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 *
2032년 4월 13일.
예정보다 몇 주 정도 더 늦어진 지훈이가 퇴원하는 날, 유진은 미리 조퇴를 하고서 병원으로 지훈이를 데리러 왔다.
"이제 움직이는데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군요. 촬영 결과로도 뱃속의 장기들도 거의 원래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한달간은 심한 운동은 금물이고 장에 무리가 가는 음식도 금하도록 하세요."
의사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고는 퇴원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 지훈이는 굉장히 신이 났는지, 유진이를 보면서 싱글벙글이었다.
"드디어 이 환자복을 벗는구나! 진짜 학교 가고 싶어 죽는줄 알았어!"
그러나 신나 있는 지훈이와 달리, 저번 사건의 충격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는 유진이는 굉장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지훈이가 옷을 다 갈아입고 병실 밖으로 나오자 유진이는 그의 손을 덥썩 잡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너 앞으론 절대 내 곁에서 벗어나지 마 알았어?"
유진은 걱정되서 하는 소리였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지훈이 시점에서는 마치 프로포즈 하는 것 마냥 보였다. 게다가 당연히 유진은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비추어지는 지 알리가 없었다.
"아.. 알았어."
"내가 절대로 지켜줄테니까 말야 무슨 위험이 있어도. 알았어?"
"어... 으.. 응."
그녀는 절대로 주의하라는 말과 함께 지훈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설레이는 지훈이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는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끌려가던 말건 유진과 손이 닿아있다는 생각에 지훈이의 심장은 멈출줄 몰랐다. 어떻게든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훈이는 병실에서 홀로 생각하던 아이디어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마, 맞아! 내가 병원에서 놀기만 하진 않았어. 엄청난 것들을 생각해냈는데 함 들어볼래?"
"오 진짜? 연계기동 이상으로 대단한거야?"
다행히 유진이가 호기심이 생겼는지 자연스럽게 손에 힘이 빠졌다. 꽉 잡혀있던 손이 조금 풀리자 지훈이도 긴장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응, 당연하지! 그것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작용 프로토콜을 생각해뒀거든. 아마 이 기술만 실현이 가능하다면 경호하는데 진짜 하나도 어렵지 않을걸?"
하지만 그 말이 실수였다. 지훈이는 아마 자신이 그렇게까지 빨래처럼 털릴 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호라는 말에 흥분한 그녀는 지훈이의 양 어깨를 쥐어짜듯이 붙잡고서는 당장 말하라고 그를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간 광백의 내부에선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장 이 문 열지 못해?! 빨리 문 열라고!!"
유리벽 안쪽에서 쉴새 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찌나 세게 쳐대는지 근처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혼다가 무슨 일이냐고 의료진들에게 물었다.
"저.. 그게 흑향이 당장 장 티엔을 만나게 해달라며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뭐야 또?"
또라는 말을 보니 분명 몇 번이고 비슷한 상황이 그간 연출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이곳에 잡혀온지도 근 한달이 넘어가고 있었기에 흑향은 어떻게든 장 티엔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혼다는 조심스럽게 병실 안쪽과 연결된 마이크로 흑향에게 말했다.
"그건 불가하다 흑향. 네 대장이 아직 우리 영수님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무슨 제안! 그딴거 상관없고 당장 얼굴이라도 보게 해 달란 말이야!! 너희들 설마 우리 대장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것 아니냐!!"
엄청나게 버럭버럭 질러대는 그녀의 고함 소리로 인해 혼다는 잠시간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뗐다가 다시 댔다.
"어찌됬던 너희 대장이 영수님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절대 둘을 붙여줄 순 없다. 이건 장 티엔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녀석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을 뿐이지."
장 티엔이 제안에 대해 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락을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은 흑향으로 하여금 의문을 자아냈다. 도대체 무슨 어려운 제안을 했길래 그가 이렇게도 오랜기간 고민하고 있단 말인가.
"설마 사람 목숨이 달린 제안인가?"
"그건 말해 줄 수 없다."
"그거라도 말해달라고! 목숨이 달린 거냐?!"
몇 번인가의 실랑이 끝에 혼다는 결국 간단하게나마 제안에 대해 이야기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워낙 그녀의 드센 반항도 있었고, 얘기해주지 않으면 자해하겠다는 섬뜩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수님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보탤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장 티엔은 그전에 널 먼저 만나게 해 줄 것을 요구했지. 우리로서는 장 티엔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협력하겠다는 확실한 증언과 함께 너를 인질로 잡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태다. 이 정도면 설명으론 충분하겠지?"
혼다가 그 이야길 해주고 난 뒤 점심시간이 되기까지 세시간이란 시간동안 흑향은 깊이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녀도 장 티엔이 자신을 유별나게 신경써주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던 터라, 그가 어떻게든 자신을 먼저 보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힘을 보태다니? 어제까지만해도 죽이려들던 적에게 제안할 만한 것은 아니지 않나. 언제 다시 목숨을 노릴 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런 제안을 하다니.. 한세빈도 참 대단한 여자군.'
점심을 대충 해치운 흑향은 병상에 앉아 멍하니 생각을 계속했다. 분명 다시 보게 되면 장 티엔이 자신에게 따귀를 날릴 것이라는 생각이 또다시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결은.. 하면 안 됬었나.'
