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 *
다음 날, 심연 중앙 광장의 지하.
"자, 준비는 끝났다. 이거 받아라."
5장로는 여전히 걸음이 힘들어보였지만 그래도 저번보다는 좀 나아보였다. 그는 흑귀에게 뭔가를 건네주고는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저주의 진이 그려진 방 안의 문을 닫고 나왔다.
"드디어 이틀 앞으로 다가왔군요."
손에 든 스위치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흑귀는 5장로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이제 모든게 끝나 후련하다는 듯한 뉘앙스가 가득했다.
"예지몽에서 봤듯이 그래도 끝까지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5장로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원하는 목표에 다 왔으니 지금이야말로 더욱 조심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흑귀는 피식 하고 웃더니 걸어가던 와중 눈을 감고 5장로에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5장로님."
조용히 5장로의 귀에다 흑귀가 뭔가를 속삭였고, 그 말을 들은 5장로의 안색이 변했다. 분명 뭔가 엄청난 것을 얘기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아무리 저주는 자동적으로 실행된다지만... 굳이 네가 그렇게 움직일 필요가 있겠느냐."
걱정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흑귀는 입꼬리를 쓱 올려 사악하게 웃었다.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아쉽잖아요. 걱정 마세요, 절대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그리고 전 흑귀라는 자가 부리던 술수를 저도 한번 써보고 싶긴 하고 말이죠."
*
같은 날 오후. 모든 채비를 마친 심연으로 침투할 전투부대가 모두 꾸려졌다.
세빈을 사령탑으로 하여 그녀의 최측근에서 유진이 보좌하고, 그 밑에 장 티엔과 흑향, 그리고 귀술이 함께 5명씩으로 구성된 소대의 대장을 맡았다. 총 20명의 적은 인원으로 구성된 팀이었지만 전력은 막강했다.
"좋다, 이노우에와 혼다 그리고 나는 유나를 옆에서 계속 지키고 있을 테니 침투조 쪽도 절대로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하기 바라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어려진 세빈 앞에서 규찬은 한동안 떠나질 못했다.
겨우 돌아온 그녀를 이런식으로 적진으로 다시 보내야 한다는게 걱정되서였을까?
길을 떠나기 전 세빈은 유나에게 말했다.
"방어진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저주가 발동되는 시간으로부터 약 두시간이 한계일 것이다. 네 몸 안에 축적한 힘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몸이 방어진을 가동시킬 때 시간당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 결국 힘을 다 써보지도 못한 채 분명히 방어진은 밀리고 말 것이다."
불안한 표정의 유나에게 세빈은 걱정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들이 어떻게든 이 일을 끝내버릴테니, 믿고 기다려달라는 말이었다.
유나가 걱정되기는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지금 죽게 된다면 자신이 살고 있는 미래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유나는 살아남아 윤하를 위해 희생을 했고, 그래야 자신의 부모님이 온전히 살아계시는 상태가 되는 유진으로썬 더더욱 긴장되는 출정이 아닐 수 없었다.
운명의 신이 여기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보려고 애쓰면서도, 그는 일단 어떻게든 세빈과 함께 저주를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만의 특수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걸 사용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녀는 상황을 예측하고 또 예측했다.
"언니, 잘 움직여요?"
"그래, 덕분에."
마지막으로 연계기동 수트를 세빈에게 착용시켜주고 난 뒤, 그녀는 시험기동을 해보라고 세빈에게 말했다.
역시나 타고난 능력치가 있어서 그런지 그녀가 메카수트에 적응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버튼을 누르면 제 기기와 연계기동되고, 다시 누르면 언니가 별도로 움직일 수 있게 바뀌어요. 일단 꺼놓고 있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켜자구요."
금세 메카수트를 이용해서 날아다니는 세빈을 보고 모두가 대단하다고 난리였다. 유진은 저정도는 기본이라고 했지만 과거 사람들에겐 메카수트 자체가 신기한 물건이었으니...
모든 채비를 마치고 광백의 입구에 모인 사람들은 작전의 성공을 기원하며 술잔을 들고 하늘을 향해 건배했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 나아가 모든 능력자를 구하기 위해서.
* * *
이틀 뒤. 2000년 6월 9일 오후 5시경.
세빈의 예언몽을 따라 흑귀를 추적하던 그들은 마침내 흑귀의 뒤를 밟는데 성공한다.
"간다."
대략 열 명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다니는 그를 제압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대체로 약한 편이었고, 그 덕분에 세빈의 바람대로 살상 없이도 쉽사리 적을 제압하는 것이 가능했다.
"제압 완료! 대상을 확인한다!"
하지만 문제는 흑귀가 그들보다 계속해서 한 수 앞서 있다는 것이었다.
"제길 또 허탕이야!"
세뇌향(洗腦香)을 이용한 의식이 없는 허수아비의 연속. 아마도 흑귀는 과거의 원래 흑귀가 쓰던 방법을 익힌 것이 틀림없었다.
그걸 이용해 계속해서 추적조의 허탕을 유도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7시간 남짓밖에 안 남았어요."
