층을 청소하고 1층까지 청소를 마친 상백이 소율이 밥을 짓는동안 지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지윤아, 요샌 뭐하고 지내니?"
그러나 그녀에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백이 살던 능력자들의 세계에서는 분명 100일간 염원의 힘으로 기도하면 그 효력이 발휘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백영이기를 그만두면서 그의 능력도 사라진 것인지...
오늘이 그가 지윤이 기운내기를 바란 지 딱 100일 째 되는 날이었지만, 여전히 지윤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말 없이 함께 식사를 한 뒤, 상백과 소율은 저녁까지 티비를 보는 지윤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려고 준비를 하는데, 그 날의 지윤은 왠지모르게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저기."
현관으로 걸어가려는 상백의 옷깃을 붙잡고 말을 꺼낸 지윤. 그 광경에 두 사람은 모두 놀라서 지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몇달동안 묻는 말에만 대답할 정도였고, 정말 필요한 말 아니면 말 건 적이 없는 그녀가 '저기'라고 뭔가 부탁을 하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었다.
상백과 소율은 뭐든지 말해보라면서 그녀를 독려했다.
"그가 오고있어요. 우리 아버지를 내쫓았던 그 사람의 부하가 이쪽으로..."
그리고 그들은 그 말에 누가 오고있는 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유진의 부모님을 흑영으로부터 내쫓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기초 원인을 제공한 사람, 흑귀의 사람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대체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잠시 귀를 의심했지만, 이내 그녀가 혹시 예지몽을 쓰는 것이 아닐까 하고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해 지윤에게 되물었다.
"혹시 그거... 예지몽인거니?"
지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멍하니 현관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상백과 소율에게 말했다.
"숨어있으세요. 그는 분명 절 잡아가려고 할 거에요. 그가 절 잡아가려고 하면 나와서 절 구해줘요."
그녀가 말한 불청객은 1명. 상백과 소율의 선에서 어떻게든 처리 가능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윤이 보고 있는 예지몽에서 그들은 확실하게 그를 처리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절대 볼 수 없었던 생기가 도는 지윤의 표정, 그리고 확신에 가득찬 그녀의 표정.
상백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염원이 마침내 힘을 발휘했다고 믿어도 될 정도의 지윤의 변화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침입자는 강제로 열쇠를 열기 시작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어두운 거실로 두 명의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거실로 들어와서 가운데에 떡하니 서 있는 지윤을 보고는 나즈막히 이야기했다.
"역시나 엄청난 예언력이군...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이군 꼬마야."
남자는 후드를 걷고 지윤에게 다가갔다. 위험한 사람인 듯 했지만 지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고, 상백과 소율은 숨을 죽인 채 지윤이 신호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남자가 무장을 내려놓은 채 지윤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고 지윤은 그때를 노렸다는 듯 자기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눈을 찔렀다.
"크악!!"
동시에 상백과 소율이 달려나와 남자를 기절시켰고, 남자가 기절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두 사람은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지윤은 곧바로 소율에게 이야기했다.
"언니는 곧장 돌아가세요. 전 상백 아저씨와 마저 할 일이 있으니까요."
소율은 왜냐며 자신도 함께 있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지윤은 침입자가 들고 온 검을 집어들더니 그의 심장을 향해 찌르는 시늉을 했다.
"난 이 사람을 죽일거에요. 심한 꼴 보고 싶지 않으시면 어서 가세요. 그리고... 다신 찾아오지 않으셔도 되요. 오늘부로 전 이곳을 떠날거니까요."
지윤의 말에 소율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냥 길 수 없었는지 다시 다가와 지윤을 한번 꼭 안아주고는 자리를 떠나며 말했다.
"나중에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꼭 불러주렴. 우린 널 돕기 위해 왔고, 네가 어떤 생각일지라도 따를 테니까."
소율은 분명 그렇게 말하며 지윤을 떠난 뒤 3년만에 별동대 임무로 흑영에 오게 되었고, 세뇌당해서 사령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9년 뒤 흑귀의 자리를 꿰찬 지윤은 사령이 소율이라는 걸 알아채고, 그 뒤 그녀를 굉장히 가까이 두며 챙겼다. 강한 세뇌가 걸려 쉽게 풀리지 않는 그녀를 돌봤던 이유, 그것은 과거 고통스러웠던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유일한 두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율이 떠나고 나서 지윤은 곧바로 기절한 남자의 겉옷을 모두 벗긴 뒤 그의 숨통을 끊었다. 그가 입고 온 옷을 상백에게 건네주며 지윤은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 도와줄 수 있으신가요?"
옷가지를 받아든 상백은 잠깐 생각하는 듯 했으나, 몇 달동안 지윤과 함께 해왔고 이미 백영이기를 포기한 그로써는 지윤의 부탁 따위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물론이지. 말만 해라. 나도 소율이와 같은 생각이다."
지윤이 시체를 수습하는동안, 상백은 그녀가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고 후드를 눌러쓴 채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인지, 지윤은 엄청난 솜씨로 시채를 조각내 여행가방에 담고 있었다.
그 잔혹한 모습에 상백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지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마치 뭔가 궁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
상백은 두려우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바가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거 쓰세요."
거실의 핏자국을 모두 없애고 난 뒤, 지윤은 방 안에 숨겨두었던 무언가를 꺼내 상백에게 건넷다.
특수분장 가면이었다. 분명 조금전에 집에 쳐들어와 죽음을 맞이한 그 사람의 것...
"흑영의 5장로에요. 이제부터 아저씨는 상백이라는 이름을 버리세요. 아저씨는 이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5장로로써 살아주셔야 해요, 할 수 있겠어요?"
상백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가면을 뒤집어썼다. 처음 느껴보는 이 불편한 감촉과 답답함이 그를 옥죄어 왔지만, 이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이런 가면을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이것도 다 예지몽을 통해서 어딘가에서 얻어왔던 것인지, 묻고싶은 것이 산더미같았지만 상백은 이어지는 지윤의 말에 일단 모든 의구심을 접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아저씨는 5장로가 되셔서, 저를 흑영의 제 1도시인 심연으로 데려가주시면 되요. 그리고 전 곧바로 어딘가로 격리될 거에요.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건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새해의 첫 날 밤. 그때까지 아무리 묻고 싶은게 많고 의심되는 일이 있어도 절 믿어주시고 완전히 5장로가 되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지윤이 건네준 여행가방을 끌고 현관을 나선 상백은 지윤이 가는 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는데도 지치지도 않는지, 지윤은 한 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산 깊은 곳에 여행 가방을 숨겼다.
"지금부터 30분만 더 걸어가면 심연이 나와요. 우린 곧장 흑귀의 처소로 갈 것이고, 그 이후는 작별이에요."
지윤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 상백에게 건넸다. 이것저것 중요사항이 적힌 두 장의 종이를 받아든 상백은 지윤의 예지몽의 힘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디 13년 뒤, 무사히 만날 수 있길 바라요, 아저씨."
============================ 작품 후기 ============================
광복절이네요~ 오늘하루는 대한독립을 위해 힘쓰신 독립투사들을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좋은 하루 보내시고 선추코 감사합니다 :>
-리리플
-은하수보며님 // 저주를 막을 시간이죠. 과연 어떻게 막으려나...
-신의탑hello님 // 네 여자였어요. 그간 많은 사람들이 성별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예언력을 쓴다는 점에서 이미 여자라는 힌트가 여러번 있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