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인지 눈을 의심하면서도, 유진은 재빨리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지훈 근처에 있는 총기부터 없애버리는게 최우선이었다.
원래는 벽에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건달 두 명이 유진이를 어떻게든 해 보려고 벽과 연결된 줄을 끊은게 유진에겐 호재였다.
손이 묶인 채로 유진은 재빨리 한바퀴 턴 하면서 앞의 두 사람을 밀쳐냈다.
"야! 곰밤탱! 빨리 움직여!!"
"으앗, 네, 누님!!"
손을 못 쓰는 탓에 발밖에 쓸 수 없었지만, 교복치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그닥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치마가 펄럭이며 그녀의 아름다운 속옷이 방안의 모든 남자들에겐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너이새끼들!! 어딜 보는거야!!"
"헉 죄송해요 누님!!"
곰밤탱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렇게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건달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무기를 들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무기는 바닥으로 굴러가버렸고, 결국 싸움은 개판이 되고 말았다.
"어이 학생. 너 뭐야? 뭔데 총을 들고 다녀?"
"이... 이거 안 놔?!"
게다가 선글라스의 여자는 엄청난 힘으로 권총을 쥐고 있는지 대준이 힘을 줘서 움직이려고 해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마에 빡침마크가 그려지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진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유진은 곰곰히 생각하면서도 서둘러 선글라스 여자를 도우러 갔다. 일단은 재빨리 저 위험한 물건부터 없애버리는게 중요했다.
난장판으로 싸우고 있는 두 무리를 지나 대준의 뒤에 도착한 그녀는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뒤에 떡하니 섰다.
"야, 너 심영이라고 아냐?"
"헉! 언제 온거야!"
뒤에서 조용히 말을 건 유진 때문에 대준은 화들짝 놀라 고개만 돌렸다. 그러나 심영은 워낙 오래된 드라마에 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유진은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아이를 못 낳게 만들어주지."
그건 바로 윤하가 얼마전 야인시대 애장판 드라마 시디를 구입했기 때문이다. 아줌마 파워랄까, 전업주부 파워랄까... 여유시간이 많아지고 혼자인 시간이 많아진 윤하의 새로운 취미로 드라마 시청이 생긴 덕분이었다.
[퍽!]
"끼야후읏! 끼요올!!!"
가랑이 사이를 정확히 가격당한 대준은 그대로 권총을 떨어트린 채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쓰러지는 녀석을 보며 선글라스 여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어머, 아가씨 나이스 샷."
"별 말씀을... 아, 저 이것좀 풀어주세요!"
유진은 고꾸라진 대준을 발로 밀어버린 뒤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등을 돌렸다. 그녀는 유진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보더니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 금세 풀어주었다.
"야 이새끼들아 움직이지 마!!"
그런데 그들이 밧줄을 푸는 사이, 떨어진 권총을 건달 하나가 집어 유진 쪽으로 겨누었다. 총구를 보고 화들짝 놀란 유진과 그녀의 똘마니와 달리,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뭐가 우스운지 씨익 웃고 있었다.
"뭘 웃어! 당장 눈 안 깔아?!"
흉기로 협박하는데도 꼿꼿이 고개를 세우고 있던 그녀는 이내 한 마디 말로 전세를 역전시켜버렸다.
"그 총 총알 없어요 바보씨."
"뭐...뭐?"
이내 바닥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건달은, 철컥 철컥 소리만 나는 총을 보곤 탄창을 꺼내봤지만, 그가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찬웅의 발차기가 그의 등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헐, 총알 없는건 어떻게 아셨어요?"
"오래 살다 보면 다 알게 된답니다."
위기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유진이에게 있어선 멋짐 그 자체였다. 마치 후광이 비치는듯한 그녀의 모습에 유진은 자신이 커서 되고싶은 이미지를 멋대로 확정해버린 듯 했다.
세 사람을 역으로 제압한 뒤, 옹기종기 앉혀 놓고 나서 유진은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참, 저기 꼬마는 성왕그룹 2세인것 같거든요? 혹시 내빼면 이거 들이밀면 인정 안할 수 없을거에요."
선글라스 여자는 유진이의 스마트폰을 자신의 것과 맞대더니, 어떤 파일을 하나 전송해주었다. 유진이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궁금했던 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누구세요?"
그러나 그녀는 비밀이 많은지, 지금은 이야기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어짜피 또 한번 보게 될텐데, 인사는 그때 해요 아가씨?"
게다가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그녀는 문 밖으로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뭔가 엄청난 인물에게 도움을 받은 것만 같아 유진은 그녀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아까 보여준 멋진 모습들을 회상했다.
"성왕그룹 2세였냐 너? 근데 왜이렇게 질이 나빠?"
"젠장, 망할 여자. 어떻게 안 거지?"
좀전에 받은 파일을 뒤져보던 유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완벽한 우위를 점한 상태라서 그런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있었다.
"야, 새꺄. 어떻게 할래? 당장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금전으로 보상하고 죄송합니다 말하면서 50번 절할래? 아님 법대로 해결할까?"
