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과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청명은 그들이 있기 전인 10년 전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인고의 방에 가둬지기 훨씬 오래 전부터 난 흑영의 스파이로 일하고 있었다네. 처음 스파이로 일하게 된 게 바로 1990년 겨울쯤이었는데 난 그때 백영 별동대 행동대장의 지위에 있었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청명은 말하는게 많이 불편해보였다. 그는 말하는 와중에 혼다에게 물을 좀 가져다줄 것을 요청햇는데, 두 병이나 부탁한 것을 보니 이야기가 꽤 길어질 모양이었다.
"사실 흑영의 스파이가 된 건 내 의지는 아니었다네. 애초에 난 백영의 일원이었고 배신할 생각이 내겐 전혀 없었으니까."
"원래 백영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령관께 복종한 것입니까."
이야기를 이어가려다가 그는 잠깐동안 침묵했다. 그당시 일어났던 중대한 사건을 암시라도 하듯, 그의 눈빛은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난 내 부하, 소율과 함께 늘 행동했지. 그녀는 나보다 몇 살 아래였던 별동대 대원으로 부대장 다음인 별동 1소대 대장이었다네. 아마 자네에게도 있었지? 늘 함께 행동했던 흑향이라는 부대장이."
"그렇습니다. 현재 그녀와 함께 미래로 넘어온 탓에 함께 넘어온 백영의 영수 한세빈을 처리하려다가 되려 당하고 붙잡혀있지요."
"하하, 나도 비슷한 처지였다네. 물론 자네보다 훨씬 안 좋은 처지였지."
원래 백영이었는데 어찌하여 흑영의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서인지 장 티엔도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기 시작했다.
"별동대 임무로 한번은 흑귀를 암살하기 위해 심연에 단 10명만이 침투한 적이 있지. 아마 기록에는 실려 있지 않았을 거야, 실제로 아는 사람도 드물고. 예지몽을 받고 예지몽대로 작전을 수행하던 그날, 우리는 흑귀 제일의 예언몽을 다루는 '사령'이라는 여자를 암살하는데까지 성공하지. 하지만 성공은 거기까지였어, 늘 그녀와 함께 붙어있다는 흑귀는 이미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고 되려 사령을 암살한 우리를 모두 함정에 빠트렸지."
"그런일이 있었다뇨? 그 당시엔 제가 심연에서 수련을 할 때인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게다가 90년 당시 장 티엔은 어린 나이로 대장의 지위에까진 오르지 못한 때였기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울 수 밖에 없었다. 한창 암살자로써의 수업을 받고 있던 그의 20대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붙잡혔고, 흑귀는 자신을 위해 일하라며 우리를 배신하게 만들었다. 허나 생포되었던 9명 중 그의 말을 따르는 자는 한 명도 없었지. 결국 본보기로 2명이 우리가 보는 앞에서 살해당하고, 잔인하게도 그는 세뇌라는 악독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지."
"세뇌요? 정말로 사령관님이 세뇌를 사용했다는 말씀입니까?"
장 티엔은 믿을 수 없다고 반박했지만 청명이 말해주는 것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사령관을 믿어야 하는 부하의 입장에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생기기 시작하자 점점 커져가는 의구심을 막을 길이 없어졌다.
"자네들까지 세뇌했는지 나는 모르지. 하지만 그는 분명 최면술사들을 데리고 있었고, 그를 통해 우리들을 세뇌하려했어.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그가 자네들을 굳이 세뇌시킬 필요가 있단 말인가? 흑영 세력은 내가 알기론 자체적으로 그의 세계를 다시르겠다는 야욕에 동의한 집단으로 알고있는데 말이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런 진실은 믿기가 어렵군요. 저희 사령관님은 그동안 생포한 적들은 살려둔 적이 없으셨습니다. 모두들 즉결 처형했었다구요."
"하하, 자네가 흑귀 본인은 아니지 않는가? 사실을 알고자 해도 본인이 아닌 이상 그가 숨기고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걸세."
청명은 다시 물 한모금을 들이켰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곧 손뼉을 탁 치더니 인상을 팍 썼다.
"여튼, 그렇게 세뇌하려는 흑귀에 반해 잡힌 우리 동료들은 자결로 응수하기로 했지. 이대로 세뇌당해 백영을 배신하느니 죽음을 택하는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하지만 흑귀는 그것조차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지."
"하지만 묶인 상태에서 어떻게 자결을 한단 말입니까. 설마..."
"뭐 자네가 생각한 대로 혀를 깨물었지. 하지만 나머지 동료들과 달리 나와 소율은 죽음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어... 결국 나중에 발견될 당시 우리 둘은 입에 피를 흘리고는 있었지만 자결엔 실패했다네."
자결이라는 이야기에 흑향이 생각나버린 장 티엔은 잡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흘리는 흑향의 모습을 직접 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잡혀온 이후 고통받고 있을 흑향을 생각하면서 그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게 한참동안 단식 비슷하게 물만 먹던 그는 흑향이 무사히 회복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겨우 밥을 입에 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내가 그 이후 이렇게 고통받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후회했지. 그날 죽지 못한 나와 소율이는 결국 세뇌당하기 시작했다네."
