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크윽!"
흑귀는 어두운 복도를 뛰어가고 있었고, 뛰어가던 도중 자신의 예지몽과 누군가가 이어졌음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예지몽과 이어질 만한 사람이 세빈 한 사람 뿐이라는 걸 곧 깨달은 흑귀는 곧바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그녀가 보는 미래를 비틀어버렸다.
그녀가 예지몽을 쓴 이장 자신이 현재 향하고 있는 저주진이 있는 곳에는 무조건 오게 될 테고, 오는 이상은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궁지에 몰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흑귀 역시 스스로 단련을 열심히 해서 굉장히 전투에 익숙하긴 하지만, 예언력의 차이로 인해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게 컸다.
그는 그렇기때문에 계속해서 세뇌병사들을 이용해 백영 사람들을 따로따로 떨어트려 놓으려고 했고, 작전은 제대로 먹혀들어 자신을 따라오는 이는 세빈 한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대일의 상황이 아닌 흑귀가 원하던 1:1 상황의 완성. 이는 그가 바라마지않던 저주의 실현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한참동안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난 뒤에 비밀문이 그의 눈 앞에 나타났고,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구석쪽으로 뻗어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 손목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걸 보니 광백에서 유진에게 맞은 마지막 타격이 엄청났긴 했던 모양이다.
[쿠르릉]
그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예상치 못한 광경과 마주하고 만다.
"드디어 오셨구만 흑귀. 정말 한참이나 기다렸다고."
계속해서 세빈과 그 일행의 움직임을 확인하기 위해 그쪽에만 예지몽을 집중하고 있던 흑귀는 예상하지 못했던 귀술의 등장에 놀라고 말았다.
한쪽에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5장로의 꼴을 보아하니, 그를 따라 이 저주진이 있는 공간으로 몰래 들어와 그를 쓰러트린 게 분명했다.
"아니지... 흑귀가 아니라 그 정체가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다고. 심지어 그 정체는 여자였고 말야..."
귀술은 검을 제대로 고쳐 잡은 뒤 5장로가 제대로 기절해 있나 다시 몇번 툭툭 발로 건드렸다.
"강한 예언력을 가진, 우리가 알지 못하던 사람. 도대체 그 정체는 누구인가?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의 연속이던 미궁에 빠져있던 그 해답... 이제 좀 알것만 같군."
그는 그 말을 마치고 나서 가면이 벗겨진 5장로의 머리를 잡아 들어올려 흑귀에게 보여주었다. 가면이 없어져 맨 얼굴이 드러나있는 5장로의 모습을 확인한 흑귀는 굉장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숨겨왔단,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려는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그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깜짝 놀랐지 뭐야. 1987년, 흑영의 암살자를 모두 소탕하고 진위님을 잃었던 그 때. 백영이기를 포기하고 민간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던, 바로 그 상백님께서 이 곳에 계셨다니? 정말 놀랐지."
상백! 암살자 소탕 당시 규찬의 명령에 의해 억지로 다친 민간인을 저버리고 세빈을 쫓아야만 했던 바로 그 사람이 5장로였던 것이다.
그때 백영이기를 포기했던 상백이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흑영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귀술은 너무나도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상백의 모습을 확인함으로써, 그동안 미궁 속에만 빠져있던 바꿔치기된 흑귀의 정체를, 강대한 예언력을 소유한 여인의 정체를 마침내 눈치채게 되었던 것이다.
"단순히 백영, 그것도 총수님과 영수님을 직접 죽이고자 할 정도로 두 분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 그런데 더 알아보니 그걸 뛰어넘어 흑영도 증오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대립의 원인이 되었던 꿈꾸는 힘을 준 '그 분'마저 증오하고 있던 사람."
그리고 5장로의 얼굴을 다시 내려놓은 귀술을 향해, 흑귀는 더이상의 그의 말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굴러다니던 5장로의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래, 내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단.. 역시 본인 입으로 이야기하는게 낫겠지!!"
[까앙!!]
하지만 완전히 예언력을 다루는 흑귀와 귀술의 대결은, 절대로 귀술에게 유리할 리 없었다. 그가 받아낸다 한들 흑귀는 귀술이 예상한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그의 약점을 파고들었고, 몇 번의 합이 지나가기도 전에 귀술은 몸의 이곳저곳에 베인 상처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털썩]
내리 두번을 연속으로 베이고 나서 귀술은 팔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엄청난 힘의차이... 성인 남성과 여성이 싸우는데도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예언의 힘의 차이.