유진이 원하는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신나게 때리셨으니 깽값을 주고, 협박했으니 그것도 돈으로 보상하고, 기분이 나빴으니 50번 절을 하라는 것이다.
"하, 내가 왜 그걸 해야하지? 내가 너넬 협박했다는 증거라도 있어?"
그러나 그가 오리발을 내밀 수록 유진의 입꼬리는 더욱 더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다혈질 바보로만 생각하지만, 유진은 생각보다 굉장히 치밀한 사람이었다.
"어머~ 그래? 자 이 녹음기는 뭘까요?"
"!! 저.. 저게 어디에!!"
초소형 녹음기를 어디에선가 스윽 꺼내든 유진은 아까 대준이 한 말을 그대로 들려줬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은 인정할 수 없다였다.
"미안하지만 내가 좀 위험한 일을 많이 겪어서 말야. 너같은애들은 이제 무섭지도 않아 임마."
대준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면서 유진이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권총을 집어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묶여 있는 범죄자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 총에 누구 지문이 묻었을까요? 특히 발사하려고 쥔 방아쇠랑 손잡이 부분 말이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못하고 있는 그의 앞에 다가간 유진은 스마트폰을 집어들고는 녹음 어플을 실행시켰다. 그리고는 찬웅과 한율에게 자신의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자, 내가 각서를 쓸건데 여기다 사인 하고, 그 사인을 너가 했다고 녹음기로 녹음하길 바래. 니가 말 안듣고 깝칠 때마다 요구 금액은 1000만원씩 상승할거야."
"뭐...뭐라고? 천만원? 천만원이 누구 개 이름이냐?!"
"거참 성왕그룹 2세나 되시는분이 쪼잔하게. 쫄리면 뒈지시던가?"
빠르게 자신과 지훈이에게 피해보상금으로 천만원을 지급하겠다는 각서를 적은 유진은 그의 팔을 잠시 풀어주고는 당장 사인하라고 명령했다.
아무리 재벌그룹 2세라도 2천만원은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끝끝내 못마땅해 하면서도 사인은 무사히 마쳤다.
"자, 그럼 이 각서의 효용성을 말로 증명하시고, 50번을 절하시겠습니다. 구호는 절할때 '한유진 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일어날 때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뿌잉뿌잉'이다 알았냐?"
죽을 상을 한 대준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순순히 유진의 요구에 따랐다. 그녀가 잡고 있는 증거들이 그의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날엔 집에서 쫓겨날 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 한유진 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어허 목소리가 작다!!"
그렇게 양아치 윤대준은 유진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절을 72번이나 하고서야 쫓겨나듯 풀려날 수 있었다.
*
무사히 지훈이와 곰밤탱을 데리고 동네로 돌아온 유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하지만 돌아가자마자 그녀를 반기는 건 윤하의 폭풍잔소리였다.
"꺄악!! 너 왜 이렇게 또 교복이 난리가 났어!!"
"아차... 맞다. 그게 엄마, 사정이 있었어!!"
"너 이뇬 쌈질 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또 쌈질 한거야?!"
당장 수습하지 않으면 집에서 쫓겨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유진은 재빨리 녹음기와 각서를 윤하에게 들이밀었다.
"엄마 나 천만원 벌었어!!"
"...진짜?"
간신히 상황 설명을 해주자 윤하는 천만원이라는 액수에 긴가민가 하면서도 그녀를 믿어주는 눈치였다. 유진이는 엄마가 교복을 들춰 자신의 몸에 든 멍을 안 본게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돌아가서 옷을 벗어본 그녀는 또다시 타박상에 물들어버린 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겨우 말끔하게 나았는데. 망할놈의 자식, 천만원에 합의봐준걸 고맙게 생각해야되 진짜."
씩씩 화를 내며 옷을 갈아입은 뒤 샤워를 하려는데, 화장실로 내려가는 그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메시지가 아닌 전화가 왔는지 진동은 계속해서 울려댔다.
"여보세요?"
[아 유진아, 언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아닌 세빈이었다. 오늘 하루 자리를 또 비웠다 했더니 광백에 갔었던 모양이다.
유진은 세빈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운이 났는지 신나서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곧 밤이 되서 위험한데 언제 돌아올거냐는 걱정도 덧붙였다.
[돌아가는 거야 뭐 두 사람이 있잖니. 걱정 마렴. 아 그리고 혹시 내일 일요일인데 약속 있니 유진아?]
"아뇨 없는데요?"
[잘 됐구나. 그럼 니시노를 따라 광백에 좀 와줄 수 있겠니? 부탁할 게 좀 있구나.]
세빈이 부탁을 다 한다는 생각도 잠시, 유진은 그 부탁을 듣고 식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여튼 그럼 이따가 집에서 보자꾸나.]
"네 언니."
전화를 끊은 뒤에도 유진은 한동안 붕 뜬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부탁이 뭔가 굉장한 일이었는지, 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다시 내려놓고는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는 작가에게 힘이됩니다.
선추코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ㅅ'/
-리리플
Z박령님 // 메인 주인공은 유진이랑 세빈이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리 비중이 있어도 마이너 주연 혹은 조연급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