장 티엔은 생각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청명과 소율의 관계가 어떠했었는지를. 과연 그의 관계는 지금 자신과 흑향의 관계만큼 특별했었던 것인지를.
"정신적으로 연약한 소율이는 금방 흑귀에게 세뇌당해버렸고, 그는 소율이의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그녀에게 내렸지. 아마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일거야."
귀로는 청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머리 속에는 저번에 흑향이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이 가득했다. 흑향이 보고 싶다면 세빈의 제안을 수락하면 될 것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고 있는 장 티엔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고민하고 있단 말인가.
"'사령'. 바로 우리가 죽였던 흑영의 최고 예언자였다네. 흑귀는 소율이를 데려가 우리가 죽인 예언자 대신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었지. 결국 내 이름마저 완전히 잊어버리고 흑귀를 위해 예언몽을 사용하기 시작한 소율이는 지속적인 세뇌로 결국 자신이 원래 누구였는지까지 잊고, 흑귀가 부여한 '사령'이라는 인물이 되어 그의 직속 비서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네."
[... 대장, 전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 백영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까. 사령관님은 분명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무지한 범인들 대신 우리가 세상을 장악해야만 한다고 하셨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자꾸만 제 머릿속을 채워나갑니다...]
"하지만 난 끝까지 세뇌당할 수 없었다네. 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소율이를 잃게 된 데다가 멀어지는 그녀의 뒷 모습에서 환청처럼 들려오는 '구해줘'라는 애타는 목소리때문에... 차마 죽을 수도 없었지."
[... 이상하지요. 하지만 몇달이나 미래에서 우리에게 명령도 내리는 사람 하나 없이 행동하다 보니 제 머리가 이상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굉장히 애매한 지경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대장. 한세빈을 처리해야한다고 해도 죽여야 하는지 생포해야 하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과연 그녀를 처리한들 이미 꼬여있는 이 시공간속에서 보여지는 미래를 보면 흑영은 먼 미래에 온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난 세뇌당한 척, 흑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지. 다행히 그 뒤로 난 흑영의 제 3대장이 되어 여러번 고위 간부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흑귀 옆을 죽은 눈으로 지키고 있는 소율이를 수도 없이 봐 왔다네."
[...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정말 외람되고 버릇없는 의구심일지도 모릅니다 대장님. 감히 사령관님을 의심하려 하는 중이니까요. 그렇지만 이곳에 갇혀 회복하는 동안 드는 수 많은 생각중, 이것이 저를 가장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끝까지 읽어주십사 합니다...]
"어떻게든 그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스파이 노릇을 계속해왔지. 흑귀는 개인적으로 나에게 언제나 경고해 왔다네... 허튼 짓이라도 하는 순간 소율이를 죽이겠다는 협박이었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시에도 죽이겠다고 그는 시도때도 없이 날 협박했다네."
[... 부끄럽지만 사실이었습니다. 대장님께서 절 구해준 이후로 단 하루도 대장님을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래서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대장님의 모든 표정을, 모든 눈빛을, 모든 행동들을...]
"애석하게도, 수도 없이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보려고 생각했지만 무리였다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는 나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빠져나갈 곳이라곤 전혀 없었으니까. 결국 잡혀있는 소율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10년이 흘렀고, 나는 결국 결심을 하는 수 밖에 없었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율이를 흑영에서 구해 내고 말겠다는 목숨을 건 행동을 해야 했다네."
[... 그런데, 분명 달랐습니다. 과거 피도 눈물도 없었던 흑영의 제1대장이었던 대장님과, 그보다 더 이전 저를 구해주셨던 대장님은요. 하지만 저를 구하셨을 때와, 최근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걸 이제와서야 깨닫게 된 건, 저도 모르게 제1대장이셨던 대장님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아주 예전의 대장님 모습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흑영 내에 존재하지 않았지. 결국 내가 처음부터 가야 할 곳은 한 곳밖에 없었던 게야."
들려오는 청명의 이야기, 그리고 떠오르는 흑향의 편지의 내용은 점차 그 경계를 잃어 가며 마치 하나의 이야기가 된 듯 장 티엔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지금 막 떠오른 생각이 아닌, 미래로 넘어온 뒤 몇 번이고 들었던 의심이었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사령관에 대한 감히 할 수 없었던 그런 생각들이 '이젠 믿을 수 있겠어?'라고 그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결국 혼란스러워진 그는 청명의 이야기를 제지할 수 밖에 없었다. 온 몸에 흐르는 식은땀이 그의 혼란스러움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고, 수도없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봐도 되돌아오는 똑같은 대답이 그에게 무엇이 진실인지 계속해서 각인시키고 있었다.
'말도 안돼.'
============================ 작품 후기 ============================
공지에도 띄웠듯이 가제였던 소설 제목을 고쳐 썼습니다.
또한 이번화에 흑영의 중심 은거지 명칭이 '흑귀' 에서 '심연'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전화에 등장한 이름도 모두 수정중입니다.
이는 흑영 사령관인 흑귀의 이름과 헷갈리는 관계로 수정한것이니 양해부탁드립니다.
즐감하시기 바래요.
추천,코멘,선작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ㅅ;/추천+선작 해주시는분들 늘 감사합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