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 *
같은 날 심연의 대회의실 근처. 인적 드문 곳에 잠복해 회의실 근처를 왔다갔다 하는 흑귀의 심복들의 대화를 엿듯던 귀능은 소율의 소재를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전에 그와 같이 도망쳤던 7장로가 아직 잡히지 않은 탓인지, 심연 내에는 여전히 그와 2장로인 귀능을 찾는 부하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흑귀는 장로들을 배신자로 간주하고 흑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을 잡아오라고 현상금을 걸어둔 상태였다.
'생각보다 경비도 삼엄하지 않고... 일부러 함정을 파두기 위해서 저렇게 허전하게 해둔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경계할 생각이 없는건가...'
소율이가 일하고 있는 곳의 방어는 거의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름 사령관이 총애하는 부하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실한 경비라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함정? 아니면 진짜 신경쓰지 않는 것? 둘 중 어떤게 맞는 것일지... 귀능은 장장 30분여를 고민하면서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거 참... 총수님께 이야기 듣고 나서 직접 구하겠다고 나서기는 했지만 역시 엄청나게 까다롭구만...'
백영에 제2장로의 신분으로 잡혀 있을 때, 규찬과 비밀 이야기를 한 귀능은 소율이의 소식을 듣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귀능은 흑영 내에 잠입한 백영 스파이 가족에게서 태어나 8년 가까이 준비한 끝에야 간신히 10년 전 쯤에 2장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2장로가 된 시점, 그리고 소율이가 사령으로 다시 태어난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듣고 난 후 그는 진즉에 알아보지 못한 것을 엄청나게 후회했다.
분명 원초적인 문제는 흑귀의 세뇌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녀를 오랫동안 부하로 다루면서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율이의 그 죽은 표정을 진즉 알아채지 못한 내 잘못도 있지...'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도 귀능은 그녀를 구하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었다. 아마도 10년간 함께 지내면서 정이 쌓인 것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마침내 결단을 내린 귀능은 조심스레 주변을 다시한번 살폈다. 아무도 소율이가 있는 방 안과 근처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안을 본 귀능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은 절대 좋은 상황은 아님을 단번에 알려주고 있었다.
"아뿔싸...!"
* * *
줄줄이 손님들을 달고 온 세빈을 보고 윤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어... 그러니까.... 손님?"
게다가 그중에는 저번에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인질로 잡았던 남자까지 껴 있는게 아닌가! 윤하는 기겁을 하며 안쪽에 있던 유진이 뒤로 재빨리 숨었다.
"엄마 괜찮아. 이제 저분 갱생했어."
"갱생같은 이상한 단어 쓰지 마라 꼬마."
얼마전까지만해도 으르렁대기 바쁘던 두 세력의 화합한 모습은 심히 괴상하긴 했다. 뭐 사실 두 세력이라고 해봐야 흑영 쪽에서 싸워온 건 장 티엔과 흑향 뿐이었지만 말이다.
"윤하야, 우리 좀 도와주겠니?"
"어... 어어 네.?"
물론 그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윤하가 알리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에게 무슨 힘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는게 그녀였다.
하지만 어리둥절하던 그녀의 시선을 집중시킨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레이였다.
"앗 레이 언니!!"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못 알아보고 있던 윤하는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기가 무섭게 반가워서 방방 뛰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한참을 얼싸안고 빙빙 돌던 두 사람은, 레이가 어지럽다고 윤하를 밀어내고서야 떨어졌다. 아무래도 젊을 때랑 달리 두 사람 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격한 포옹이 있진 않았다.
"하이고... 나이 마흔 여섯 먹은 아줌마 너무 괴롭히는 거 아니니 너?!"
"에이 언니는! 나도 낼모레면 마흔이구만."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나서야 자리에 앉은 레이는 바로 윤하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좀 뜬금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영수님이 과거로 돌아가시기 위해서 너의 도움이 필요해 윤하야."
"아니 근데, 아까도 그렇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래?"
레이는 그말을 듣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양 손을 맞잡고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웬지 그런 레이의 모습이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나서 그런지 윤하는 저도 모르게 '앗'이라고 작게 소리냈다.
"일반인들은 '기적의 힘'이라고 부르는 네가 가진 힘. 기억하고 있니?"
