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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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일시적으로 기력이 다해 쓰러진 세빈을 병동에 남겨 둔 채, 다시 모인 나머지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빈이 주향이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지금껏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이었다.
한참을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었고, 계속해서 이어질 것만 같았던 정적을 깬건 다름아닌 규찬이었다.
"속여서 미안하게 됐지만, 사실 내 아내의 이야기는 나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소. 그녀가 처음 백영에 왔을 때부터, 사라지기 전까지..."
다들 공황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진실을 끝까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하나 둘 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면목 없지만, 내 아내의 부탁이 있기도 하니 끝까지 들어주길 바라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친 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규찬의 모습이었다. 한 집단의 수장이 저렇게 깊이 숙여 인사한다는 것, 어느 모로 보나 진심으로 부탁하는 태도였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규찬을 제지하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규찬의 입에서는 아까 세빈의 말로부터 이어지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처음 광백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64년 쯤이었소. 그당시엔 나도 굉장히 어렸지만 지금도 앳된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아 그렇지, 이게 무슨 신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어려진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때의 모습이 어땠는지도 쉽게 알 수 있을 걸세."
세빈이 광백에 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노우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무려 15살이라는 나이로 흑영 암살단의 3번대 대장을 맡았는데, 거기다가 추가로 스파이 임무까지 부여받았소. 그녀가 흑영 내에서 얼마나 신뢰받는 인물이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임무였다고나 할까... 여튼 그녀는 광백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백영 사람들에게도 금방 신뢰를 쌓았소."
특유의 엄청난 예언력, 그리고 말솜씨와 어여쁜 외모로 인해 세빈은 순식간에 백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물론 그녀가 스파이라는 의심은 아무도 하지 못했고, 결국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세빈은 자연스럽게 당시 백영의 총수였던 규찬의 아버지인 서정진의 직속 비서관이라는 직책을 받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뒤로 백영 내부에선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질 않았고, 사람들은 그것이 모두 세빈의 짓인 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속수무책으로 흑영의 공격에 당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백영 내에도 규찬의 어머니가 예언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수년 간 세빈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백영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나 역시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아내와 친해지게 되었소. 그 당시 그녀는 굉장했지. 엄청난 암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완전히 속일 정도의 침착한 움직임. 난 그녀와 결혼하고 나서야 그녀가 생각보다 거친 삶을 살아왔다는 걸 깨닫게 되었소."
총수의 직속 비서관으로 오랫동안 지내온 탓이었을까, 스파이 임무를 계속 하면서도 세빈은 스스로의 일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과연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지, 이런 일을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게 뭐가 있는 것인지.
하지만 그녀 역시 스스로의 본분을 망각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혼란스런 와중에도 충실히 임무는 수행해 나갔다.
"결혼한 뒤 보게된 그녀의 몸은 수많은 잔 흉터들로 가득했지. 완전히 여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녀는 굉장히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난 그녀에게 따로 물어보거나 하진 않았소. 그녀가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굳이 캐고 싶지 않았던 거지..."
그러나 그녀가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곧이어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면서, 점점 그녀 내면의 날카로움은 무뎌져만 갔다. 아들 진을 낳고 나서 그녀의 흑영의 스파이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물론, 그런 그녀의 사정을 흑영에서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그들은 내 아내를 그대로 두지 않았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투입했더니 적진의 남자와 결혼에 자녀까지 있다니... 분명 흑영 수뇌부에서 가만 있지 않겠다고 했겠지."
아니나다를까, 아들 진이 9살이 되던 1979년에 흑영 내 강경파의 수장인 흑귀가 쿠테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고, 그는 집권하자마자 바로 세빈에게 흑영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남편과 자식을 두고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세빈은 늑장을 부렸고, 결국 일은 터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흑귀는 집권과 동시에 아내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했소. 하지만 아내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암살단의 장 쥔차이가 직접 찾아와 흑귀의 전언을 전하고 갔지."
익숙한 이름을 들은 유진이 규찬에게 장 쥔차이에 대해 물었고, 그녀가 예상한 대로 장 티엔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장 아들 진이를 죽이고 흑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몰살시키겠다고 협박했소. 그 사람들 중에는 전쟁통에 헤어졌던 그녀의 부모님 역시 존재했지... 결국 협박에 못 이긴 그녀는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아들을 살해하기에 이르렀소."
살해했다니? 유진은 어리둥절했다. 분명 진은 자기가 살고 있던 미래에서도 멀쩡히 살아계시던 외할아버지인데 죽었다니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워낙 급소를 깊히 찌른 데다가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었지. 난 아직도 눈물로 흥건한 얼굴을 한 채로 내 앞에서 진이를 찌르는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소... 진이를 찌르고 떠나가는 그녀의 모습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슬픔이 가득했소."
