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유진이는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불려갔으나 별다른 말이 없었다는 세빈의 말에 오히려 당황했다. 아마도 진즉에 엄마나 혼다 씨가 다녀갔던 것 같다. 직접 해명했다면 말주변이 없어 오히려 혼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주임 선생님은 세빈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그녀 어깨를 툭툭 치며, 일반인에게 사용하지 말라는 주의와 막나가는 놈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단다. 게다가 믿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윙크를 보내시고는 먼저 교무실을 빠져나가버리셨다고...
'으아. 싫다고오오오-!!'
세빈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진은 이 외침을 입 밖으론 내지 못 한 채, 혼자 가슴을 쿵쿵 칠 수 밖에 없었다.
교실에 먼저 간 유진은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 중 약 6명 가량이 올해도 같은 반인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유진의 눈에 들어온건 그들이 아니었다.
"누님!"
"오셨군."
그순간 유진의 뇌리를 스쳐가는 학생주임 선생님의 한마디가 있었다. '그 막나가는 놈들도 관리 잘 해주고'
"으아아아-!! 선생니이이임-!!"
온 교실이 쩌렁쩌렁 울렸고, 복도를 지나가던 아이들도 놀라서 교실안을 바라봤다. 유진이 식식거리면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고, 한율과 찬웅은 놀라서 그대로 굳은 채 유진을 올려다봤다.
아마도 그들이 보기엔 유진이 아닌 세빈이 저런 분노를 표출하니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세빈은 그런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곤 그녀를 진정시키고 자신이 대신 말하기 시작했다.
"왜 너희가 여기 있어!!!"
"아이고 귀야! 아니 그걸 우리가 정했슴까? 선생님들이 정한거지!!"
"닥쳣!!"
"유, 유진아 그만!!"
유진이 갑자기 버럭 하는 세빈을 말렸고, 다행히 더 심한 욕을 하기전에 그녀는 제지되었다. 한율과 찬웅은 혹시나 그녀가 폭력을 휘두를까봐 걱정했지만 세빈이 그럴리는 없었다. 다만 유진은 세빈이 자기를 따라하다가 입에 험한 말을 담게 될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니네, 얌전히 지내라. 죽는다."
"... 넵 누님."
뭐 새로운 클래스메이트나 원래 친구들이나 다들 유진의 예전 성격도 알고 사고친것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을 꺼리고 있었으나, 사실 '원래 여자였는데 남장을 하고 다녔다'고 윤하가 소문을 퍼트린 덕에 그녀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와.. 여자면서 저 둘을 잠재우다니!"
"되게 멋있지 않아?"
'다 들린다 다 들려!'
세빈은 가장 구석의 창가 자리에 보란듯이 가방을 내려놓았고, 아니나다를까 그 앞에 앉은 유진은 그녀의 귀를 향해 마구 날아드는 주변에서 소근거림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유진은 세빈에게 뭔가 해줄것을 부탁했고, 세빈은 곧바로 두 못난이에게 다가가 귀를 잡아당겼다.
"꺄오- 아프다고요!!"
"닥치고 따라 와!"
그녀는 두 사람을 질질 끌고 자신과 반대편 복도쪽 맨 뒷 자리에다 떡 앉혀놨다. 그들이 그곳에 앉아 앞에 앉은 아이들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으나, 이내 세빈의 말 한마디에 그들도 안심할 수 있었다.
"걱정 마, 혹시 이자식들이 허튼짓이라도 하면 바로 말하고. 내가 반 죽여놓을테니깐."
"어.. 어 고마워."
안심하기에는 살짝 거친 말투였는데, 어째 여자 교복을 입고 말하는 거라 그런지 앞에 앉아있던 남학생들도 긴장은 좀 덜 하는 모양이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 설렌듯한 표정이었다.
유진은 세빈이 저렇게 자신을 잘 흉내내는 걸 보며 새삼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누니이이임-."
애처롭게 그녀를 부르는 두 문제아들을 뒤로 하고 세빈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유진의 표정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뭐야 그 표정은..."
"아. 그게... 워낙 연기를 잘해서 혹시 과거에 나랑 같은 과가 아니었나 해서."
유진이는 좀전에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를 핸드폰에 적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언니 혹시 예전에 나처럼 개차반이었어요?]
"아 아냐-요!!"
개차반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세빈은 유진에게 아니라고 버럭 성을 냈다. 아마도 자신이 유진을 연기하면서도,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이 은연중에 스쳐가서 찔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한가지 확실한 건, 세빈의 경우는 욕은 유진처럼 하진 않았단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둘을 보고 있는 급우들의 시선이 흐뭇해지고 있었음을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
같은 시각 학교 옥상.