"아... 그 중간계에서 유나 아주머니께 받았던 그 노란 빛?"
윤하도 기억하고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환한 뒤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말도 안되는 기적들과, 그런 기적을 바라며 어디선가 계속해서 찾아오는 사람들.
물론 실제로 효험을 봤다고 말하는 이는 극소수였으나, 윤하 스스로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니? 그녀는 굉장히 놀란 표정이었다.
"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 현재 윤하 너에게 남은 그 힘들은 과거 부영수님께서 사람들의 기원을 모아 자신의 몸에 응축시켰던 것이니까. 원래 부영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힘은 더 엄청났지만 저주를 막고, 운명의 날 자신을 희생하면서 상당부분 흩어져버렸어."
"그 나머지가 '그 날' 아주머니가 나한테 준 그 빛이었구나..."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윤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아보였다.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고 있던 이 힘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레이는 순순히 따라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의자에 앉아 양 손을 앞으로 뻗으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자리 잡은 윤하의 앞에 먼저 장 티엔이 앉았다.
하지만 역시나 과거의 일이 있어서인지 두 사람은 쉽게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장 티엔이 먼저 말을 걸어 분위기는 금방 이완되었다.
"흠, 그 때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흠흠."
윤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경직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 그럼 양 손을 맞잡고, 눈을 감고... 윤하 네가 몸 속에 가지고 있는 물을 빈 잔에 채운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기운을 움직여 봐."
"응."
처음 해보는 것이라 윤하가 바로 레이의 지시대로 하지는 못했으나, 곧 마음이 편해진 그녀의 몸이 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 * *
[탁]
방문을 닫고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귀능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령, 소율이 앞에서 멈췄다. 원래대로라면 마침 기절해 있는 그녀를 데리고 바로 탈출해야 하지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이유가 존재했다.
"이거야... 원 환영회가 너무 성대한 거 아닌가?"
쓰러진 소율을 사이에두고 귀능과 마주보고 있는 한 사람,
"오랜만이군 2장로. 자네가 스파이일 것 같다고 의심은 했었지만 진짜였군그래."
"하하... 그거야 내가 할 소린데. 장로들 따돌림시키고 혼자 흑귀랑 놀아난게 누군데 그래? 5장로."
바로 장로들이 붙잡히던 그 날 유일하게 흑귀의 명령을 받아 홀로 흑귀를 위기에서 구해낸 5장로였다.
"워후 놀아나다니? 그저 내가 흑귀님의 총애를 받고 있을 뿐이지. 하하. 자네야말로 사령을 미끼로 던져놓고 너무한 거 아닌가그래? 난 이 아가씨랑 자네를 얼마나 질투했다고. 흑귀님이 사령을 너무나 아끼시는 탓에 내가 이렇게 판을 벌리는것도 쉽지 않았단 말일세."
마치 사령의 정체를 알고있다는 투의 말투에 귀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흑귀 외엔 아무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인 일을 알고 있다니, 이 자는 대체 어떻게...
"부하들은 내가 단순히 사령때문에 2장로를 질투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것만은 아니지. 누가보면 아주 내가 권력에 미친사람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아니거든."
귀능은 언제든지 반격할 준비를 한 채로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뭐 자네에게 그 이유를 말해줄 필욘 없겠지. 다만 이제 사령이 우리에게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알려줄 수 있겠군."
그 말에 놀란 귀능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던졌다.
[탕!!]
동시에 권총의 발포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발포 직전 단도와 총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서 살짝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 위치를 본 귀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겨우 소율의 머리 가장자리에서 1cm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의 탄흔은 그의 온몸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순간적인 권총의 치우침으로 놀란 5장로는 재빨리 다시 자세를 잡고 소율을 쏘려 했지만, 귀능이 좀더 빨랐다.
[깡! 퍽! 채캉!]
"이자식! 그만두지 못해?!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자식들이길래 이렇게 부하를 밥먹듯이 죽인단 말이냐!!"
권총과 귀능의 단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5장로는 계속해서 빈틈을 노려 소율을 쏘려 했고, 그녀를 보호하며 5장로를 몰아세우려니 귀능은 굉장히 난처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계속해서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되었고, 혼자 두 사람몫을 보호하기는 역시 벅찼는지 천하의 귀능에게 빈틈이 생기고야 말았다.