유진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외할아버지는 죽었던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었던 것인가.
그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진에 대한 것을 물어봤고, 규찬은 씁쓸한 표정이었지만 충분히 납득할만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거의 죽었다고 보는게 맞을 게다 아가야. 실제로 하루 반나절동안 진이는 숨을 쉬지 않았으니까... 슬픔에 못이겨 진이 옆에서 하루종일 울었던 기억만 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하늘의 도우심인지. 반나절만에 녀석의 숨이 돌아왔지."
아마도 이 이야기를 윤하가 들었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그녀가 꿈에서 봤던, 죽을 운명이었던 그를 다시 살려냈다는 염원의 힘. 그로 인해서 꼬여버린 윤하의 운명 역시도 이 과거의 일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윤하는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죽을 운명에서 되살아났다는 그의 아버지 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그녀의 할머니이자 진의 어머니인 세빈이었을 줄은.
"다행히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그 당시 내 바로 옆에서 날 도와주던 상백과 진위 뿐이었지. 난 절대로 그들에게 이 사실을 누설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네. 다행히도 사실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내 아들은 조용히 다시 회복했소."
물론 그와 동시에 세빈의 존재 역시 백영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잊혀져 가던 그녀의 존재를 유일하게 잊지 않고 있던 단 한 사람, 규찬을 빼고.
"그 뒤론 다들 조금씩은 알고 있을 것이오. 주향에 대해서 백영의 전투 병력 중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될 터이니."
흑영으로 돌아간 그녀는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마저 죽음에 이를 뻔 하게 하고 돌아간 그곳에선, 그녀를 반겨주기는 커녕 부모님을 인질로 잡은 채 계속해서 그녀를 전장으로 내몰았다.
1979년 흑영으로 돌아가고 난 뒤, 암살단이 백영의 공격으로 사라지는 1987년까지 세빈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수님 안됩니다! 아직 몸이-!"
규찬이 깊은 한숨을 쉬고 난 뒤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바깥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익숙한 목소리와 병동을 지키는 의원의 목소리.
이윽고 벌컥 열린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아닌 세빈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핼쑥한 얼굴을 한 채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
병실에 들어온 두 사람을 보자마자 사령, 아니 소율은 몸을 웅크렸다.
이불이 보호막이 되어주지도 않을 터인데 이불로 그들이 서 있는 방향을 가리면서, 그녀는 낯선 두 남자에게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긴장한 그녀에게 먼저 말을 꺼낸 건 2장로였다.
"혹시 본인의 이름이 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신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조심스레 질문해오는 그에게서 위험한 느낌이 약간은 사라졌는지 소율은 조심스레 이불을 내리고 그와 마주했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지친 탓에 잔뜩 터 버린 입술을 조그맣게 움직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말은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시선은 그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제... 제 이름은... 소율. 소율입니다..."
놀랍게도 본명을 말하고 있는 그녀.
두 사람은 그녀의 세뇌가 이미 거의 다 풀려있었음을 직감했다.
장 티엔은 자신의 본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과거로 돌아오기 전 청명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난 마지막으로 임무를 받아 떠나기 전, 나에게 임무를 전해준 소율이를 불렀다네. 하지만 그녀는 그 이름에 대답하지 않았지.」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네. 슬프게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던 그녀. 설마 그때 소율은 청명이 자신의 원래 이름을 불러준 것을 알아챘던 것이었을까?
만약 알아챘다고 하더라도 어찌하여 그녀는 마지막 길을 떠나는 청명에게 미소라도 보여주지 않았단 말인가...
"깨어난 지 얼마 안돼서 혼란스럽겠지만, 여쭤볼 게 좀 있습니다.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소율 씨."
갑작스런 부탁에 약간 당황한 듯한 그녀는, 이내 2장로의 얼굴을 흘끗 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마치 죽었다가 돌아온 사람이라도 본 마냥, 그녀의 표정에는 의아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순간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2장로가 소율이 대답하기 전에 먼저 사실을 밝혔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원래 2장로가 아니고, 함께 일하던 사람입니다만... 일단은 2장로로 알고 계셔주셨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 소율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2장로였던 귀능이 그녀를 구하고 숨을 거두던 마지막 순간을 그녀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뇌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마음에, 귀능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까지 더해져서인지 그녀는 쉽사리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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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6장 이제 절반 조금 넘었네요 ㅎㅎ선추코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