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한참을 울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는지, 소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2장로의 탈을 쓰고 있는 그가 마음에 걸려 목소리가 자꾸만 기어들어갔지만, 어떻게든 전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는... 어디선가 떨어진 뒤 그제서야 간신히 눈을 떴습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팔이 부러지면서 정신이 들었던 것 같아요."
얘기를 들어보니, 소율이 있던 방에서 전투를 벌인 후 소율을 데리고 귀능이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고 했다. 창 밖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지만, 흉흉했던 분위기로 인해 그때 주변엔 아무도 없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귀능이 창 밑에 미리 완충재를 깔아놓은 덕에 소율은 팔이 부러지고, 귀능은 부상 없이 추락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을 일으킨 귀능의 몸엔 피가 흥건했다고.
"때문에 저는 정신이 들었지만 놀란 나머지 다시 기절했습니다. 그 후엔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태로 산 밑까지 내려왔고... 당신을 만나기 직전 어렴풋하지만 그 분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 똑똑히 기억납니다..."
현재의 2장로는 하지만 살아있는 모습의 귀능을 보진 못했다. 약속장소에 오는 속도가 늦어 올 길을 따라 올라가던 중 만난 기절한 소율과 죽어 있던 귀능.
그것이 2장로가 본 귀능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팔이 부러진 것 외에 아무런 부상 없이 깔끔했던 소율과 달리, 몸에 탄흔이 두개나 남아있었던 귀능. 분명히 소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대신 총알을 몸으로 받아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분께서.. 자기 아이를 부탁하신다고 했어요... 올해 7살인데 어머니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 자신마저 죽으면 이제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했어요."
그가 숨이 붙어있을 때 정신이 희미한 소율에게 한 마지막 한 마디, 그것은 자신의 아들을 돌봐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2장로에게 소율이 해준 말은 굉장히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근데.. 그 아이가 지금 심연에 있다고..."
간신히 소율을 구해오는데도 귀능의 목숨이 필요했는데, 이번에는 귀능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심연에 가야하다니.
물론 계속해서 심연에서 일을 하고 있던 2장로로써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장 티엔이 함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귀능의 아들도 구해야 하고, 장 티엔의 부하인 흑향도 구해야만 한다.
"이거, 빼도막도 못하고 심연에서 한바탕 난리를 쳐야겠는데요?"
장 티엔이 대충 분위기를 읽어 내고 2장로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 그렇겠군요. 구출할 사람이 한 명이어도 벅찬데.. 둘이나 되다니."
하지만 2장로의 걱정따위 장 티엔은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2장로가 흑향을 구하는데 자신을 돕겠다고 해도 필요없다고 거절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됐고, 흑향의 소재나 알려주십쇼. 흑향은 혼자서 구하겠습니다."
"절대 무립니다. 위치를 알려주면 당신도 그걸 깨닫게 되실 걸요."
홀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장 티엔을 2장로는 절대 무리라면서 말렸다. 하지만 장 티엔은 그가 자꾸 안 된다고만 이야기하면서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당신 다리는 아직 멀쩡하지도 않잖아요, 그 다리로 혼자서 누굴 구하겠다는 겁니까?"
역시 2장로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번 부하들의 배신으로 인해 난투극 끝에 탈출한 장 티엔은 발목 부상으로 인해 현재 자유롭게 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 상태로 혼자서 심연의 한 가운데에 침입하겠다고 외치고 있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간 그저 개죽음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단 소율 씨에게 좀더 사정을 들어보고 움직입시다. 어짜피 부상자도 한명 있는 상황에서 쓸데없이 움직이는 건 우리에게 독이 될 뿐이니까요."
결국 억지를 부리던 장 티엔도 2장로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흑향을 구하고 싶은 마음에 2장로를 보채고 있긴 하지만, 부상당한 그가 심연 내에서 포위라도 당했다간 구출도 못 해보고 개죽음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2장로는 추가로 소율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 침착하게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사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사령으로써 흑귀와 어떤 일을 했는지까지 세세한 부분도 물었지만 추가로 얻어낸 정보는 크게 많지 않았다.
일단 어째서인지 소율은 흑귀와의 기억을 대부분 잃은 채였다.
분명 흑귀가 사령에게 뭔가 수를 써서 기억을 지워버린 게 분명했다. 아마도 계속 세뇌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 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덕분에 소율이 기억하는 흑귀의 모습은 매우 사적인 것 뿐이었다. 그것마저도 세뇌가 풀려서 간신히 떠오른 몇 가지 뿐이었다.
"너무 단편적인 기억들 뿐이라 더이상 뭘 알아내긴 무리인 것 같군요... 몸에 부상도 있고 오랜기간 세뇌를 당한 탓에 정신도 매우 불안정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서 뭔가 더 알아내기엔 어려워보였다.
결국 알아낸 정보만으로 추리를 하기 시작한 두 사람은 원래의 은거처로 돌아가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다. 업무를 위해 들어가면 가끔씩 상의 가슴저고리를 푸른 채 걸치고만 있었는데 그때 봤다고 했죠."
한참을 생각하던 장 티엔은 뭔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비껴치며 딱 소리를 냈다.
"붕대... 이상한데..."
그의 뜬금없는 지적에 2장로는 놀라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일말의 가능성과 실마리라도 붙잡아야 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혹시 허무맹랑한 소리여도 주의깊게 들을 생각이었다.
