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 *
2000년 4월 15일.
"그래 사령, 무슨 예지몽이었느냐."
밤늦게 흑귀의 처소로 찾아온 사령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밤중에 갑자기 꾸게 된 예지몽으로부터 필시 엄청난 미래를 보고 왔음이 분명했다.
"정확히 날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6월 중순쯤입니다. 흑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숨이 붙어 있지 않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
흑귀는 예지몽 얘기를 듣더니 안색이 변했다. 분명 그녀가 본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흑귀 내부에 적이 침입해 모두들 당한 상황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들 상처 하나 없이.. 마치 혼만 빠져나간 듯 죽어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불길합니다 사령관님."
사령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자 흑귀는 깊이 고심했다. 뭔가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을 하는 듯 했으나, 이내 그는 해야 할 말을 정한 듯 사령에게 일렀다.
"즉시 전 장로들에게 예지몽에 대해 알리고, 저주의 준비를 더욱 앞당기라고 전해라. 늑장부리는 순간 우리의 패배라고!"
"네, 사령관님."
흑귀가 명령서를 써 주기가 무섭게 사령은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방 밖으로 나간 뒤에도 흑귀는 가만히 서서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그는 이내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띄우며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큭...큭큭큭... 큭, 크흑..큭...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군. 이거야 원.. 일이 너무 쉽게 풀려나가서 재미가 없어질 정도구만..."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을 웃던 그는 곧 기쁜 표정으로 다시 잠에 들었다.
*
"그게 사실이냐!"
같은 시간 광백에서는 유나 역시 비슷한 예지몽을 꾼 뒤였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강한 예지몽때문에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간신히 귀술을 불러 부축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네 총수님. 너무 강력한 예지몽이었습니다... 게다가 내용이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사령과 달리 유나가 본 예지몽의 배경은 광백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혼만 빠져나가 죽은 것 같은 상황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순응의 저주라는게,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었단 말입니까?"
".. 그렇지. 지금껏 제대로 이야기 해 준 적이 없는 것은 나로써도 그 위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저주의 이름이 순응의 저주인데 반해 저주가 터지고 난 뒤의 상황은 마치 죽음의 저주같은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유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규찬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총수님, 이 저주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과연 사람들의 기운만 모아서 대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안 그래도 지금 이노우에의 별동대를 시켜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러나 진즉부터 알아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영 쪽과 마찬가지로 수확은 크게 없는 모양이었다. 저주의 날 이전에 확인이 가능할지도 미지수였다.
"이래서야.. 저주를 원천 차단하는 것 외엔 딱히 방법이 없겠군요."
"안그래도 그래서 이노우에와 내가 부단히 찾아보고 있다. 저쪽 장로 중 2명을 처리했으니 속도는 늦춰지고 있는 모양이다만.. 최근 귀능이에게 들은 바로는 5장로라는 녀석이 엄청난 기세로 악념을 모으고 있는 듯 하다."
유나는 이젠 기댈 방법은 저주를 차단하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도 기운을 받으면서 최대한 예지몽을 끌어내 보겠다고 했다. 그 5장로라는 녀석을 찾아만 낸다면 분명 충분한 악념이 모이는 것을 막아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괜찮겠느냐, 그 정도로 신경을 썼다간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모른다 아가!"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러다가 세계가 악에 물들고 우리 모두가 죽게 생겼습니다."
단호한 결정에 규찬도 두손두발 다 들었는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유나가 최대한 명상을 할 수 있도록 그는 최대한 안전한 장소에 그녀가 머물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유나가 다시 원래 처소로 돌아간 뒤, 규찬은 서둘러 귀술을 불렀다.
"귀술아, 어찌되었건 간에 부영수님을 천단(天壇)에 모시고 일주일에 한 번씩만 사람들과 만날수 있도록 하거라."
"예지몽을 받는데 주력하시는겁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는 귀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비록 힘들겠지만 최대한 힘내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 * *
2032년 4월 16일.
3일 내내 깊이 생각한 흑향은 자신 곁에서 지키고 있는 혼다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다. 자신이 자필로 편지를 쓸테니 그걸 장 티엔에게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걸 굳이 전해줘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아마 이대로 두면 우리 대장은 절대로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실 거다. 그래도 좋다면 거절해도 상관은 않겠어."
혼다는 그녀가 혹시 모를 암호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편지를 여러번 읽어 보았지만 딱히 문제될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내용을 확인한 그는 흑향에게 물었다.
"과연 이걸 전해준다고 장 티엔의 마음이 변할까?"
"글쎄.. 확실히 변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대장의 마음을 어느정도 흔들리게 할 수는 있겠지."
