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앗 혼다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껄렁껄렁한 양아치 집단과 비교되는 너무나 깔끔한 차림의 두 사람의 등장에 까불던 양아치도 입을 다물었다. 실로 두 사람의 위압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다시한번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죄송한데 세빈 언니좀 먼저 모시고 가시면 안될까요?"
"혹시... 궁지에 몰리신건 아니시죠?"
"에이 설마요. 언능 모시고 가세요, 금방 집에 돌아갈 테니."
혼다는 앞에 있는 녀석들을 쓰윽 훑어보더니 내게 주의를 주었다. 아마도 윤하를 걱정해서 한 소리인 듯 하다.
"너무 개 패듯이 패시면 안됩니다. 어머니께서 힘들어하신다구요."
"윽.. 알아요."
"그리고 흑향이 깨어났으니 이따 알려드리는 위치로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문자 넣어둘 테니 확인 후에 찾아오실 수 있으시죠?"
유진은 흑향이 깨어났다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자결을 시도했다는 것 때문에 굉장히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네 그럼 이따 뵈요."
서둘러 세빈을 두 사람 편에 보내고 나자, 어째서인지 양아치 패거리도 두 사람이 싸움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한 모양이다.
'짜식들.. 제대로 겁 먹었구만.'
녀석들이 안도하는 표정을 보며 유진은 피식 웃었다. 어찌되었는 이 멍청한 녀석들이 다시는 착한 영운고의 문제아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확실한 교육이 필요해 보였다. 그녀는 서둘러 가자면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걷는 중에도 뒤에서 꿍시렁거리는 곰밤탱이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래도 이놈들 문제는 절대 안 일으키고 있는 것 보니 다행이네. 뭔놈의 누님이야 누님은... 그러니까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지 왜 내 밑에 들어오겠다고 난리를 피워서는 사서 고생을 하니...'
*
유진이 사는 곳에서 몇십 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서울의 외진 지역. 산 관리소 중 하나로 들어간 세 사람은, 이윽고 비밀 장소에서 이어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곳은.. 광백이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구나."
"뭐 전이랑 크게 변한 것은 없습니다만, 지상으로 통하는 입구는 이제 엘리베이터밖에 없습니다.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해 보안 강화를 위해서 이렇게 바꿨습니다."
사실 적이라고 할 만한 세력도 없는지라 굳이 보안 강화를 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르나, 언제 또 흑영같은 세력이 나타날 지 모르니 만일의 차원에 대비한 셈이다.
몇 미터를 내려왔는지, 한참을 내려와서야 문이 열렸다. 과거의 광백과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세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기사, 3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 과거 전쟁 중이라 시설을 확장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때랑은 다른 것이 당연했다.
"이쪽입니다 영수님."
신기하게도 영수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안 것인지, 안에 있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세빈을 보며 인사하기 바빴다. 2032년의 백영의 입장에서도 한세빈 영수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극히 드문 행운이었기 때문이었다.
흑향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커다란 통유리 건너편에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저쪽에선 밖의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안이 보인다는 사실은 알고 있죠. 흑향은 어제 깨어나서 계속 안정을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또다시 자결을 시도할 걱정은 없고?"
"사실 저희도 그 부분을 걱정했습니다만, 깨어나자마자 장 티엔의 행방을 묻더니 의외로 얌전합니다. 물론 혹시 몰라서 구속 도구는 채워두었습니다."
세빈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하기사 자결을 시도한 이유도 장 티엔에게 방해가 될까봐 일부러 했음을 생각해보면, 그의 존재가 흑향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럼 장 티엔은 지금 어디 있나?"
"현재 독방에 가둬뒀습니다. 잡혀 온 날부터 아무 말도 안하고 있습니다만, 흑향의 생존 소식을 듣고 나서는 밥은 먹기 시작했다는군요."
"그럼 장 티엔을 잠깐 만나러 가자꾸나 혼다."
혼다는 알겠다며 앞장섰다.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장 티엔이 갇혀 있는 감옥이 있었는데, 과거 광백의 감옥을 생각했던 세빈은 또한번 놀랐다. 이걸 감옥이라고 해야할지 그냥 안좋은 호텔의 1인실이라고 해야할 지.
"참, 그나저나 니시노가 아까부터 안보이는구나?"
"아아.. 제가 잠시 일을 맡겨뒀거든요."
*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유진은 가방을 구석에 벗어놨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다에게 가방도 가져가라고 부탁할 걸 괜히 들고 왔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야 씨레기, 덤벼라. 이 누님이 빨리 가봐야 할 데가 있거든?"
"야... 우리가 놀러 온줄 아나본데, 우린 너희학교 조질려고 온거야. 근데 그 윗대가리들 위에 너가 있었던거고. 운 좋은줄 알아,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어디서 악당들 하는 말투는 배워와가지고 저렇게 잘도 말하는지,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유진은 빨리 저 되도않는 우두머리 양아치를 날려버리고 곰밤탱이를 집으로 보내고 싶었기에, 귀찮았지만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느그들, 다치기 싫으면 한꺼번에 덤벼라."