"특수 분장, 바꿔치기한 사람... 게다가 알 수 없는 그 말투의 변화까지. 게다가 이전의 흑귀가 하고 있지 않던 가슴의 붕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들이 뭔가 연관성이 있는게 분명합니다. 제가 알기론 흑귀는 어떤 큰 부상도 당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쭉 늘어놓기만 한 것 같은 장 티엔의 말에서, 2장로는 굉장한 단서를 붙잡고야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점들이 한 데 모여, 결국 하나의 증거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설마 지금 흑귀는... 여자가 아닐까요?"
*
문을 박차고 들어온 세빈은 힘겹게 발을 옮기며 탁자에 손을 기대고 섰다. 옆에서 담당 의사가 안절부절하며 서 있다가 이윽고 규찬의 나가도 괜찮다는 손짓에 자리를 떠났다.
힘겨워 보인을 세빈을 지켜보던 유진이 제일 먼저 달려나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가 주향이었다는 사실에 아직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과 달리, 유진은 거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향의 무서움을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제가 얘기할게요. 당신이 모르는 사실도 있으니까..."
규찬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내를 한번 쓱 둘러본 세빈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통감하며, 끊어져버린 이야기들을 다시 붙이기 시작했다.
"심연으로 돌아간 뒤, 저는 흑귀 이전의 사령관이었던 도재혁에게 받았던 대우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부모님을 인질로 잡은 그는 시시때때로 절 협박하며 강제로 임무에 동원시켰죠."
가족을 인질로 잡힌 채 계속되는 백영 기습에 동원된 그녀는 갈수록 정신이 피폐해져 갔다. 한동안 자신의 남편 곁에서 백영 사람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복면을 쓰고 정체를 숨겼지만 그들을 자신의 검으로 베어야 한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그녀를 괴롭게 했다.
"게다가.. 흑귀는 내게 강제로 아이를 배도록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아이를 잉태한 저는 몇번이고 유산을 생각했지만 차마 내 뱃속의 새로운 생명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다른 아버지를 가진 내 딸, 그 아이가 바로 흑향입니다."
이 대목에선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규찬도 이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아들 외에 또다른 딸이 있었다는 것, 그것도 그녀의 정체가 흑향이었다는 건 규찬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새로 생긴 피붙이 딸까지 인질로 붙잡힌 채로 자신이 흑영인지 백영인지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꼭두각시 인형처렴 불려다니던 그녀는, 결국 고통을 잊기 위해 스스로의 의식을 무의식에 파묻어버렸다.
"그런 제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완전히 나 자신을 놓아버린 상태의 전 엄청나게 위험한 병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간 간신히나마 정신을 유지하며, 절대로 사람을 숨이지 않으며 임무를 수행해왔던 그녀를 패닉에 빠트린 사건.
그것은 다름아닌 백영의 대대적인 암살자 소탕 때문이었다.
당시 정예 부대 제 1군의 대장이었던 규찬을 필두로 한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50여명 남짓한 흑영의 최정예 암살자들 중 단 두 사람만이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갑작스런 기습에 모든 내 동료들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어요.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다고 한들, 그들도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당시 그녀는 자신의 동료들을 동료로 대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녀가 흑영에 복귀 후 암살단의 2대 대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영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녀는 제대로 된 대장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아 도망친 건 나와 내 뒤를 따르던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도망갔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얼굴을 거의 가린 채 내 남편을 봤기 때문에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온전치 못한 정신, 게다가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부대원을 이끌고 쳐들어온 규찬을 만났다는 두려움에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절대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굉장한 기세로 도망쳤고 결국 근처의 인천 연안부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 말고 마지막 한 사람이 잡히고, 자신도 잡히거나 죽임당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세빈은 간신히 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을 놓아 버린 채 하나의 살인기계나 다름없는 괴물로 변하고야 말았다.
"그 당시 나와 마주쳤던 민간인 모자... 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 순간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순순히 붙잡혔더라면 그런 희생은 필요 없었을텐데... 내가 조금만 정신을 가다듬고 버텼다면..."
그 이후는 얼마 전 규찬이 꿈에서 본 대로였다.
어머니와 아들을 발견한 세빈은 붙잡히기 직전 엄마를 잡아 찔러 추격병 쪽으로 밀쳐냈고, 이윽고 도착한 규찬이 타고있던 차를 뛰어넘어 도주했다.
결국 아이를 데리고 있던 엄마는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 사건으로 규찬의 최측근이었던 진위가 죽고, 상백은 백영이기를 포기했다. 규찬은 자신의 실수를 통감하며 그 뒤 정예 부대의 대장직을 내려놓고 자신수양에만 몰두했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나서 제가 태어났던 심연에 무의식적으로 돌아왔을 땐, 내 손과 검에 묻은 피를 보고 엄청난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돌아온 것인지 파악도 못 하고 있을 때, 흑귀가 말도 안 되는 책임을 물으며 나를 감옥에 가뒀죠."
세빈도 대충은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완전히 패배감과 공포심에 사로잡혀버린 자신은 이제 더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을.
그동안 인질극을 통해 자신을 움직여 왔던 흑귀 역시 그걸 알고 그녀를 되도 않은 암살단 소멸의 책임을 물으며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장기말 따위는 그에게 더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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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진짜 더워 죽겠네요..
일이 있어서 업로드가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ㅠ선추코 감사합니다, 즐감하시기 바래요!
-리리플
은하수보며님 // ㅎㅎㅎ 감사합니다. 즐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