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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169화 (168/188)

169화

*  * *

2000년 6월 5일 오후.

여섯 사람이 다시 모인 광백의 회의실 안은 여전히 분위기가 무거웠다.

세빈은 마치 죄인인 마냥 심판대인 중앙 자리에 앉아 나머지 사람들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모두들 누군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는지 서로 눈치만 보며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침묵을 깬건 유진이었다.

"흠. 뭐 다들 눈치만 보고 계신것 같으니, 외부인이지만 제가 먼저 이야기할게요."

일단은 외부인이고 원래 시대의 사람인 나머지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아서인지 모두 동의했다.

유진은 일어나서 세빈 옆으로 걸어간 다음 세빈의 손을 잡았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과 맞닿은 손을 통해 그녀의 불안함이 전해져왔다.

"일단 전 올해 1월 쯤 세빈 언니를 만났습니다. 이유는 다들 아시겠지만 언니가 2032년의 미래로 넘어왔기 때문이었죠."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한 그녀는 굉장히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빈이 미래로 넘어와서 있던 일들을 꼼꼼히 늘어놓은 뒤 유진은 그것들이 증거라는 말과 함께 결론을 이야기했다.

"결론은, 세빈 언니는 지금 오로지 백영 사람들과 세계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과거는 제가 모르니까 뭐라 말할 껀덕지가 없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에요."

전쟁이고 뭐고 전혀 모르던 미래의 제 3자인 유진이 보기에도 세빈은 굉장히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애썼고, 어떻게든 돌아가서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고 굳은 의지를 지켜 왔다. 그녀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세빈의 본심을 봤다는 주장이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의 과거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전 단지, 현재의 세빈 언니에 대해서는 꼭 이렇게 생각해주셨으면 한다는 이야기가 하고싶었던 거니까요."

말을 마친 유진은 세빈을 한번 꼬옥 껴안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유나는 확실히 그녀와 비슷한 생각인 듯 표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유진이 자리에 앉고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귀술. 그는 시작부터 공격적으로 세빈에게 묻기 시작했다.

"하나만 묻죠 영수님. 그리고 제 태도가 좀 무례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세빈이 고개를 끄덕였고 귀술은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말을 이어갔다.

"영수님에게 백영은 도대체 뭡니까? 전 그게 궁금하군요. 지금이야 저 꼬마 말대로 오롯이 백영을 위해 힘쓰고 계시다는 건 저도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총수님의 아들인 진 님을 죽이려고 했을 때나, 암살자 소탕 당시 진위님을 죽였을 때는? 그때는 어떤 생각이셨는지요?"

역시나 나머지 세 사람에 비해 가장 강경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귀술이었다. 이번 대답의 여하에 따라 그의 이어질 말이 달라지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세빈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미안하다는 마음 뿐이군요. 무고하게 죽을뻔한 내 아들이나, 그날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 나도 모르게 목숨을 빼앗아버린 진위 두 사람을 생각하면 전 평생 죄인입니다. 그것 외에도 과거 아무것도 모르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던 어린 암살자 주향의 백영에 대한 스파이 행위와 백영으로의 공격을 돕기 위한 행동들 모두 제 잘못이고 제 씻을 수 없는 과거입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고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말이 끝나고 세빈은 허리를 굽혀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숙인 상태로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깊이 반성하고 통감한다고 해도 씻을 수 없는 죄가 있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걸 갚아야 할지 며칠동안 기도하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전 그 결과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번 일로 제 과거의 잘못을 씻어낼 수 있을 수 없을지라도, 전 어떻게든 이번에 마음먹은 일을 행하려고 합니다."

고개를 든 그녀는 유진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유진이 6월 1일 회의때 이야기했던 제안이, 이번엔 세빈의 입에서 다시끔 말해졌다.

"이 저주가 어떤 저주이건간에, 나로 인해 유나가 희생되지 않도록, 나로 인해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살릴 수 없어도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만은 살릴 수 있도록... 유진이와 함께 심연으로 가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놀랐다. 아무리 세빈이 뛰어난 전투병이라고 해도 쉽사리 수락하지 못할 제안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진의 아이디어에 함께 하겠다고 손을 뻗은 것이었다.

"죽더라도 가서 원흉을 없애겠습니다. 외부인인 유진이가 절대 다치는 일 없도록 지키겠습니다. 이런 절 믿어주신다면, 다소 무모해보일지도 모르는 작전을 강행하는 걸, 제가 여러분과 함께 임무에 동참하는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다시한번 고개를 숙이는 세빈을 보며 귀술은 침묵을 지켰다. 아무리 그가 과거의 세빈에게 불만이 있었다고 한들, 직접 행동하겠다는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모두가 아는 최고이자 전설로 남은 암살자, 그게 세빈이고 그녀의 힘이 가세한다면 이 전쟁은 승리로 끝날 확률이 높았으니까.