"엇챠, 이걸로 끝이군. 안됐지만 그녀는 흑귀님을 위해서 죽어야만 하네 2장로."
그 찰나의 순간, 귀능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젠장, 소율이에게 발사되는 걸 막을 수 없다...!'
마치 느려진것만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귀능은 필사적으로 단검을 5장로를 향해 던졌고 그와 동시에 5장로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투학!]
탄환은 정확히 맞았고, 그와 동시에 양쪽에서 피가 튀었다.
"크아악!"
*
2000년 5월 13일.
심연의 깊은 곳, 흑귀의 처소.
처소에서 홀로 책을 보던 흑귀는 벌떡 일어나더니 방 안쪽으로 향했다. 흑영 내의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그 곳에는 2개의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었다.
"... 거기 나와라. 언제 숨어들었는지는 몰라도 나오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다."
흑귀가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조금 뒤 뒤쪽의 장롱이 들썩이더니 문이 열렸다. 그 안에 숨어있던 자는 바로 7장로였다.
"그간 잘도 도망다니셨군... 무슨 배짱으로 여기에 혼자 오셨지 7장로?"
나오자마자 흑귀의 목에 칼을 들이댄 그는 어떤 사실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놀란 채 떨고 있었는데, 방의 작은 백열전구의 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함께 떨리고 있었다.
"백영에 잡혀 있을 때... 나머지 장로들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 맞다니...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왔지만 진짜였을 줄이야...!"
7장로, 이전에 네 장로가 모여 저주와 흑귀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자리에 없었던 그는 저번에 백영에 잡혀 있을때가 되어서야 다른 장로들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 말을 절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대단한 집념이시군 그래. 그래서 어쩌려고 그러나, 사실을 들으니 날 죽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나보지?"
"닥쳐라!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리고 있는 거냐 네녀석!!"
흑귀는 씨익 웃더니 가벼운 몸놀림으로 칼날을 위로 쳐내더니 그로 인해 자세가 무너진 7장로를 발차기로 방 밖으로 걷어차버렸다.
"미안하지만 이 안쪽은 나한테 소중한 장소라서... 이 안에서 피를 볼 순 없다네."
그러더니 그는 여유롭게 문을 닫은 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스릉 꺼내들었다.
"다만... 이 사실을 안 이상 살려보낼 순 없겠군 그래."
7장로는 그말을 듣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같은 늙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흑귀와 7장로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1합, 2합... 합을 거듭할수록 빈틈을 내주던 7장로는 허리, 어깨, 등을 베여나갔고 결국 몇 분 만에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흘리며 신음할 수 밖에 없었다.
"음, 그래.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좋은 걸 하나 알려주도록 하지."
"그냥....죽여라...."
흑귀는 잔인하게도 그의 머리를 밟은 채로 칼을 쓰러진 그의 심장쪽 가슴에 살짝 댓다. 그리고는 들릴까말까 한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순응의 저주에 대해 좀 알아보긴 했나? 뭐 하기사 자료라곤 남은 게 없으니... 알고 있을만한 인간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말이지 후후."
조금씩 칼날이 등을 파고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7장로는 마지막 이야기 때문에 정신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 느낌도 이윽고 심장을 꿰뚫은 칼 때문에 오래 느낄 순 없었지만.
"그날이 되면... 꿈꾸는 힘을 쓰는 것들은 모두 소리소문없이 죽을 테니... 미리 죽는다고 너무 아쉬워 하지 말기 바랍니다 7장로..."
[푸슉]
<5. 본심> END
============================ 작품 후기 ============================
월요일이네요, 한주 즐겁게 보내세요 ^-^내일 6장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다음 7장이 마지막장, 그리고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선추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D
-리리플
Z박령님 // 그부분은 처음부터 있던 2부의 한계입니다 ㅠㅠ. 1부 이후 가려져있던 내용들이 밝혀지는 게 2부다보니... 글의 성격 자체가 틀리니 2부는 기호에따라 넘어가셔도 상관은 없어요 ^^.
신의탑hello님 // 네?! 뭔가 댓글 다시다가 끊어지신거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