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5.본심>
"서둘러라!! 적들이 근처에 있다!"
"이번에도 놓칠 순 없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놈들을 처리해!"
1987년 여름날, 밤 늦은 시간 인천 연안부두.
"대장님, 적과의 거리는 불과 20여미터입니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포위 가능합니다."
"지금 누가 적을 쫓고 있지?"
"최전방에 진위가 추격하고있습니다."
백영 정예 부대 제1군 대장 서규찬, 당시 나이 31세. 그는 그동안 끈질기게 추적해온 흑영의 암살자 집단을 발견해 내는데 성공하여 드디어 이날 밤 공격을 감행했다. 기습 공격으로 암살 집단 대부분은 잡히거나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두 명의 암살자들이 도주하는 것을 현재 추격 중인 상태.
"이대로 쭉 가면 민가쪽이다. 밤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무조건 그 전에 저들을 잡아야한다!!"
"예 대장님!"
"진위랑 무전해서 빠르게 포위하도록 해라, 적은 단 둘이다!"
"알겠습니다. 즉시 전달하겠습니다!"
빠르게 부두 컨테이너 사이를 달려가면서 서규찬은 혹시모를 민간인 피해에 대비할 것은 부대원에게 알렸다. 도망가는 암살자들의 경우 언제든지 민간인을 인질로 삼을 수도 있고,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힌 뒤 그들이 상해자를 돌보는 동안 도망치는 건 이미 익히 알려진 전법이었다.
[대장님, 한명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포위망이 없어 민가로의 이동이 불가피합니다!]
그렇게 민가로 넘어가면 안된다고 일렀거늘! 규찬은 혀를 차며 저 멀리 보이는 부두의 끝에 차를 대기시키라고 명령했다.
[타겟 민가 진입중! 적과의 거리 현재 10미터가량!]
계속해서 들려오는 무전 소리를 간신히 들으며, 규찬은 준비된 차량에 뛰어들듯이 올라탔다. 엄청난 마찰음과 함께 빠르게 출발한 차량은 곧 한 블럭 안쪽의 암살자가 보이는 곳까지 접근했다.
"이 앞에서 우회전!"
그러나 적을 잡기 바로 직전, 무전기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불과 적이 있는 골목까지 몇 미터도 남기지 않은 때였다.
[이, 이런! 피하십시오!!]
[엄마!!]
규찬은 곧 민간인이 당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차가 골목 끝에 멈춰섬과 동시에 암살자가 사뿐하게 차 위를 밟고 도로를 뛰어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큰일입니다 대장! 심각한 상처를 입어서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하지만 규찬은 바로 옆으로 뛰어가는 암살자 때문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이제 겨우 암살자 집단을 모두 소탕해서 백영 사람들에 대한 연쇄 암살을 끊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놓치긴 죽어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제발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대장 어서 차로 부상자를 옮겨-"
흘낏 본 삼사십대 쯤 되어보이는 여성은 어깨부터 가슴께로 크게 창상을 입은 상태였다. 분명 그쪽도 급했지만, 규찬은 도망치는 암살자와 반대 방향에 있는 병원으로 부상당한 민간인을 옮길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뭣들 하고 있어!! 당장 움직여라!! 암살자를 놓치고 싶나!!"
"하, 하지만 대장님, 이대로라면 민간인이...!"
울먹이는 소년의 애절한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규찬은 당장 움직이라고 진위를 몰아세웠다. 그리고 본인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도망가는 암살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진위,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암살자를 처단한 후 네 녀석 역시 처단하겠다!"
"대장님!!"
"상백 너도!! 뒤따라오는 녀석들에게 민간인 이송 및 치료 요청하고 너의 둘은 당장 움직여!!"
".....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백은 진위를 태운 채 엑셀 페달을 밟았다. 달려가는 그의 뒤쪽에 눈물로 얼룩진 채 슬픔에 가득찬 표정을 하고 있는 소년이 멀어져가는 차와 규찬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규찬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제발... 도와주세요..."
소년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가며 시야가 뿌애졌다. 이내 감긴 눈 위로 드리우는 빛을 느낀 그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으레 보던 풍경이었다.
"... 또 그 꿈이군."
익숙한 광백의 총수 거처 천정을 멀뚱히 쳐다보던 그는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냈다. 오랜만에 다시 꾼 그 꿈으로 인해 최근들어 싱숭생숭해진 그의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웠다.
'결국 그 날 암살자 하나는 놓치고... 뒤따라온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찾았지만 마땅한 이동 수단이 없어 도보로 옮기던 중 사망...'
서 총수는 병원에서 다시 만난 소년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복수심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이글이글 타오르던 소년의 눈이.
장례식까지 자비로 치러준 뒤 어떻게든 소년을 지켜주고 싶었던 규찬은 물심양면으로 소년을 도와주었지만, 몇 달 뒤 소년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 날 암살자와의 전투로 진위는 결국 생명을 잃게 되었고, 상백은 더 이상 그를 따르지 못하겠다며 백영의 일원이기를 포기했다. 결국 그 이후 규찬에게는 그날의 선택이 살면서 겪은 선택지 중 가장 최악의 것이 되어버렸다.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보면서 날짜를 세어 보던 그는, 6월 중순께에서 날짜 세기를 멈췄다. 그리고는 무전기로 귀술을 조용히 불렀다.