"전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나와 이노우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귀술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지만, 세빈을 지긋이 바라본 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곤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절대로 살아 돌아오십시오. 배신자 청명이 감옥에 같혀 있듯이, 영수님도 살아 돌아와서 배신의 댓가를 치르셔야만 할 겁니다."

모두가 동의하자 세빈은 고개를 들었다. 이해해줄 수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하던 그녀의 믿음이 확실시되는 순간, 그녀는 결국 울음과 동시에 웃었다.

"여보, 위험하지만... 가겠다면 나도 말리진 않겠소. 당신의 뜻이 곧 나의 뜻이고, 나의 뜻이 곧 당신의 뜻이니까..."

규찬이 울음을 터트린 그녀에게 다가가 포옹했다.

"과거에 대해선 더 아무말 않겠소. 당신의 다른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도 내가 포용해야 할 운명이겠지. 진이도 내 자식이지만, 흑향... 아니 민아도 내 자식이오. 당신이 어떤 고통을 겪어왔는지... 난 다 이해할 수 있소."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규찬 때문이었을까, 세빈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장내가 숙연해졌다.

"그러니 꼭 살아 돌아오시오. 귀술이 말마따나... 꼭."

규찬이 안고 있던 손을 풀고 조용히 뒷짐을 진 채 걸어나갔다. 나갈때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니, 감히 공석에서 쉽게 눈물을 보일 수 없는 지도자의 슬픔이 묻어나왔다.

"알겠습니다... 돌아와서 어떤 벌을 받게 되더라도... 꼭 모든 걸 내 손으로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여러분. 정말 고마워요..."

유나와 이노우에가 귀술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고, 귀술은 그들의 시선을 회피했다. 유진은 규찬이 나간 뒤 세빈에게 다가가 그녀를 다시한 번 안았다.

'언니는 절대 약하지 않아. 다만 너무 강해서... 그만큼 오랜기간 더 많은 고통을 겪어왔을 뿐이야.'

*  * *

다음날 새벽.

심연의 동쪽 비밀문을 지나 나오는 악념병이 모인 곳.

절뚝거리며 목발을 짚은 5장로가 들어오자 흑귀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다가 그리 되셨습니까."

이미 소식을 들어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5장로가 흑향과 장 티엔을 놓친 것이 굉장히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방심한 것 같군요."

장 티엔이 강하게 걷어찬 탓에 귀능에게 베였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게 화근이었다. 이 상태론 저주 발동 전에 적들이 쳐들어 올 경우 5장로는 전면에서 싸울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악념병이 다 모인 후에 그런 부상을 입어서... 2장로 행세를 하던 녀석은 제가 부하들을 시켜 처리했습니다."

"...그렇군요. 고생많으셨습니다."

흑귀는 준비된 500개의 악념병을 5개의 상자에 차근차근 옮겨담기 시작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떨어지는 개수의 악념병을 확인한 그는 함께 가져온 카트에 박스를 실었다.

"아마도 그 녀석이 다시 이곳에 돌아올 가능성은 없어보입니다만. 예지몽에 따르면 분명 모레, 6월 8일에 백영 놈들이 쳐들어올 게 분명해보이는군요."

5장로는 조금 긴장된 모습이었다. 다리 부상으로 인해 편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부대를 지휘하다 보면 분명히 위기가 찾아올 게 뻔했다.

아무리 지휘관이라고 해도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많은 지금에는 안전한 자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거의 무조건 한쪽이 끝까지 몰리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준비해야만 하는 실정이다.

"철저히 방어하도록 하세요 5장로님.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시니 부하들 시켜 잘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턴 굳이 존칭 쓰실 필요 없습니다."

존칭을 쓸 필요 없다는 말에 5장로는 그나마 마음이 좀 편해진 듯 했다.

"진즉에 얘기해주지 그랬어.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좀만 더 버티면 된다."

"그렇죠.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5장로는 흑귀에게 존칭이 아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들의 관계는 원래 어떤 관계였길래 이런 대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 작품 후기 ============================

비가 갑자기 주룩주룩 내리네요!

즐감하시고 센치한 하루 보내세요 :>

선추코 감사합니다!

-리리플

신의탑hello님 // ㅋㅋ 꾸준히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하수보며님 // 각자 취향이 있는거겠죠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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