"며칠 전부터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냥 멀리서 계속 우리쪽을 감시하고만 있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군. 그냥도 벅찬 놈들이 뭔가 준비해서 온다면 더 골치아파진단 말이지."
혼다와 니시노는 멀리서 미동도 없이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두 암살자들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하지만 혹여나 있을지 모를 그들의 동조자라던가에 대비해서 함부로 유진과 세빈 곁을 떠나 두 사람을 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저번에 병원에서 세운 작전대로라면 절대 이쪽에서 먼저 공격을 감행해서도 안된다.
"어찌됐건, 확실한 목적이 있는 놈들이다. 필시 조만간 달려들테니 우리는 일단은 끌까지 감시하고 있는 수 밖에 없겠구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쌍안경으로 그들의 동태를 계속 지켜보던 혼다는 슬슬 촉이 오고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학교에 다시 왔으니, 분명 조만간 두분이 떨어지게 되는 순간이 온다. 바로 그때가 녀석들이 공격할 적기..!'
* * *
2000년 3월 3일. 서울 인왕산 기슭.
[구웅... 쿠구궁...]
유난히 심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비밀 거처에서 모인 두 사람은 한 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늦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그러게요 총수님."
[콰아앙!!]
번개가 바로 앞쪽에 떨어졌는지 엄청난 소리와 빛이 순간 주위를 휘감았다. 그리고 직후에 비밀 거처의 입구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서 총수와 유나는 황급히 전투 준비를 했으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것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허... 후아! 죄송합니다. 저에요 저!"
"놀래라, 귀술씨였군요."
어둠을 뚫고 나타난 비밀 회의의 세번째 참석자, 귀술이었다. 오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심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왜그리 숨을 헐떡이느냐."
"아 뭐 별건 아니고 오는 길에 흑영 놈들이 습격하는 바람에... 위치를 들키면 안되니까 대충 상대해주고 떴지요."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넵, 사지 멀쩡히 왔습니다 총수님. 염려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총수는 잘난 척 하는 귀술을 보며 웃었다. 위험한 시기라서 그런지 다들 좀더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상태인지라, 귀술의 그런 농담조의 말은 꽤나 분위기를 이완시켰다.
"갑자기 무슨 일로 모이자고 하신 것인가요 총수님."
"아 그래, 부영수님이 해주실게다."
꽤나 이완된 분위기였지만, 유나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필시 뭔가 강한 충격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름이 아니고, 이전에 예언했던 운명의 날이 점차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8월 29일이었던 것이.. 어느새 8월 2일경이 되었습니다."
"그거.. 큰일이군."
그 말에 방 안의 사람들 표정이 모두 어두워졌다. 흑영이 당연히 강하게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빠르게 시일을 앞당겨 갈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을까?
"며늘아가, 백영 사람들의 기운을 받아 몸에 기운을 두르는것은 잘 진행되고 있느냐?"
"네, 그거라면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그거면 됐다. 언제쯤 끝난다고 했었지?"
"6월 10일 경에 끝이 납니다. 허나 지금 속도대로라면 분명 운명의 날이 더 일찍-"
서 총수는 그녀의 말을 거기서 제지했다. 필시 뭔가 방법이 있는 것이었다.
"걱정 말거라. 여기부터는 나와 백영의 정예 부대가 나서야 할 차례인듯 하구나. 이미 어느정도 준비는 마쳐 두었지."
그는 유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걱정 말고 하던 것을 계속하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귀술이는.. 앞으로는 무조건 부영수님 곁에서 지키거라. 절대 어떠한 문제라도 생겨선 아니된다, 알겠느냐?"
"네! 총수님. 이 목숨 바쳐 지키겠습니다!"
"아 그리고 스파이 건은 어찌 되었느냐?"
"아, 안그래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분명 며칠 내에 광백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 그렇단말이지... 나머지는 나와 이노우에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그럼 부영수님을 잘 부탁하마."
"염려 마십쇼 총수님."
비가 좀 잦아들자 유나와 귀술은 함께 자리를 떴다. 서 총수는 한참을 방에 남아 깊은 생각에 빠졌고, 한 시간여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해졌던 비는 다시 강해져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단 스파이부터 처리해야겠군.'
그는 방 안에 작은 폭탄 하나를 던져놓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폭발과 함께 곧 큰 불이 치솟았고, 내리는 폭우로 인해 불이 꺼지기 무섭게 검은 복면을 한 자들이 근처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 발 늦었습니다."
"흔적을 지우고 떠났군. 얼마 안 되었다, 추적해라!"
"예!"
흑영에서 보낸 암살자로 보이는 자들 중 둘이 재빨리 무너진 방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근처를 수색하기 위해 빠르게 흩어졌다.
"어떻게든 녀석들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 흑귀님의 위대한 계획을 위해서!"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