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
규찬은 갑작스러운 일에 자신도모르게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리 흑귀라도 자신이 쫓기는 상황에서 역으로 백영으로 쳐들어올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대놓고 정면으로 쳐들어 올 줄이야.
"일단 수비진을 최대한 뒤로 빼라! 동원 가능한 병력을 모두 광장쪽에 결집시키고!!"
게다가 하필이면 광백의 대비가 지금은 그렇게 강한 시점도 아니었다.
최고의 정예병들은 대부분 흑귀를 잡기 위해 외부로 나가 있는 상황이었고, 이쪽에 이노우에와 혼다가 있었지만 혼다는 부상당한 상태였다.
결국 규찬이 정면에 나서서 그들을 상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게다가 정면쪽 전선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로 보아하니 흑귀는 세뇌한 흑영의 병사들을 끌고오고 있었다.
세뇌병사, 보통 병사의 1.5배 이상의 힘을 내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버서크 상태의 병사들.
분명 이대로 큰 전투가 벌어졌다간 아군의 희생이 적지 않을 게 뻔했다.
규찬은 서둘러 입구를 둘러싼 형태로 말발굽 모양의 진을 짜고 그 한가운데 자신이 자리한 뒤 좌우 날개쪽에 이노우에와 혼다를 보냈다.
모두가 긴장한 상태로 전투태세를 마치고 기다리니 흑귀가 제일 앞에서 당당하게 걸어들어왔고, 그 뒤를 많은 세뇌병사들이 함께 따라들어오고 있었다.
이노우에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화살을 쏘았으나 흑귀에게 날아가던 화살은 바로 옆에 있던 세뇌병사가 손으로 붙잡아버렸다.
"워워, 환영을 이렇게 거칠게 하면 쓰나. 이야기할 것도 많은데 말이지."
흑귀는 말발굽 모양으로 쳐진 백영 병사들의 진 가운데에 떡하니 들어와 서서는 자신의 10m정도 앞에 자신을 마주하고 선 규찬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들리나 서규찬."
규찬은 딱히 그의 대화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되려 그가 흑귀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일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말해라.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흑귀."
흑귀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규찬에게 물었다.
"그건 이제 자네도 슬슬 알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렇게 많은 증거들을 제시해줬는데 아직까지 모른단 말인가!"
비웃는듯한 그의 말투가 굉장히 거슬렸지만 규찬은 침착하게 그의 다음 말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저주의 정체가 뭔지도 이미 알아 챘을텐데 여전히 모르다니..."
"...? 그게 무슨-"
그리고 규찬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규찬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저주의 실체를 알아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래그래 바로 그 표정이지. 흑향에게 저주에 대한 기억을 일부러 심어놓은 것은 바로 나다... 아 물론 그녀가 말한 과거에 관련된 책을 봤다는 말은 거짓말은 아니야. 다만 그녀의 기억이 그렇게 또렸했던 이유는, 말 안해도 알겠지?"
그랬다, 그렇게 어렸을 적 일에다 한동안 세뇌까지 당해 있었는데 그렇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을 리가 없는데. 저주에 대한 사실은 분명 흑귀가 흑향이 세뇌당해 있을 때 일부러 집어넣은 기억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어떻게...? 설마 과거부터 지금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그녀가 미래로 가기 전에 미리 기억을 심어뒀단 말인가?
무려 6개월간의 미래를 미리 예측할 정도로 흑귀의 예언력이 그렇게나 강했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군. 하지만 사실이다. 한세빈이 아무리 예언력이 강한다 한들 나에 비하면 새발의 피... 게다가 난 그녀가 넘지 못한 능력의 한계를 진즉에 넘은 지 오래다."
그리고 장 티엔이 말했던, 움직이면서 능력을 쓸 수 있는 경지. 흑귀는 이미 진즉에 그 경지를 넘어섰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예언이 가능했고, 바로 앞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 절대로 근접전해서 패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이렇게 내가 직접 찾아온 건, 그동안 그토록 염원하던 때가 드디어 몇시간 안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성스러운 시간이 되기 전에 즐거운 파티를 벌이고 싶어 찾아온 거다."
그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알아채다니, 흑귀의 예언력이 너무나 강대해 그를 따라갈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를 막아야 한단 말인가.
온 몸에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외면하면서 규찬은 흑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 세뇌병사들은 그동안 흑영의 병사로 일하던 녀석들이야. 세뇌당한 장 티엔이 훌륭하게 인간병기로 잘 키워 놨더군.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다."
흑귀는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갑작스럽게 말투를 바꿨다. 그와 동시에 흑귀의 목소리가 노년의 할아버지 목소리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아 그리고 이제 이 거지같은 노인네의 말투를 쓸 필요도 없겠네요... 후후. 정말 그동안 어찌나 역겨웠는지... 힘들어 죽는 줄 알았죠."
