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 *
2032년 3월 7일.
"어떠냐 흑향, 뭐가 좀 보이느냐?"
"으음..."
인근 야산에서 두 사람은 풀밭에 마주보고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흑향이 눈을 감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언력을 사용하려는 듯 했다.
"후... 죄송합니다 대장님.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그래 알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고 있거라."
"네. 대장님."
장 티엔은 흑향의 등을 토닥이고는 잠시 자리를 떴다. 그가 자리를 뜨는 것을 쭈욱 지켜보던 흑향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는 땅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오른손으로 머리를 콩콩 때리기 시작했다.
"젠장... 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거야..."
어릴 적부터 꿈꾸는 힘을 가진 부모님 밑에서 예언력 하나 쓰지 못하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굉장히 멸시를 당해왔던 흑향인지라, 지금처럼 급한 순간에 힘을 쓸 수 없는건 더욱 더 강렬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그렇게 흑영에서 소외되고 따돌림당하던 그녀를 그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려 준 것이 다름아닌 장 티엔이었다.
'늘 도움만 받아왔는데 난 아직도 진전이 없구나.'
흑영의 밑바닥에서 최고의 무력 집단의 부대장이 되기까지 엄청난 고난을 겪어 왔던 흑향이기에, 장 티엔에게 늘 감사하면서도 늘 간절했다. 언젠가 노력하다 보면 예언력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계속해서 생각해오던 그녀였다.
'내가 미래만 볼 수 있으면 분명... 엄청난 도움이 될 텐데.'
[화악]
그순간 그녀의 정신이 살짝 흐려지면서 몽롱한 상태가 되었고, 처음 느껴보는 괴상한 기분에 흑향은 몸서리치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녀가 보고 있던 풀숲이 아닌 거리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바로 깨달았다, 지금 이것이 예언몽이라는 것을.
"대장!!"
*
"헉!!"
같은 시간 낮잠을 자던 세빈은 갑작스런 예언몽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 소리에 놀란 유진과 혼다가 후다닥 달려왔고 세빈은 이내 집에서 자고 있었음을 깨닫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영수님!!"
"아... 아, 아무것도 아니다 혼다. 그냥... 계속 못 꾸던 예언몽을 갑자기 꾸는 바람에 놀라서 그렇다.."
"그게 정말인가요? 예언몽을 꾸신 겁니까?"
예언몽이라는 소리에 유진은 어리둥절해했지만, 혼다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세빈을 바로 앉히고 따듯한 차 한잔을 타왔다. 분명 막혀 있던 예언력이 발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천천히 진정하시고, 내용을 알려주십시오 영수님."
세빈은 바로 앉아 따듯한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숨을 깊게 쉬고 입을 열었다.
"일단... 학교 가는 길에 있는 공원 안이었다. 시간은 대략 밤 11시 쯤이었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날짜는 내일쯤인 듯 하구나."
혼다는 세빈이 말해주는대로 수첩에 빠르게 적어내려갔다. 분명 이 정보를 토대로 앞으로 행동해야 될 것을 생각해보려는 것이었다.
"누군가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여자인 것 같긴 한데 누군진 모르겠구나."
"이런, 부상자에 대한 정보가 불분명하군요."
"미안하구나, 갓 돌아온 힘이라 그런지 아직 굉장히 미약해서.."
"아닙니다 영수님,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분명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내일 밤에 암살자들과 격돌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중에 부상자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유진은 생각했다, 누가 부상자가 될지. 자신, 세빈, 니시노, 그리고 암살자 측의 여자. 경우의 수가 많았지만 그래도 가장 위험한 것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세빈이었다.
"여튼, 저들은 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해야될 것 같구나. 그게 가장 위험하다."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다만. 두 분의 안위가 조금 더 걱정이 되는군요."
그 말에 세빈은 슬쩍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은 세빈과 눈이 마주치더니 찡긋 하고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뭔가 대처를 해 두었음이 분명했다.
"그것도 걱정 말거라, 유진이가 좋은 방법을 알려주었으니까."
"아... 저번에 병원에서 말한 그걸로 괜찮을까요?"
"뭐, 일단은 믿어 봐야겠지?"
혼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아마도 니시노에게 예지몽에 대한 것을 알려주러 가는 듯했다.
"내일 밤이라. 공원은 뭐땜에 간걸까요 언니."
"글쎄다. 낸들 알겠니... 필시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유진은 잠시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세빈은 다시 조용히 소파에 누웠다. 그런데 누워서 잠깐 멍하니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한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보니 그걸 이야기하지 않았네. 저쪽 여자아이가 염원몽을 함께 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딱히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되려나?'
뒤척이던 그녀는 빼먹은 건 저녁에 이야기해야지 하고 마음먹고는 스르르 감기는 눈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잠에 들었다.
*
다음 날, 병원.
한창 낮잠을 자던 지훈이는 갑자기 찾아온 방문객들의 부산스러운 소리때문에 조용히 잠에서 깨어났다.
"끄응..."
"앗 지훈아 일어났구나. 미안."
누군가 했더니 바로 세빈과 유진이었다. 뭐가 만지작거리고 있다 생각이 들어 아래쪽을 본 지훈이는 엄청나게 늘어놓은 메카수트의 부품들을 보고 머리가 아파졌다.
"으아.. 이게 뭐야!"