*
2000년 4월 11일. 심연 내부 비밀회의실.
"다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소."
언뜻 보면 모든 장로가 모여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 회의에 참석한 이는 4명 뿐이었다. 8장로중 2명의 장로는 계속된 백영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고 나머지 2명의 장로들은 이번 회의와는 뜻이 맞지 않아 불참한 상태였다.
"역시 5장로와 7장로는 결국 불참인 것이군."
앞에 서 있는 것은 1장로였다. 이 비밀 회의를 몇 주 전부터 주도해온 사람이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사태를 제일 먼저 직감한 사람 중 하나였다.
"몇주 째 언급하지만, 사령관님이 준비하라 이르신 '순응의 저주'에 대한 안건이오. 혹시 자세히 조사해 본 사람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흑귀 내부에 보관중인 자료는 하필이면 이 저주에 대한 내용만 거의 사라여 있는 상태였소."
애초에 저주라는 것은, 꿈꾸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청명으로 하나였던 시절부터 금지된 술이었기 때문에 다루는 것이 일절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서적으로조차도 남기지 말아야 했고, 남아있는 술이 담긴 서적들은 전국, 중국과 일본을 통틀어 대부분 소거된 상태였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사령관 흑귀의 주도 하에 외국으로부터 동양적 저주에 기인한 주술책이 다량 흑영으로 흘러들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순응의 저주'의 내용이 담긴 서적은 극히 드물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기원으로부터 알아본 결과 아주 예전부터 있었으나 그 위험성 때문에 잘 다루지 않았던 저주라고 합니다. 실제 사용된 사례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사령관님께서는 단순히 백영 말살을 위해 준비한다고 하셨지만 확실히 알려진 저주도 아닌데 이렇게 막 준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싶기도 합니다."
그 말에 모든 장로들이 동의를 표시했다. 2장로로 위장하고 있는 귀능도 이들 중 한 명이었는데 그동안 수 많은 흑귀 내부의 기밀자료를 다뤘던 그로써는 더욱 의구심이 가는 부분이었다.
"현재 모인 악념의 수는 350병 가량. 특히나 제 5장로가 말도 안되는 속도로 악념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도 사령관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모으곤 있으나 그 수는 5장로에 비해 택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도대체 뭘 하길래 그렇게 빠르게 악념을 모으는 겐지.."
4장로는 혀를 끌끌 찼다. 장로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었다. 연륜이 있는 만큼 그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기 때문에 백영의 일원인 귀능과 거의 비슷한 수의 악념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찌되었든, 악념 500병이 모이면 만명 분의 악념입니다. 순응의 저주라는 것이 정체가 무엇이든간에... 악념 1만명 분이 술에 소비된다는 사실은 이 저주가 어마무시한 녀석이라는 걸 말해주는 셈이지요."
말을 이어가며 1장로는 수첩에 간단히 회의 내용을 계속 기록해나갔다. 또다시 의견을 내놓은 것은 귀능이었다. 이번 의견은 모든 장로들이 동의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동방에서는 이 저주에대한 정보를 찾기 쉽지 않습니다. 지금 저도 사령 외에 다른 부하들을 시켜 서방에서 자료를 찾아보라고 일러둔 상태입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다면 바로 회의를 소집토록 하겠습니다."
"거 좋은 소식이군요. 그럼 다음 회의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즉시 열도록 하지요."
순응의 저주에 대한 회의가 대충 정리가 되어가는 분위기에서 귀능은 고민하던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알수 없는 저주에 대한 본질을 알아내는 데는 모두들 동의하는 분위기였지만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만은 확실한 장로들이었기 때문에 귀능이 뜬금없이 던진 의문점은 세 장로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해가 넘어오고 난 뒤, 사령관님께서 조금 변하셨다는 생각 혹시 안 드십니까?"
그러나 의문을 제기한 귀능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철저히 조사하여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는 질문을 던진 것이었기에, 불안해하는 장로들마저 긴장하게 만들었다.
"허... 허허 이사람아, 설마 사령관님이 다른사람으로 바뀌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래 그래. 예끼, 혹시 사령관님 귀에 들어갈 지도 모르니 다른 데에선 일절 말하지 말게나."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들은 흑귀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 쉽게는 혼란에 빠져들지 않았다. 귀능은 지금은 이렇게 살짝 흔들어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추가적인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하하, 역시 그렇지요? 제 괜한 생각이었나봅니다."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면서, 귀능은 속으로는 앞으로의 계획들을 하나하나 머리속에 정리하고 있었다. 혹시나 흑귀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네 사람은 오늘 회의는 절대 비밀이라고 다시한 번 맹세한 뒤 조용히 회의실을 떠났다.
'총수님 모르게, 내가 가능한 한은 최대한 총수님을 뒤에서 지원해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적진에 침투한 나의 사명...'
그 순간이 바로 귀능의 머리속으로부터 흑영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킬 수도 있는 의구심이 시작하려는 때였다.
============================ 작품 후기 ============================
5장 시작입니다.
현재 1부 5장 수정중입니다. 더욱 빠르게 진행토록 박차를 가하는중입니다 ㅠㅠ 추천과 코멘트는 작가에게 힘이됩니다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