그는 흑향의 편지에 딱히 설득하는 것 같은 내용은 없었기에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살짝 의심하면서도 그는 일단 편지를 전해주기로 했다. 움직이려는 혼다에게 흑향이 말했다.
"고맙다."
여태껏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한적이 없는 그녀가 뜬금없이 저런 말을 하자 혼다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살려줘서 고맙다는 건지, 편지를 전해줘서 고맙다는건지. 편지를 전해주면 장 티엔의 의지를 꺾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그게 고마워할만한 일인가?
"..."
결국 그는 딱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독방으로 걸어가버렸다.
*
같은 시간 세빈은 명상에 잠겨있었다. 한참을 예지몽을 보기 위해 애쓰던 그녀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 소리에 집중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가볍게 한숨을 쉰 그녀는 하필 집에 아무도 없음을 곧 깨닫고 거실로 걸어나갔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그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기억하던 앳된 목소리가 아닌, 이제는 완전히 연륜이 가득한 중년이 되어버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하하, 잘 계셨나요? 전화가 너무나 늦어버렸군요."
"진아, 진이 맞니?!"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늘 어리고 투정만 부리던 그녀의 아들 서진이었다. 그 어렸던 자식이 할아버지가 되어 전화를 걸어온 것은 세빈에게 충격이자 반가움이었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혼다와 니시노를 보내두고도 이제서야 연락을 드리네요. 하여간 전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불효자 같네요 어머니."
"녀석! 그래도 지금 시대를 보니 네가 훌륭히 잘 해냈더구나... 그토록 우리에게 얽히기 싫어하던 너가 결국 백영의 일원이 된 것도 모자라 총수가 되어있다는게 나로썬 기쁘기 그지없구나."
"하하.. 뭐 그것도 다 어머니 덕분이죠."
진은 과거 세빈이 역명자로써 저주를 막아낸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상황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뒤 서 총수와 유나, 그리고 그의 친구들에 의해 그는 윤하를 구하고 세상을 조율하는 일에 몸담게 되었다. 결국 세빈의 죽음으로 인해 진이 각성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장 티엔을 잡아두긴 했는데 아직 그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지.. 애초에 적에게 뭔가를 제안한다는 것 자체도 내키진 않았다만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가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 주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는 장 티엔으로 인해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타개할 한 가지 묘수 역시도.
"어머니, 그의 마음을 돌릴 만한 사람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뭐.. 지금은 백영의 일원은 아니시지만 어머니께서 직접 부탁하신다면 이분께서 움직이실 지도 모르니까요. 어떻게, 만남을 주선해드릴까요?"
세빈은 누구에게든든 실낱같은 도움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만나보겠다고 했다. 진은 약속을 잡은 뒤 알려주겠다고 그녀에게 알려준 뒤 한동안은 그녀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다. 미래로 넘어온 어머니지만 분명 돌아가신 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게 된게 그로써는 신의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참, 세상살이라는 건 알 수가 없네요. 그 당시 사라지셨던 어머니를 32년이나 지나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그러게 말이다. 나로써도 신께 감사해야할 일이구나.."
한참을 즐겁게 통화한 진은 바쁜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조만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통화를 끝내기 전, 그는 세빈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참,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는 거지만 어머니,"
물론 혹시나였다. 하지만 혹시 필요하게 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거라고 조언해주는 것이었으므로 세빈은 고맙게 받아들였다.
"만약 문제가 잘 풀리지 않으시면, 제 딸아이 윤하에게 말씀해보십시오."
"윤하에게.. 말이냐? 저 아이에게 뭔가 도움이 될만한 힘이라도 있는 게냐?"
"그건.. 나중가면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분명 그 아이가 도움이 될 테니 염려 말고 어려울땐 도움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진의 말은 강인했다. 세빈은 윤하에게 딱히 대단한 능력이라던가를 느끼지 못했었기 때문에 굉장히 아리송했지만, 자신의 아들이 저렇게 말하는데 일단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럼,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뵙도록 하죠 어머니!"
세빈은 진의 건강하시라는 말에 너도 건강하라고 화답했다. 통화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으니,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었는지 잘 보여줬다.
"부디 다시 만날 때 까지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치고 그녀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다시 명상에 잠기기 시작한 그녀의 머릿속에 진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고마운 마음에, 그리운 마음에, 그 후로도 한동안 그녀는 쉽게 아들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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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과 코멘트는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ㅅ'/연재하면서 1부 수정하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하루종일 글만 붙들고 있는데도 양이 어마무시하긴 합니다.
소설가분들 진짜 매번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