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뭔가 이어지지 않는 말을 계속하던 흑귀는, 갑자기 미소를 보였다.
"자 그럼, 이 도경현 가문의 몰락 사건과... 네 녀석과 흑향의 연관성이라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거라."
아무리 생각해보라 한들, 아는게 없으면 답도 나올 수 없는 법. 장 티엔이 어쩔 수 없이 생각해보아도 나오는 답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답이 나올 수가 없는 질문을 던졌다는 걸 흑귀 자신도 아는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여간 이렇다니까. 뭐 하기사 그 원수들의 자식들이니 알 리도 없겠지만..."
그리고 이야기하던 그는 곧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변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말투가 변한 것을 장 티엔은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딱히 더 말해줘도 못 알아들을 것 같으니, 이쯤 해두고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장 티엔."
잠시간 우수에 젖어있던 그는 곧바로 표정이 돌변했다. 아까의 슬픔은 온데간데없고, 분노로만 가득한 눈이 된 흑귀를 보며 장 티엔은 침을 꿀꺽 삼켰다.
"흑향이 우리쪽에 잡혀있으니, 군말말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요?"
그러면서 허리춤에서 칼을 스릉 뽑아든 흑귀는 바로 흑향의 목에 갖다댔다. 장 티엔이 놀라 벌떡 일어났지만, 일어난 뒤 별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당장 정예 부대를 이끌고 백영의 광백을 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돌아온 한세빈까지 처치하고 오세요. 그 불여우 같은 년을... 꼭 처치하시기 바랍니다."
장 티엔은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흑귀는 그가 세빈과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말인 즉 몸이 원래의 늙은 상태로 돌아오지 않은 한세빈의 상태마저 알고 있다는 것이 된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장 티엔은 5장로가 뽑아든 검에 뒷걸음질 칠 수 밖에 없었다.
"건백에서 작전에 실패한 일을 잊지 않았겠지요 장 티엔? 이번엔 절대로 실수 없길 바랍니다. 그랬다간... 흑향의 목숨이 언제 날아갈 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전 당신을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점 명심하세요."
살짝 힘을 준 탓에, 흑귀의 칼날에 베인 흑향의 목에서 피가 조금 흘러내렸다.
이도저도 못 하는 상황에 놓인 장 티엔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흑귀의 말을 따르는 것 뿐이었기에, 그는 머리로는 고뇌하면서도 뒤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 지켜주실 지는 모르겠지만. 흑향의 생명만은 빼앗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령관님."
흑귀는 가볍게 입꼬리만 들어올렸다.
'글쎄다'라는 그의 표정을 읽은 장 티엔은, 그대로 정예 부대의 훈련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
안쪽에서 사람들이 걸어나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둘? 셋? 아니다 그 이상이다.
세빈은 어떻게 다음 행동을 이끌어 나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들은 자신의 남편을 불러 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 선에서 처리하기 위해 지원병을 부른 게 분명했다.
'제길.'
세빈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한명, 두명, 마지막 세명까지 모습이 드러나고, 그들이 병사들임을 알아챈 그녀는 빠르게 인질로 잡고있던 병사의 뒷목을 내리쳤다.
"끄억!"
순식간에 한 사람을 기절시킨 그녀는 그대로 안쪽에서 걸어나오는 병사들 쪽에 한눈을 팔고 있던 다른 병사의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다.
굉장한 비명소리와 함께 걸어나오던 세 사람이 달려오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세빈 역시 그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 아니다, 아래, 그리고 오른쪽.
거침없이 달리면서 그녀는 단검을 다시 단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이윽오 날아오는 첫번째 검을 가볍게 피한 뒤 병사의 정강이를 내리쳤다.
또다시 비명소리, 한 사람이 쓰러졌다. 두 사람째도 역시 가뿐히 아래로 피한 뒤 턱 밑을 단검집으로 가격. 두 사람째 쓰러졌다.
"이, 이 이 꼬마 뭐야!"
당황해서 뒷걸음치는 병사를 세빈은 놓치지 않고 따라가 등을 보이고 있는 그의 등에 강하게 날라차기를 먹였다. 정확히 꽂힌 발차기로 인해 병사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세빈은 가서 빠르게 뒷목을 내려쳐 기절시켰다.
"셋... 어서 안으로 가야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가는 세빈의 앞을 막는 사람은 이제 더이상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장 티엔이 떠난 흑귀의 처소에 흑향을 감옥에 가둔 5장로가 돌아왔다.
"5장로, 아까 내 말투가 좀 이상했습니까?"
그가 들어오자마자 흑귀는 다짜고짜 물었다. 5장로 역시 마지막 가서 살짝 바뀐 그의 말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사실만 이야기했다.
"뭐... 이제 흑귀님도 한계실 테니 이해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겨온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흑귀는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5장로는 그런 흑귀를 보며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됨을 깨달았다. 그가 이제와서 마음이 약해지거나 마지막까지 집중하지 못하면 모든 계획은 불발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흑귀를 부채질하기위해, 결국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보니 사령... 어떻게 됬는지 여쭤보셨었지요."
