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또다시 물을 한 모금 들이킨 청명은 얼마간 고뇌하고 있는 장 티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뇌가 길어지려고 하자 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
"난 백영으로 가야만 했다. 스파이인 것을 들키지 않은 채로 백영의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어."
또한 그의 말이 계속됨과 동시에, 장 티엔의 머릿속에 흑향의 편지 내용이 계속해서 함께 떠올랐다.
"그러나 결국, 흑귀는 그것을 눈치채고 하필이면 내가 가장 아끼는 내 사랑... 소율이를 시켜 내게 명령을 내렸지. 참, 이건 자네가 지금의 시간대로 오고 난 뒤의 일일세. 난 마지막으로 임무를 받아 떠나기 전, 나에게 임무를 전해준 소율이를 불렀다네. 하지만 그녀는 그 이름에 대답하지 않았지."
[... 대장님은 과거 자신의 모습이 기억나십니까?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대장님은 어떠하십니까. 만약 기억하고 계시다면, 얼마전 자신과 얼마나 달랐는지 생각나십니까?...]
"결국 끝내 나는 그녀를 사령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밖에 없었네.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자 돌아보는 그녀를 향해 한번 웃어보이고 나는 말했지. '소율아, 내가 반드시 널 이 곳에서 구해주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라고.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네. 슬프게도."
[... 제가 하고싶은말은 이게 다입니다 대장님. 전 우리가 이 미래로 내던져진 것이 과연 저들의 뜻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분명 미래로 넘어온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기 전 해야 할 일이 있거나... 이 미래에서 뭔가 알아내고 과거로 돌아라는 신의 계시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만약 대장님도 제 생각에 동의하신다면, 지금 당장 동의하실 수 없더라도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부디...]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나는 흑영을 떠났지. 그 날은 흑영의 제 3대장인 탁암으로써의 마지막 임무였으며, 백영의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날이었다네. 본래 목적은 이백에 침투하여 흑귀에게는 죽은 것으로 알리고 신분을 세탁하여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지만... 흑귀에게 말려들고 만 거지."
[... 부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한세빈과 잠깐이나마 협력하셨으면 합니다. 아무런 목표도 없는 지금의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 사령관님을 만나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꼭 제가 만나고 싶어서 이런 말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외람되오나, 제 의견에 동의하신다면, 한세빈의 제안을 수락하시고 저를 만나러 와 주셨으면 합니다. 대장님...]
"인고의 방이라는 곳이 있지. 백영 내에서도 최고의 악행을 저지른 자들만 들어간다는 그 감옥. 붙잡힌 나는 그 곳으로 가게 되었고, 가는 길에 이노우에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지. 지금 소율이가 흑영에 인질로 잡혀 있다고, 이것만은 믿어달라고."
"... 그래서 이노우에는 그 소율, 아니 사령을 구해주었습니까?"
[... 끝으로 정말 뵙고 싶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장님.]
"글쎄... 난 알 수가 없었다네. 그 뒤로는 백영과 흑영의 전면전이 시작되었기에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만을 접했을 뿐이니까. 내가 그녀를 본격적으로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인고의 방을 나온 뒤부터였다네."
청명이 보기에도 장 티엔은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사령관의 존엄성을 해치는 질문, 바로 그 질문을 그가 제일 아끼는 흑향이 던지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알지. 순응의 저주로 인해 세상은 쑥대밭이 될 뻔 했고, 인고의 방에 갇혀 있었던 나조차도 느낄 정도로 강한 운명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당신은 소율을 결국 구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질문에 청명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되려 물었다.
"그러면 그대는 흑향을 구했는가?"
"...!"
고개를 든 장 티엔이 바라본 청명은 씨익 웃고 있었다.
"내가보기엔 자네도 아직 아끼는 부하를 구하지 못했다네."
절대적으로 틀린 곳이 없는 말이었다. 장 티엔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흑향을 구하려면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그를 잡아채는, 그의 내면속의 무언가가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장 티엔은 모르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흑향이 편지를 보내오기 전까지는.
"흑향을 구하고 싶나?"
"당연한 것을 묻지 마십시오."
"허나 쉽지 않은가 자네가 취해야 할 행동은."
편지를 읽고 나서, 그리고 오늘 청명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마음속의 족쇄가 뭔지 깨달았지만,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재촉해주길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스스로 소율을 직접 구할 방법이라곤 존재하지 않았지만, 자네는 분명한 방법이 존재하고 있다네.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게야."
그리고 오늘, 청명이 그에게 도착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주고 장 티엔을 다그침으로써 장 티엔의 족쇄에 가로막힌 진실된 마음이 비로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저는 저희 사령관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절대 배신할 수 없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저의 신념을 어찌 꺾어야 한단 말입니까."
청명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이야기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게. 자네가 흑영을 배신하는 것처럼 나도 백영을 배신해야만 했지, 그리고 흑영을 위해 일했던 이상 우리는 이미 한번 배신이란 걸 하지 않았는가."
"... 배신을... 했었다니요."