규찬이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며 흑귀는 깔깔댔다.
"좋아 좋아요. 이미 많은 것을 알았지만 결론엔 도달하지 못했다니... 거참 안타까워 죽겠네. 뭐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제 끝인걸, 저주가 닥쳐오기도 전에 서규찬 당신부터 먼저 죽여드리지요."
허리춤에서 검 하나를 꺼내든 그는 하늘높이 검을 치켜들더니 병사들에게 외쳤다.
"공격!!"
그와 동시에 병사들의 머리 위를 밟고 오른 그는 선두에 있던 규찬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세뇌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백영의 병사들을 향해 날카로운 칼과 창을 들이대기 시작했고, 결국 어떻게해서든 피하고 싶었던 전투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깡!]
"아참 그리고 규찬, 내가 한가지 말 안한게 있어요."
엄청난 속도로 규찬을 몰아붙이면서 흑귀가 또다시 말했다. 그녀의 칼을 받아내는것만으로 버거웠던 그는 간신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알고 계시는지 아니면 잊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꿈꾸는 힘은 우리 흑영과 백영 것만이 아니라는 것. 기억하시나요?"
[캉! 카앙!]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빠른 속도로 흑귀가 검으로 막고 있던 규찬을 발로 걷어찬 뒤 달려들었다. 규찬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틀어 날아오는 검을 피했지만 계속해서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는 흑귀를 상대하기란 너무나 힘들었다.
"'그 분'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모든 사람에게 꿈꾸는 힘을 내렸습니다. 다만 그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었을 뿐..."
[카앙! 키-기긱!]
"그리고 그 강한자와 약한자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 분'의 의도와 다르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죠... 힘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 정복하는 자와 정복하지 못한 자! 결국 일반 사람들은 대부분 힘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약한자가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강한자들만이 살아남은 능력자의 세계로 인해, 그리고 강한자들끼리의 존속보전을 통한 대물림으로 인해서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버린 꿈꾸는 힘은 일반인들에겐 이제 없는 일이나 다름없는 힘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도 아직 조금씩은 다 남아 있어요, 바로 꿈꾸는 힘이 말이에요!"
[캉!]
힘겹게 피했지만 규찬은 결국 왼팔을 살짝 베이고 말았다. 다시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의 왼팔의 상처로 인해 검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자아 그렇다면 질문... 순응의 저주가 일반인들에게 퍼져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흑귀의 그 말로 인해 규찬은 머릿속이 새햐얘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 회의실에서 저주에 대한 상의를 할 때 생각날 듯 말듯 자신을 괴롭혔던 바로 그 사실.
순응의 저주가 멈춰지지 않을 경우 이 세상이 파멸하게 된다는 사실!
"이 자식!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일 셈이냐!! 네녀석의 속셈은 단순한 능력자들의 소멸이 아니었던 거냐?!"
거칠게 달려드는 규찬이었지만, 왼팔의 부상으로 인해 그는 제대로 흑귀에게 공격하지 못했다. 결국 살짝 어긋난 공격으로 인해 그는 회피하는 흑귀를 스쳐지나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당연하지요, 이 저주를 쓴 건 단순히 능력자만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요..."
쓰러진 규찬 앞으로 깔깔 웃으며 다가오는 흑귀를 보며 규찬은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50이 넘은 그의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고, 반면 그보다 훨씬 젊은 탓인지 흑귀는 그 빠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이 없었다.
"어째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거냐 그럼!!"
규찬의 목에 칼을 들이댄 그녀는 굉장한 기세로 웃기 시작했다.
"이 나라를, 아니 온 인류를... 나아가 이 행성 자체를 파멸시킬겁니다. 이건 우리에게 쓸데 없는 힘을 내린 '그 분'에게 보내는 나의 메시지나 다름 없으니까요... 하하하하하하!!"
웃던 그녀는 웃음을 멈춘 뒤 기세좋게 칼을 들어올렸다. 더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규찬은 이대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한탄과 함께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그러나 바로 그 때
[타앙!]
엄청난 기세로 저격탄이 날아와 흑귀가 들고 있던 검을 맞춰 날려버렸고, 흑귀는 놀라 총알이 날아온 쪽을 주시했다.
"이런 빌어먹을... 빨리도 돌아왔군."
그녀가 바라본 곳에는 광백의 입구 쪽에서 그녀를 조준하고 있는 흑향과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보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아침엔 쌀쌀했는데...
와 낮엔 진짜 덥네요 ㅠㅠ
선추코 감사합니다.
-리리플
신의탑hello님 // ㅋㅋㅋ 그러게요. 똑똑한 것들...
은하수보며님 // 흑귀가 광백에 쳐들어오는 미래를 봤습니다. 오늘 연재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