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침묵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던 세빈은 옆에서 슬쩍 다가와 살포시 그녀를 안아주는 유진 덕분에 마음이 그나마 좀 편해졌다.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요. 다들 너무 많은 사실을 알아서 분명 놀란 걸 거에요... 그들도 언니의 본심은 알아줄 테니까요."
유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까. 이정도까지 들었다면 분명 배신자에 살인자인 세빈을 경멸할 수도 있는 상황일테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침착했다.
"유진이 넌, 내가 해 준 얘기를 듣고도 내게 아무 거부감이 안 드니?"
그녀의 물음에 유진은 고민하는 듯 말을 아꼈다. 하지만 세빈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그녀에게 조심스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언니가 사람을 죽였고.. 백영을 배신한 건 사실이니까요. 언니와 몇십년을 함께 해 온 저분들은 지금 저렇게 혼란스러운 게 맞아요. 근데 전 아니잖아요? 내가 살던 평화로운 미래와는 달리 여기는 전쟁터나 다름없으니까요... 사람이 유일하게 살인을 해도 용서가 되는게 전쟁터라고 배우기도 했고."
세빈은 묵묵히 유진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사람들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죠. 제아무리 전쟁이 발생했고, 인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해도 죽인 사람과 죽임을 당한 사람의 가족 모두 영원한 흉터가 남는거에요. 게다가... 언니의 경우는 무의식에 의한 살인, 그것도 민간인과 아군이나 다름없었던 진위라는 분을 죽였죠."
모든 게 맞는 말이었다, 용서를 바라고서 모두에게 말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용서받지 못할 수많은 행동들을 범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용서하기가 쉽지 않은 걸거에요 저 분들은. 평생 흑영에 맞서 순수한 마음으로 인류를 위해 희생과 전투를 마다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믿기 어려운 굉장한 언변에 세빈은 넋놓고 유진의 말을 들어야 했다. 고통스러운 현재의 상황에 그녀의 주옥같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빈의 갈라진 마음속에 단비처럼 녹아들었다.
"언니는 기다리셔야 해요. 저분들이 언니를 용서하고 대의를 위해 나아갈 지, 아니면 잃어버린 믿음으로 인해 언니와 함께 하기를 포기할 지 결정할 때 까지."
유진은 그래야만 한다는 말과 함께, 괜찮겠냐고 물었다. 하루가 걸릴지 이틀이 걸릴 지 모르는 일이었다.
저주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고, 막기 위해서는 모두의 합일이 이루어져야만 하는데현재 세빈의 진실 폭로로 인해 백영은 구심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모두의 구심점이었던 세빈의 갑작스런 위기는 곧 백영의 위기, 그리고 세계의 위기나 다름없는 상황.
며칠이 걸릴 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주는 앞으로 9일 내에 세상을 덮칠 것이다.
그래도 기다려야만 했다. 세빈은 그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알았다. 기다리마...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마음을 돌릴 때까지... 내 나름의 방법대로 그들을 기다리마..."
그 말에 유진은 씨익 웃었다. '그래야 우리 세빈 언니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세빈은 위험을 무릅쓰고 과거로 넘어온 유진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리고 주먹구구식으로 넘어왔던 것만 같았던 유진의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세빈의 뇌리를 스쳤다.
혹시 이것도 미래를 위한 운명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라면... 운명의 신은 그녀를 돕기 위해서 유진을 과거로 보냈던 것일까?
* * *
3일 뒤, 2000년 6월 4일 새벽 1시경
"준비 됐습니까? 다리는 이제 괜찮구요?"
장 티엔은 2장로의 물음에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부상이 완전히 낫은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움직이겠다는 그의 의지 덕분이었는지, 빠른 속도로 발목이 회복되는 중이었다.
얼굴엔 저번에 2장로가 건네준 5장로의 탈을 쓰고,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뒤덮은 그는 어두운 밤 하늘 아래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전 바로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악념병 몇 개를 수거한 뒤 귀능님의 아들을 구하러 갈 겁니다. 당신은 어제 계획한 대로 곧장 흑향에게 가십시오."
"알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모한 2인으로만 이루어진 작전. 행여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라도 했다간 장 티엔은 곧바로 포위될 게 뻔했다.