"바로 우리에게 세상을 지킬 힘을 준, '그 분'을 배신했지...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는 흑영에게 사로잡혀 본질을 보지 못한 채 말일세."
* * *
같은 날 광백.
이노우에는 자신의 머릿속에 맴돌던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총수와 면담을 신청한 상태였다. 천단에서 유나가 예지몽을 받는 것을 돕던 서 총수는 그의 면담 요청에 서둘러 제의를 갈아입고 회의실로 내려왔다.
"총수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데 이렇게 급히 불렀느냐."
뭔가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 이노우에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청명 때문입니다."
"청명? 인고의 방에 갇혀 있는 배신자 녀석 말이냐?"
"예 총수님. 정말 중요한 얘기입니다."
배신자 청명에 대한 이야기라기에 서 총수는 처음엔 얼굴을 찡그렸으나, 이내 이노우에의 말에 흥미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방에 들어가면서 제게 말했었습니다. 과거 별동대가 흑귀에 침투했던 1990년을 기억하냐고..."
"아... 그 흑귀를 암살하기 위해 내 부인의 예언을 따라 쳐들어 갔을 때를 말하는 게로구나."
"예. 여튼 그 당시 침투한 별동대가 청명 외에는 모두 죽은 채 성과는 없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사실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서 총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진실과 다르다는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서 근거를 대라는 그의 재촉에, 이노우에는 청명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천천히 계속해 나갔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그들은 흑귀 내 최고의 예언의 힘을 가진 '사령'이라는 인물을 죽이는데 성공했으나, 흑귀의 역습으로 모두 포로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직후 흑귀가 모두를 세뇌시키려 했으나 청명과 소율이라는 아이를 빼곤 모두 자결했고, 청명은 소율을 인질로 잡힌 채 스파이 노릇을 해 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청명이 세뇌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냐는 총수의 질문에, 이노우에는 아직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변하는 흑영의 움직임이 이러한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
"5년 전까지 흑영의 백영 침투 활동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뒤 본격적으로 그것이 재개된 것이 최근 4년... 바로 장 티엔이 제1대장이 되고 난 뒤로부터입니다. 서로 강대한 예언자가 있는 상태라면 당연히 무력 대치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요, 서로 어떻게 될 지를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0년 전 사령이라는 인물이 흑영에서 사라졌고... 새로이 사령이 된 소율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생각한다면? 원래 사령에 비해 예언력이 약한 그녀가 영수님에 비해 미래 예지가 어려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내부 사정을 들키기 전에... 장 티엔이라는 강한 암살자를 이용하여 우리들은 혼란시키고 공격해왔다?"
"그렇지요. 그를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또 있습니다."
이노우에는 이틀 전 흑귀를 습격했던 장소 근처의 지도를 들고 와서는 펜으로 이것저것 그리기 시작했다. 바로 저번에 흑귀가 탈출했던 경로를 그린 것이었다.
"이틀 전 흑귀를 습격했을 때, 그가 장로들을 버리고 우리를 빠져나가는 순간 그를 도와준 건 단 한명이었습니다. 바로 제5장로였지요. 제가 알기론 장로들은 사령의 명령을 듣지 않고 오로지 흑귀의 명령만 듣습니다. 그렇다면 흑귀는 유일하게 제5장로에게만 탈출에 대한 예언을 알려줬다는 이야기인데... 이걸 소율이가 예언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는 지도를 집어넣고 또다른 자료 하나를 꺼냈다. 바로 백영의 일원이었던 소율이에 대한 자료였다.
"이번에 생포한 장로들을 신문한 결과 그들은 하나같이 사령에게 일절 이런 계획에 대해 언급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건 귀능이 역시 똑같이 말했기 때문에 확실한 정보입니다. 게다가 이 소율이에 대한 자료를 보면... 그녀의 예언력은 굉장히 미약한 수준인 게 다시한 번 확실해집니다."
"... 소율이는 그냥 가림막이란 소리구나. 분명 소율이 대신 흑영 내에서 강력한 예언몽을 다루는 사람이 있는 게 이로써 분명해졌군."
자료를 다시 덮어두고 이노우에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마도 청명의 부탁이 담긴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만약 소율의 생존이 확인되면, 부디 그녀를 흑영에서 구출해달라고 말하고는 인고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
죄인의 부탁을 총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노우에도 맘이 편치는 않았다. 하지만 세뇌당하지 않은 채 십 년 동안이나 원치 않은 일을 해 왔던 청명이 계속해서 원해 왔던 것이 바로 소율의 구출이었다는 간절한 마음이 이노우에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원하지 않았던 배신이지만, 엄연히 그가 지은 죄는 분명하기 때문에 그를 절대로 인고의 방에서 꺼내줄 순 없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그의 평생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내가 시간이 나면 직접 청명에게 다녀온 뒤 너에게 알려주겠다 이노우에."
기대하지 않았던 규찬의 선처에 이노우에도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명령하면서도 규찬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청명을 붙잡은 덕분에 숨겨진 예언자가 있다는 것까지 알아내긴 했으나, 그렇게 강력한 예언자가 있다는 것은 백영 입장에서는 굉장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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