실상은 귀찮기 때문에 몰아서 날려버리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유진이 느낀 것은, 자신에게 지금 겁먹지 않은 이는 저기 저 양아치 한놈과 곰밤탱이 뿐이라는 것이었다.
'뭐야.. 지금 제대로 하겠다는거야 말겠다는거야...'
살짝 힘이 빠지는것을 느끼며 그냥 대장부터 처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유진은 사뿐히 날아올랐다. 징검다리처럼 늘어선 수림고 학생들을 지긋이 밟아가며 폴짝폴짝 뛰어넘어간 그녀가 그의 앞에 도착하는 데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허억! 이 새끼 언제 온거야!!"
"야 이 새꺄, 나 지금 메카수트도 안 켰거든? 근데 존나게 아플거야. 알았지?"
[퍽!]
"커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파고들어서 양아치 놈의 배 한 가운데에 제대로 주먹을 꽂아버렸다. 마치 며칠 전 장 티엔에게 날렸던 정권과 비슷한 움직임이엇다.
"오오! 역시 누님!!"
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내지르기를 보며 곰밤탱이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주먹에 가격당한 양아치는 입에 거품을 물고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 모습을 본 수림고 녀석들은 표정이 급격히 굳더니 놀라서 재빨리 양아치 뒤쪽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마치 '저희는 아무 잘못 없어요..' 라는 듯한 제스쳐.
"야 너그들 하라는거 제대로 했어?"
"아.. 아 물론이죠! 저흰 진짜 아무 잘못 없슴돠! 증거는 확실함!"
"그래 잘했다. 이따 메신저로 보내두고. 일어나 이자식들아, 언제까지 앉아 있을거야."
그녀는 얼마나 당했는지 일어서기도 힘들어하는 두 녀석에게 팔을 뻗어 일으켜세웠다. 둘은 기쁜 표정으로 유진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서더니, 그녀의 양 팔에 어깨동무를 하고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나 걸었을까, 뒷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양아치놈이 뛰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니들... 거기 안 서냐... 이 씨발새끼들아!!"
"헉, 의외로 맷집은 꽤 좋은 모양인데요 누님?!"
"뭐야 아직 정신이 남아있단 말야?"
한율이가 뒤쪽을 돌아보니 양아치놈이 뭔가 번쩍이는 물건을 들고 뛰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봐도 굉장히 위험한 흉기임을 직감한 그는 다급하게 유진에게 말했다.
"와악 누님!! 저, 저자식 칼 들고 뛰어오고 있다고요!!"
"헉, 뭐라고?"
그러나 미처 유진이가 두 녀석들을 풀고 뒤를 돌아봐서 대응하기도 전에 양아치는 거의 유진을 찌르기 일보 직전까지 다가왔다.
[쐐애액-!, 깡!]
그러나 바로 그때, 멀리서 날아온 무엇인가에 맞아 녀석의 흉기가 날아가버렸고 달려오던 녀석은 유진이 코앞에서 누군가의 날아차기에 맞아 진행방향에서 90도 각도가 꺾인 채로 날아가버렸다.
땅에 떨어진 흉기를 보니 작은 단검 같은 것이 꽂혀있었는데, 아마도 날아차기를 한 사람의 물건인 듯 했다. 흙먼지때문에 잠시 흐린 시야가 걷히고 나자 쓰러져 있는 양아치와 그 앞에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니시노가 보였다.
"앗, 니시노 씨!"
그녀는 뭔가 굉장히 화가 났는지 유진이 부르는데도 대답하지 않고 쓰러진 양아치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학생, 지금 무슨 짓입니까. 빨간 줄 긋고 싶어요?"
"흐..히익!"
지금당장이라도 불타오를 것 같이 노려보는 니시노 때문에 양아치는 멱살을 잡힌 채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동무가 풀어진 채 니시노의 기세에 눌린 양아치를 멍하니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고 있던 세 사람은, 곧 유진에게 온 메시지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이 넘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신자 혼다 씨. 시간 2032년 3월 16일 17시 10분. 내용. 이런 메시지를 보낸다는 걸 너무 늦게 보냈네요. 아까보니까 그 이상한 학생 품에 흉기를 숨기고 있길래 혹시 몰라서 니시노를 몰래 붙여뒀습니다. 이따 오실 때 니시노 따라서 오시면 됩니다 유진양.]
"흉기는 자신이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휘두를 생각도 하지 마세요!!"
양아치를 무시무시하게 혼내고 있는 니시노의 모습을 보는 유진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이미지는 조용하고 차분하며 조신한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엄청나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몇 분정도 훈계를 한 뒤에야 니시노는 날아간 흉기를 회수한 뒤 천천히 유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다가오는 그녀를 보는 한율과 찬웅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걸 본 유진은 왠지모르게 자신의 표정도 굳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서워!'
그들의 그런 표정을 보고는 니시노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가.. 가실까요 유진양."
무서울 때와 평소의 괴리감이 이정도로 심한 사람도 드물지만, 평소의 조신한 모습이 아름다워서 무서울 때의 모습이 가볍게 묻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드문 경우이다. 다만 그런 모습 때문인지 평소 모습으로 돌아오자 한율과 찬웅이 자신도모르게 설레는 감정을 느낀 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