그의 발목을 잡기 싫어 했던 행동이라지만, 지금까지 자신을 챙겨주었던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배신감이 드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장 티엔의 입장에선 흑향이 살아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는데 목숨을 버리려 하다니, 한 대 맞아도 쌀만한 행동이다.
그리고 아무리 흑귀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녀였지만 몇 달 동안 직접적인 명령도 받지 못한 채 미래에 머물러 있다보니 그 충성심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머릿속에 뜬금없이 던져진 질문은 그녀의 정체성을 흔들기 시작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흑영으로 귀환한다 해도, 과연 사령관님께선 우리 두 사람을 여전히 신뢰하고 계실까? 혹 우리가 미래에서 본 것을 이야기했다간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한다며 불순분자로 지목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옳지 않은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머리를 벽에 쿵쿵 부딪쳤다.
'그래, 믿어야지. 사령관님은 분명 우리를 위해 힘쓰고 계시다. 절대적으로 신뢰해야만 한다...'
갑작스런 깊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데다가 아까 먹은 점심이 소화되기 시작해서인지 조금씩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과거론 돌아가고 싶어. 지금 우리가 있는 미래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잠들기 직전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그녀의 대장이었다.
'대장님.. 보고 싶습니다.'
*
"다녀왔습니다!"
유진이 집에 돌아오자 집에있던 윤하, 세빈, 니시노 세 사람이 그녀를 반겼다. 그런데 그들은 뒤따라 들어오는 낯익은 사람을 보고는 더욱 표정이 밝아졌다.
"지훈아! 퇴원했구나!"
윤하가 앞치마바람으로 서둘러 달려나와서는 멀쩡히 걸어나온 지훈이를 꼭 안아주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당당히 걸어돌아온 그가 굉장히 대견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집에 먼저 가지 왜 이리로 왔어. 네 아버지랑 어머니가 걱정하실텐데."
"아.. 그게, 유진이가 불안하다고 혼자 있지 말라고 난리를 쳐서요."
"난리라니!!"
그 말에 윤하는 버럭 소리를 지른 유진을 째려봤다. 유진이는 윤하의 '당장 집에 보내주고 와'라는 무언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쉽게 굽히지 않았다. 여자가 된 후로 나름 순순히 자신의 말을 잘 따르던 딸이 말을 듣지 않자 윤하는 심기가 살짝 불편해졌다.
"그..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혹시 모르니까 지훈이한테 소형 무전기랑 카메라 달아주고, 저번에 테스트한 연계기동 장비도 달아줄거란 말야!"
세빈은 연계기동이라는 말에 저번에 장 티엔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그 상황이 떠올랐는지 괜찮은 생각이라며 유진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니시노도 어짜피 세빈은 유진과 니시노 둘이서 지키고 있으니 연계기동 장비는 그렇게 쓰는게 좋겠다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졸지에 3:1이 된 윤하는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저녁 먹기 전까지는 끝내라는 말만 하고는 스마트폰으로 당장 지훈이의 부모님께 연락할 것을 명했다.
방에서 장비를 지훈이에게 달아주면서, 유진이는 말했다.
"그나저나 아까 집에 오면서 한 얘기, 정말 굉장한 거 같아. 너 그거 실제로 구현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냐?"
"음.. 두 달 정도?"
"너무 오래걸리는데..."
"야! 두달도 엄청 빠른거야! 진짜 너같은 애들때문에 공돌이들이 죽어나는거라고!"
그녀는 아까 지훈이가 이야기한 연계기동 장비로부터 전원을 넣어 본체로 이어지는 역기동과 고글을 통한 시야 및 음성 공유, 그리고 자동 도주 기능 등을 어떻게든 세빈이 돌아가기 전까지 손에 넣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훈이도 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도와주면?"
".. 그건 모르겠다. 지금껏 누구 도움 받아서 회로를 구상하거나 해본 적은 없어서."
지훈이는 물론 그녀와 함께 계속 뭔가 만들어내고 아이디어를 구상한다면 즐겁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곁에 있으면 어떻게든 빨리빨리 하라고 자신을 닥달할 것이 뻔했기에 동시에 불안감도 들었던 것은 당연지사. 유진이와 함께하면 행복함과 채찍질이 동시에 오는 셈이었다.
"어떻게든 한달 안에 안 될까?"
분명 유진은 어떻게든 세빈에게 수트를 입혀 보내고픈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의 자동 도주 기능은 세빈의 안위 문제에 있어 가장 탁월한 선택이기도 했다. 애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보던 지훈이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몇 주간 자신이 잠을 몇 시간이 잘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최대한으로 당긴 스케쥴을 내놓았다.
"알았어. 해 볼게."
".. 고마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함과 동시에 날아온 유진의 포옹은 신기하게도 절망적인 지훈이의 마음을 쉽게 긍정적으로 바꿔놓았다. 어찌보면 지훈이는 머리가 좋긴 해도 생각보다 굉장히 단순한 녀석일 지도.
============================ 작품 후기 ============================
추천과 코멘트는 작가에게 힘이됩니다 o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