귀술은 성급하게 전투에 돌입한 것을 후회하며 다시 어떻게든 몸을 가다듬었다.
"크흐... 그래, 하지만 네가 아무리 날 베어 여기서 죽인다고 해도... 너희는 저주를 발동시킬 수 없을 것이다... 예언의 힘 따위 없어도, 곧 이곳에 영수님과 영수님을 닮은 아이가 나타날-"
[퍽!!]
흑귀는 귀술의 얼굴을 거세게 걷어찼다. 얻어맞은 귀술은 그대로 억 소리와 함께 뒤로 다시 넘어졌고,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며 검을 그의 목에 가져다댔다.
"거기까지 알아낸 건 칭찬해주겠다만... 어짜피 곧 죽을 목숨. 저주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는 것보다 내 손에 죽게 된 걸 축복으로 알거라!!"
하지만 귀술은 그렇게 쉽게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콰아앙!]
갑자기 뭔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입구에 있던 비밀문이 박살이 났고, 엄청난 연기와 먼지가 순간 실내를 가득 채웠다.
폭발과 함께 날아든 바람으로 인해 횃불이 꺼지기 직전까지 흔들리며 실내가 잠시 어두워졌고, 그 틈을 타서 귀술은 몸을 굴려 입구쪽으로 움직였다.
마치 연기가 걷힌 입구에 등장한 세빈의 모습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그는 자연스럽게 세빈의 옆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괜찮느냐 귀술아!!"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귀술의 상태를 확인한 세빈은 다행히 그가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좀더 입구쪽으로 부축해 이동시킨 뒤 연기가 걷힌 공간 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영수님... 조심하십시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던 귀술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반드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은 세빈이 너무나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먼저 심연으로 가서, 5장로와 저주진을 찾거라. 그럼 내가 어떻게든 뒤따라가겠다.」
당연한 믿음이었다. 아무리 과거가 복잡하다 한들, 세빈은 그에게 읻어 백영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마음의 중심점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흑귀, 얼마나 더 애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려고 하느냐?"
메카수트에서 흘러나오는 기류가 세빈의 주변의 흙먼지를 날리고 있었고, 연기가 걷힌 방의 중앙에는 흑귀가 세빈 쪽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시끄러워. 네년은 1월 그날 진즉에 죽었어야 할 운명이거늘...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해!!"
흑귀가 본연의 목소리인 여성의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엄청나게 증오에 찬 그녀의 외침.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세빈을 증오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올해가 밝음과 동시에 흑귀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내 계획은 분명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지. 하지만 1월, 네년이 장 티엔과 흑향에 의해 죽었어야 할 바로 그날 죽지 않고 행방불명되면서 내 계획은 모두 꼬이기 시작했어."
세빈을 노려보며 흑귀는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원래는 네년을 네 딸의 손으로 죽인 뒤, 장 티엔과 흑향을 일부러 백영에 정보를 흘린 뒤 포위당해 죽게 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시공의 균열이 네년과 두 녀석을 알수없는 공간으로 데려가버렸고, 그로인해 계획은 틀어졌다..!"
불타오르는 흑귀의 눈을 바라보며 세빈 역시 전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응수했다. 두 사람의 사이엔 불꽃이 튀는 것처럼 격렬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서규찬을 죽인 뒤 남아있는 능력자들을 모두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그 일로 인해 난 친히 죽여주는 것을 포기했어. 어짜피 죽여야 할 거라면, 이 세계의 인간들도 모두 죽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던 난 '순응의 저주'라는 기막힌 방법을 쓰기로 했지..."
마침내 두 사람의 사이 거리가 2m정도 남짓 되었을 때, 흑귀는 걸음을 멈췄다.
"내가 증오하게 된 대상, 그 대상이 된 능력자들을 만들어 낸 것은 결국 '그 분'이라 불리우는 멍청한 신 때문... 그 자식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난 모든 생명을 앗아가도 좋다고 생각했어. 얼마나 멋져? 자기가 잘 되라고 능력을 주고 갔던 행성이 완전히 멸망해버린 그 모습... 그는 스스로 자신이 벌인 일이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해...!!"