벌써 5번째 허탕. 추적조는 슬슬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예언몽을 썼다간 세빈의 체력이 먼저 바닥날 게 뻔했고 그녀가 예언몽으로 찾아도 그것이 본체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태였다.
"큰일이구나.. 이래서야 제 시간 안에 본체를 찾을 수나 있을지..."
모두들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역시 제일 답답한 것은 세빈이었다. 이 질질 끄는 추격전은 오늘 하루면 끝나지만 끝나는 즉시 그들의 운명도 끝나고 만다.
잠깐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흑향이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내가 예언력만 쓸 수 있었어도 어머니가 이렇게 힘들 일은 없었을 텐데 젠장!!"
"흑향!! 그만둬!!"
그건 바로 능력을 쓸 수 없다는 자괴감때문이었다.
얼마전 미래로 갔을 때에도 그 이유때문에 장 티엔에게 늘 미안한 마음 뿐이었는데, 과거로 돌아왔지만 변하지 않는 상황이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장 티엔과 세빈이 그녀를 간신히 말렸지만, 자괴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결국 그때 나선 것은 유진이었다.
"언니."
다들 이전에 유진이의 말 덕분에 세빈에게서 등을 돌릴 뻔한 마음을 접었던 기억이 나서인지, 그녀가 흑향을 진정시켜줄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었다.
"내 손 잡아봐요."
유진은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과거로 넘어가려고 했을 때 만큼 지금 흑향도 예언력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도.
"그리고 침착하게, 자신의 힘을 끌어낸다는 생각으로, 예언력을 사용해보려고 노력해보세요. 전에 한번 우연히 썼잖아요, 미래에서."
무슨 자신감으로 유진이 그녀를 돕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어째서인지 그 순간만큼은 유진에게서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모두가 그녀에게 주목했다.
"어때요, 보여요?"
[두근]
그리고 이윽고 흑향의 가슴이 뛰기 시작하면서, 눈을 감은 그녀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을 따라 흘러들어온 빛은 내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가 그 안의 칠흑같이 어두운 구를 부수기 시작했다.
금이 가고 마침내 한조각씩 떨어져나오는 검은 조각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면서 구 안쪽에 같혀 있던 빛줄기가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건!"
*
"크읏!"
흑귀는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흑귀가 놀라 지르는 비명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들 역시 세뇌향으로 세뇌되어 있는게 틀림 없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빌어먹을, 어떤 자식이 방금 내 꿈과 연결된거야..."
흑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집중하려 노력했다. 산의 기슭에서 병력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이동하던 그는 갑작스런 꿈의 겹침으로 인해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껏 내 꿈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녀석은 한 명도 없었는데.. 대체 어떤 놈이...!'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언몽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고유한 주파수가 있기 때문에 겹칠 확률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는것을.
그리고 혹시 겹친다고 해도 그건 부모관계에나 가끔 발생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직접적인 주파수 간섭은 고의로 누군가가 자신의 주파수를 변경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현상은 미래로 갔을 때 세빈과 흑향 사이에서 일어나기도 했었다.
"말만 들었지 겪어본 적이 없어서 굉장히 기분이 나쁘네. 뭐 어짜피 그자식들은 금방 오지 못할 테니 난 나대로 슬슬 움직여야겠군..."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익숙한 장소를 향해 병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나의 병사들이여!!"
*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흑향 때문에 모두가 놀라서 달려왔다. 모두들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세빈만이 그녀가 비명을 지른 이유를 알아채고 그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혹시 누군가와 예언몽이 겹친게냐?"
그리고 흑향은 이 느낌이 미래에서 세빈과 같은 꿈을 꾸었을 때 겪었던 느낌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걸 깨닫고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머릿속에서 고통이 일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눈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방금, 그건 분명 흑귀였습니다. 그녀가 광백에 병사들을 이끌고 쳐들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가 본 것을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세빈은 흑향의 막혀있던 예언몽이 뚫렸다는 걸 보고 얼마 전 자신이 본 광경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윤하가 내게 힘을 전해줬을 때 저렇게 갑자기 힘이 개방되었던 기억이...'
그들을 가짜 흑귀로 완전하게 유인한 뒤 흑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백영의 본진으로 직접 쳐들어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는 우리가 저주의 발원지를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신빙성 있는 흑향의 의견에 세빈이 동의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예언력으로 찾을 수 없도록 뭔가 수를 써 뒀다던가... 아니면 저주도 그저 단순한 미끼일지도 모르는 일이 되었군."
갑자기 나아갈 방향에 혼선이 생기고 만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이때 부대를 이끄는 세빈이 뭐라도 해야 했다.
'젠장, 여기선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가...!'
그리고 순간적으로 집중한 그녀의 머리 속으로 갑작스럽게 예언몽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집중해서 꾸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보이기 시작하는 미래는 그녀가 서둘러 발을 뗄수밖에 없게 맨들었다.
"모두 서둘러요!! 일단 광백으로 돌아갑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하루 되세요.
즐감하시고 선추코 감사합니다 :>
-리리플
신의탑hello님 // 워낙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었으니까요..!
은하수보며님 // ㅋㅋ 유진이도 그렇게 윤하도 굉장히 빨리 적응했었죠. 재미없는 집안...
별의사제님 // 반갑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