"아, 그 필요한 부품이 있어서 그거 바꿀려고 찾는중인데 너무 많아서... 얘, 그래도 얼마나 이쁘게 정리해뒀는지 아니?"
확실히 가로세로 줄맞춰서 같은종류끼리 잘 정리는 되어 있다만, 그래도 결국 유진이는 저걸 다시 원상태로 조립을 못하니 복원 임무에 투입되어야 할 것은 누구인지 불 보듯 뻔했다.
깔끔한 세빈의 말투를 쓰고 있는 유진을 보고 있자니 지훈은 심경이 복잡했다. 저렇게 착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깨워서 나한테 말을 하지.."
"그렇게 잘 자는데 어떻게 깨워?"
지훈이는 내심 유진이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 같아 살짝 두근거렸으나, 이내 늘 챙겨주던 것과 비슷한 상황임을 알고 한숨을 푹 쉬었다.
"됐다 됐어... 연장 이리 줘."
"여기."
"찾던건 바꿔 놓은거야?"
"응, 이거 HE-A-a5-03-112번. R3타입인데, R9타입으로 바꿨어."
"흐음, 이제 조립만 해주면 끝인거네."
그는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지만 아직 움직이는데는 약간 고통이 수반되는 모양이었다. 유진이는 그런 그를 조심스럽게 부축해서 깔아놓은 판 앞에 앉혓다.
"자, 내가 부르는것 만 줘. 금방 해줄테니까."
"응 말만 해."
옆에서 지훈이가 수트를 조립하고 있는 것을 보자니 유진이는 녀석이 새삼 멋져보였다. 자신도 수트를 이해하는데 있어선 뛰어나지만, 이 녀석처럼 기계를 완전히 이해한 녀석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KM-B-a1-01-002 2개"
"어... 여깄다."
물론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세빈은 도통 두 사람이 뭔 이야기를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당연히 유진이가 세운 작전에 그냥 응한것도, 저 메카수트 뭐시긴가 하는 기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잘 아는 그녀의 설명을 믿기로 한 것이다.
'3시. 앞으로 8시간 남았군.'
세빈은 계속해서 시계를 바라보며 유진이가 알려준 스마트패드로 혼다와 대화를 주고받고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미래가 곧 닥쳐온다는 생각을 하니, 처음 예언몽을 꾸었던 어릴때가 자꾸 생각났다. 그녀의 첫 예지몽은 하필 누군가가 죽는 것이었고,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인 부모님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예언몽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굉장한 두려운 일이 분명했다. 분명 암살자들은 우리 중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이고 그게 누군지는 알수가 없다, 얼마나 다칠지도...
'제발, 아무일 없어야 할텐데.'
약 한시간 뒤, 조립이 모두 끝났고 유진이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테스트를 하기 시작했다.
"좋아, 잘 되야 할텐데.."
원래 자신의 메카수트 오른팔 파츠를 자신의 팔에 장착한 유진은 방금 조립한 새로운 오른팔 파츠를 세빈에게 입혀주었다.
"잘 될까? 이런 시도는 나도 처음이라 괜히 긴장되는걸."
"누구 작품인데. 한유진 작사 나지훈 작곡이란 말씀! 기대하시라!"
그리고는 세빈의 준비가 모두 끝나자 함께 나란히 지훈이를 바라보도록 세빈을 세웠다. 유진이는 곧 세빈 옆에 서더니 자신의 오른팔 파츠의 전원을 켰다.
"자 일단, 분리기동 단계 테스트!"
{경고, 지정된 장소 이외에서 기동하였습니다}{모델 MS-D102-RA 동력연결 완료}{파워스위치 온. 기동을 시작합니다}유진이의 오른팔에 장착된 슈트가 슈욱 하고 바람을 내뿜기 시작했다. 곧 이상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 유진은 곧바로 전원버튼 옆의 새로이 추가된 버튼을 눌렀다.
{경고, 불법 개조가 확인되었습니다. 가까운 검사소에서 확인...}
"시끄럽다 이놈아! 기동!"
불법 개조라는 무지막지한 말이 흘러나왔지만 유진은 거침없이 또한번 버튼을 눌렀다.
{강제로 기동하였습니다. 이에 따른 책임은...}또 엄청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으나 유진이는 들은체 만체 팔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뻗기 시작했다.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경고음들에 긴장하는 건 지훈이와 세빈이 뿐이었다.
"자, 연계기동 테스트!"
{모델 MS-D102-RA, 모델 XX-X000-RA 연계기동 시작}
"차하!"
"우와아앗!"
메시지와 동시에 유진은 오른팔을 쭉 허공으로 뻗었고, 그와 동시에 세빈의 오른팔이 빨려들어가듯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이후에도 유진은 한동안 오른팔으로 물건을 들어보고 음식을 집어보고 움직여보는 등 10분여 동안 실험을 계속한 뒤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좋아, 모두 정상! 오늘 밤의 계획은 순조롭군..!"
전원을 끄고 나서 유진은 밝게 상기된 표정으로 지훈이에게 명령했다. 저렇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환자를 괴롭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 어서 나머지 세 파츠를 조립해 지훈아!"
"뭐, 뭐?!"
"그래 어서 세빈 언니 말 들어 지훈야."
웃긴 건 세빈 행세를 하는 유진을 따라서 세빈 역시 지훈이를 놀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14.07.14 수정완료
+14.08.16 수정완료.
오타발견해주셨네요... 이런걸 진적 몰랐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