세빈은 긴장했다. 과연 그녀가 이곳에 오면서 봤던, 흑귀와 겹쳐보였던 바로 그 예지몽이... 자신에게 진정한 미래를 가르쳐 줄 것인지, 아니면 거짓을 알려줄 것인지.
이젠 모든걸 운명에 맡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초석이 될 저주의 발동을 절대 막게 둘 순 없지... 아까도 말했지만 한세빈 너는 절대로 날 이길 수 없어. 네 능력의 한계가 있는 이상-"
[까앙!!]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흑귀가 먼저 세빈을 공격했고. 세빈은 그에 메카수트를 장착한 팔로 막아냄으로써 응수했다.
"-넌 여기서 죽게 될 거다. 한세빈!!"
[카앙! 캉!!]
두번, 세번 연속해서 흑귀의 칼이 정확히 세빈의 약점을 향해 날아들었고 세빈은 메카수트의 빠른 움직임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유진이 해왔던 것처럼 그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기계를 조작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오랜 실전 경험들이 쉽게 익숙해지는 걸 도와주고 있었고, 무엇보다 확실하게 옳은 미래로 이끌어주고 있다고 그녀가 믿고 있는 바로 그 힘이 그녀를 움직이고 있었다.
계속되는 공격을 세빈은 막아내면서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그녀는 흑귀가 예상되는 반응을 보며 공격하는것처럼, 점점 막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의 공격을 막아낸 뒤 예상지점으로 추가타를 날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밀릴 거라고 생각했던 세빈이 역으로 공격해오기 시작하자 흑귀 역시 적잖이 당황했지만, 지금까지 계속 우위를 점해왔으므로 흑귀는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균형은 조금씩 깨지고 있었고, 완전히 흑귀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위는 점차 세빈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빈이 아까전에 유진에게 맞아 흑귀의 약점이나 다름없는 복부에 다시한번 타격을 가하는 순간, 전세는 그대로 역전되어버렸다.
"아니."
동시에 세빈의 머릿속에 확실한 예지몽이 하나 날아와 꽂히면서, 그녀는 메카수트에서 울려퍼지는 비프음을 들으며 확신했다.
이 싸움, 이겼다.
"난 죽지 않아, 오히려 잡히는건 네녀석이 될 거다!!"
세빈이 그 순간 흑귀의 공격 사이를 파고들어 그를 잡아챘고, 엄청난 메카수트의 힘을 이용해 그의 몸을 들어왔던 입구의 반대편으로 내던졌다. 흑귀는 예상치 못한 세빈의 접근에 속수무책으로 잡혔고, 오랜시간 허공에 떠 있게 되었다.
[콰앙!!]
그와 동시에 반대쪽 벽을 뚫고 누군가가 거칠게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흑향과 헤어지기 직전 그녀가 알려준 예지몽을 따라 세빈을 따라 온 유진이었다.
예지몽을 통해 세빈을 따라 심연 안에 들어왔고, 그녀의 메카수트와 세빈의 연계기동 수트가 서로 내고 있는 신호를 통해 세빈이 있는 장소를 찾아냈던 것이었다.
"이야아아!"
"어.. 어떻게!! 살아있었-"
[퍽!]
벽을 뚫고 날아온 유진이 몸이 공중에 떠서 가누지 못하던 흑귀의 얼굴을 정확히 가격했고, 그의 얼굴을 덮고 있던 가면이 찢어짐과 동시에 흑귀는 바닥에 내팽겨쳐졌다.
"끝났군..."
귀술은 고개를 돌려 안쪽을 보며, 쓰러진 흑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찢어진 가면 뒤로, 연약해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드러나보이고 있었다.
"흑영 사령탑 도씨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도경현의 숨겨진 딸... 모두가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던 바로 그녀..."
궁시렁대면서 안 쪽을 본 그는, 쓰러진 상태로 유진에게 옮겨지고 있는 흑귀의 드러난 얼굴을 보고 '역시나'라는 미소를 지었다.
"도지윤."
<6. 진실> END
============================ 작품 후기 ============================
6장 끝! 드디어 종장입니다.
이야기는 드디어 막바지네요 ㅎㅎ.
여기까지 따라와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선추코 감사합니다, 즐감하세요~!
-리리플
-신의탑hello님 // 하지만 아직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저주가 남아있지요.
-은하수보며님 // 갱신되고 갱신되어, 누가 가장 강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