"! 찾았습니까?"
옳거니, 흑귀는 사령의 이야기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5장로는 자신의 이 카드가 굉장한 힘을 가졌음을 다시한번 실감하며, 계획의 원만한 실행을 위해 카드를 뒤집어 흑귀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실... 2장로가 사령의 방을 습격했었습니다. 제가 미리 그 방에서 기다리면서 2장로를 처단하려 했으나 녀석이 창밖으로 추락하면서 사령을 함께 데리고 뛰어내렸지요."
흑귀는 그말에 사령의 방의 위치를 떠올렸다. 창문과 바닥과의 거리가 떨어져서 살 수 없는 거리라는 걸 깨달은 그는 곧 굉장한 기세로 분노하기 시작했다.
"사령 하나 지키지 못하고 뭘 한겁니까 5장로님!!!"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분노는 5장로의 멱살을 잡은 채 미친듯이 불타올랐다. 예상 외의 강한 반응에 5장로는 살짝 놀랐지만, 당황한 기색은 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를 진정시켰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제가 조금만 신중하게 행동했더라면...!"
5장로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강하게 쥐고 있던 흑귀는 이내 분노를 간신히 진정시키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자신 스스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일까? 그는 방금전 화낸 것과 대조적으로 굉장히 고뇌하고 있었다.
"죽일 놈의 새끼들... 다 쓸어버려야 해... 모조리..."
그리고 다시금 완벽하게 증오로 가득찬 흑귀의 눈을 보면서, 5장로는 흡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주까지 앞으로 12일.
어떤 내부의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되는 시점. 5장로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굉장히 여유로운 듯 보여도, 그들은 굉장한 위기 속에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까앙!]
"칫!"
세빈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해댔다.
힘이 약했던 탓일까, 아까 쓰러트렸던 경비병들이 안쪽에 무전을 친 것이 분명했다.
'벌써 일어나서 무전을 치다니. 무전기를 파괴하고 왔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늘어나는 안쪽의 병력으로 인해 세빈은 광백의 광장을 코앞에 두고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10명 넘는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그들이 휘두르는 검을 받아내려다 보니 검집을 낀 상태로는 굉장히 힘들었고, 그녀는 결국 원하지 않았던 피를 봐야만 했다.
한명 두명 그녀의 빠른 검술에 다리가 조금씩 베여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추격할 수 없게 되었다.
세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광장에 도달했다.
자신을 보고 겁에 질린 백영 사람들의 사이를 가로질러 가면서도, 그녀는 광장 한쪽의 방어진을 어렵사리 눈에 담았다.
그녀가 계획하고 있던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음을 알아 뿌듯함을 느끼기에도 잠시, 중심부로 가려던 그녀 앞에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한 사람이 나타났다.
"멈춰라!! 어디라고 감히 이렇게 난동을 부리느냐!!"
영수 호위대 대장인 이노우에와 그리고 그 뒤에 나타난 백영의 수장이자 자신의 남편 규찬이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그녀는 들고있던 단검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렸다.
자신을 못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속에서도, 다시 만났다는 행복감 때문에 별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로, 세빈은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이튿날, 장 티엔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기며 자신의 부하를 데리고 심연을 나섰다. 그렇게 많았던 자신의 정예 부대는 그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가 떠나기 전과 다르게 굉장히 사람이 적었다.
애초에 심연에 발을 딛을 때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사태는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흑귀와 함께 흑영에 혁명을 일으킨 무리들은 이제 모두 흩어지고 죽어버렸고, 오로지 흑귀와 5장로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남아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 밖에 나오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확실히 뭔가가 이상했다.
흑영 내엔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녀석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렇지 않고서야 심연 밖으로 나오자마자 정예 부대원들이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할 리가 없었다.
"설마 네 녀석들... 흑귀에게 따로 명령을 받은 것이냐?"
분명 그럴 거라고, 흑영 내에 무슨 일이 있는 거라고 장 티엔은 믿고 싶었다.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부대원들의 배신이라는 말도 안되는 상황 앞에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대장님. 이제 저희는 대장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이 상태론 그들에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세뇌를 당했던, 자신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던, 흑귀는 분명 뭔가 수를 썼다.
흑향을 인질로 잡은 것도, 분명 그를 먼저 처리하기 위한 속셈이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말에 따르면 둘 다 살려줄 것처럼 이야기했던 흑귀는, 사실 둘 다 처리할 생각이었던게 분명했다.
"... 어쩔 수 없군. 용서해라."
진실을 듣고 싶었지만, 진실은 듣지 못한 채 제거당할 위기에 처한 장 티엔.
그는 이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결국 그의 대검을 다시 손에 쥐었다.
============================ 작품 후기 ============================
장마가 끝나부렀네요.. 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ㅁ'/
-리리플
신의탑hello님 // 중부는 이제 장마 끝이라네요. 남부는?
은하수보며님 //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