저번에 소율을 만나고 온 뒤 흑귀가 여자라는 확신을 들었지만, 그래도 딱히 그의 정체를 단정지을만한 증거는 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흑귀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인질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생각이 앞서게 되었고, 같이 움직이는 것보다 따로 따로 움직이는 게 낫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별도행동을 하기로 약속했다.
"어떻게 됬든 정확히 2시간 뒤 그 은신처에서 봅시다. 추격이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십시오."
마지막 2장로의 다시 만나자는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주먹을 맞부딪쳤다. 작전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그들은 조심스럽게 심연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
비슷한 시각,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걸어나온 유나는 어두운 거리를 지나 광장에 도착했다. 사람이 많은 광백이지만, 한밤중이다 보니 돌아다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엄청 어두운 밤이었지만 부적화된 그녀의 몸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내려온 그녀는 광장 한 가운데에 사람이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새하얀 옷을 입고 마치 귀신처럼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한 유나는 멀찌감치 서서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그녀는 세빈이었다. 유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뒤 그녀가 무얼 하고 있나 잠자코 지켜봤다.
한번, 두번, 세번... 몇 분간 세빈은 한결같은 몸놀림으로 하늘을 향해 절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세빈의 모습을 보며, 유나는 3일 전 세빈이 이야기했던 과거 이야기가 다시끔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남편을... 어머니가 직접 죽이려고 하셨었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비록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나, 부모님과 자식 사이의 선택지에서 세빈은 부모님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님과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이 함께였기 때문이라는 점이 세빈이 잘못 선택한 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유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힘든 선택을 한 것이라는 걸. 그 이유는 자신도 세빈이 사라진 뒤 남편과 자식이 있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인들 힘들지 않은 결정이겠느냐만은... 그래도 어머님은 분명 힘든 길을 걸어오신 건 맞다. 비록 스파이로 처음 백영에 오게되긴 했지만... 그래도 흑영보단 백영이 그녀가 있어야 했던 곳인게 맞을 거야.'
분명 그랬다, 흑영에게 있어 세빈이 단순한 체스말이었다면, 백영에게 있어 세빈은 지금 없어서 안 될 존재에다가 많은 사람이 사랑해주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하늘을 향해 멈추지 않는 기도를 하고 있는 저기 자신의 시어머니, 그녀는 분명 백영만 생각하고 있는게 맞다.
돌아오자마자 유나에게 가득 담아져 있던 힘을 자신의 몸에 옮겨 담아 대신 희생하려고 한 걸 보면 확실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가로막힌 힘의 전이로 인해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지만, 지금도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을 살리고 백영을 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유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님...'
*
2장로와 헤어진 흑귀는 현재 심연의 서쪽에 있었다. 2장로가 알려준 저주를 위한 악념병들이 모여있는 위치는 동쪽 지하를 통해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지나 나오는 곳이었고, 귀능의 아들이 살고 있는 곳은 비밀 통로의 근처였기 때문에 그가 두 임무를 함께 처리하게 되었다.
반대로 흑향이 잡혀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령의 처소는 서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게다가 장 티엔은 심연 내부를 훤히 꿰고 있었다.
어떤 위기상황에 몰려도 그는 잘 도망칠 자신이 있었고,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이야말로 그가 이성을 가진 완벽한 전투병기로 거듭날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조심스럽게 저번에 귀능이 접근했을 때와 같은 경로로 사령의 방 옆에 도착한 장 티엔은 안쪽에서 전해오는 작은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2장로에게 이미 귀능이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를 다 들었던 터라, 분명 이번에도 안에서 5장로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어떤 자식인지 몰라도 자신의 움직임은 분명 이미 사전에 예측이 되어 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역전시키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염원력. 그의 강대한 염원력을 전투와 동시에 써야만 했다.
아무리 힘을 다루는데 통달한 사람이라도 염원력이나 예언력을 사용하면서 다른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장 티엔은 오늘 어떻게해서든 그 벽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그의 소중한 부하 흑향을 구하기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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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덥네요... 지쳐갑니다 으어어어어9월까지 이 날씨인 상태로 살아야하다니.. 괴롭네요 ㅠㅠ선추코 늘 감사합니다.
-리리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