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자.. 그럼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요 총수님."
"어허, 사석인데 굳이 예의 갖출 필요 있느냐 아가야."
별도로 마련된 방에서 마주앉은 두 사람은 가벼운 이야기를 하며 답답한 분위기를 풀기 시작했다.
"뭐 그렇긴 하네요 아버님. 설마 제가 나서야 할 일이 생길 줄은 미처 생각 못했던지라... 저도모르게 딱딱해졌나봐요."
"그럴 수도 있지 허허."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서 총수는, 가장먼저 아들의 안부부터 물어보았다.
"진이 녀석은 아직도 그모양이냐?"
"뭐 그렇죠 그이는... 이전부터 이쪽 세계의 일에 발 담그는걸 정말 싫어했으니까요. 어떻게든 평범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죠. 아... 다만 최근에 어머님 사건 이후로는 조금 동요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구나... 역시 그 일때문에 꽤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군... 그래도 다행이구나. 나랑 지 애미에겐 전혀 신경 쓰지 않는것 처럼 하더니 완전 나쁜 자식은 아니었군."
"아버님도 참..."
자신의 부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반응했다는 아들의 이야길 들은 서규찬 총수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비록 비범한 운명을 살고 있는 그였으나, 평범한 인생을 살고싶어하는 아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아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녀석, 아직 자신의 운명에 대해선 모르고 있지?"
"... 네 아버님.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요, 애초에 그이가 관심도 없고..."
"그렇다면... 자신의 딸 윤하의 운명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겠군...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운명 이야기라 함은.. 필시 운명을 거역하여 살아있는 서진과, 거역하여 살아있는 서진에게서 태어난 윤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말해주고 싶지만 숨겨오며 살았던 것이 힘들었다는 것은 유나의 표정을 보면 대강 이해가 갔다.
"이야기해주고 싶어도, 현재 저희 상황이 녹록치 않아서 어쩔 수 없다는것은 저도 잘 아니까요."
"그점은 정말 미안하구나 아가."
"그것도 그렇지만... 아버님, 혹시..."
혹시나 있을 스파이에 대비하여, 유나는 의자를 들고 서 총수의 바로 옆으로 이동한 뒤 그의 귀에 대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주'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으신지요."
"물론이다. 지금은 없는 아내가 1년 전부터 이야기해오던 것이니까 말이지."
"역시 그렇군요. 지금 다른 백영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가장 예언의 힘이 강하신 영수님도 겨우 1년. 저도 겨우 반년 가까이 되서야 알게 되었으니 당연한 것이겠군요."
유나는 한동안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래를 예견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영수님이 계시지 않고, 자신은 그 능력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반년이라 함은 역시 아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흑영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단 뜻이겠군. 분명 내 아내와 장 티엔의 행방불명이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든 것이 분명하구나."
"원래 예상되었던 날짜는 겨울쯤이었단 말씀이신가요 아버님?"
"그렇지... 허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고, 그들이 목표를 달성하기위한 움직임이 빨라졌다. 필시, 반년 내에 일이 터질 것이다."
서 총수는 밖에 있던 사람을 시켜 누군가를 불렀다. 한 오분 남짓 지나자, 목도리를 여러번 감아 눈만 보이는 남성이 다급히 들어왔다. 규찬이 가장 아끼는 심복 중 하나인 '귀술(鬼術)'이었다.
"어휴, 총수님. 이렇게 급히 부르실 것 까지야."
"여전히 빠르구나 귀술아. 부른 지 얼마나 됬다고 이리 급히 오느냐? 천천히 오라고 일렀거늘.."
"그래도 말입니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안 급할수 있겠느냔 말이지요."
목도리를 풀자 서른 살 즈음 되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탓인지 수염이 삐죽삐죽 보였다.
"그럼. 며늘아가, 아니, 부영수님. 흑영이 일으킬 '저주'의 날은 대체 언제이오?"
"현재 예측되는 날짜로는 8월 27일이옵니다."
서 총수는 그 말을 듣고 귀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알았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역시...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총수님."
"우리도 대비를 아예 하지 않은 것 아니네. 지금부터 설명해줄 이 작전은 본디, 나의 아내, '영수'가 직접 이끌고 있었으나 내가 건네받았고, 이젠 부영수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일일세."
"꽤나 무겁고 힘겨운 일이 되겠군요.. 총수님."
백영의 구원과 세계를 지킨다는 바통을 넘겨받게된 유나는 짊어지게 된 짐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이 일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나, 제 그이와 윤하를 위해서이기도 한 일. 꼭... 성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총수님. 맡겨만 주십시오."
고민도 될 법한 무게감이었지만, 그녀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서 총수가 그녀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견뎌낼 수 있겠느냐 아가야."
"... 예 아버님."
서 총수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며느리를 스스로 궁지로 몰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더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아내가 언제 돌아올 지도 모르는 이런 불투명한 현실 앞에서, 기댈 곳이라곤 오로지 그녀 뿐이었다.
"귀술."
"예, 총수님."
"부영수님을, 잘 모시도록 하게. 자, 두 사람 이걸 받도록 하게나."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 그들에게 건넷다.
"휴대용 수발신기라네, 크기도 작으니 늘 들고다니는 물건에 소지하도록 하고.. 사용법은 한번 누르면 나에게, 두번 누르면 부영수에게, 세번 누르면 자네에게 걸리도록 되어있으니까 조심히 쓰도록. 고유전파를 쓰기 때문에 도청될 염려는 없으니까 안전한 장소라고 판단되는 곳에서 통화하기만 하면 문제 없을 걸세."
"알겠습니다 총수님."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모두를 자리에 앉힌 뒤, 총수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
* * *
2032년 2월 14일 새벽 3시경.
[퍽!]
"컥..."
여전히 손이 묶인 채 유진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젠 내가 다 지치는군!!"
장 티엔은 분노에 가득차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빌어먹을..."
"대장, 이제 좀 진정하시지요. 이러다가 죽겠습니다!"
"나도 안다 흑향!!"
흑향이 그를 말렸지만, 장 티엔은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는 듯 했다. 이제 겨우 한세빈의 행방을 찾아내서 어찌 일을 끝내나 싶었는데, 이 독하디 독한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그의 속을 이렇게 뒤집고 있었으니 말이다.
"젠장. 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 사령관님께 보고를 드려야 하건만!!"
"그래도, 이정도면 굉장한 성과가 아닙니까 대장. 한세빈의 소재지도 거의 다 파악하지 않았습니까! 굳이 이 계집에게 정보를 알아내지 않아도, 저희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렇지.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단지 운이 좋았던 것 뿐이다."
그의 말인즉슨,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였지 자신들의 성과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운명이 신이 자신들을 여기까지 오도록 이끌었을 뿐이었다.
"운이 좋아서 한세빈과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로 오게 되었고, 운이 좋아서 한세빈과 같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단지 운이 좋아서다, 우리의 능력으로 알아낸 거라곤 하나도 없어. 심지어 이 계집에게 얻어낸 정보 하나도 없단 말이다!"
"대장..."
실컷 분노를 토해내고 나자 장 티엔은 조금 분노가 가라앉았는지 한숨을 푹 내쉰 뒤 구석에 쓰러져있는 유진을 바라보며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흑향, 가서 보고와라. 저 계집 기절해 있는지."
"넵!"
흑향은 조심스레 유진에게 다가가 동공과 숨을 확인했다. 숨은 붙어 있지만.. 추운 날씨에 콘크리트 바닥에서 오래 굴러다닌데다가 물고문까지 받아서인지 생명은 거의 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기절해있습니다 대장."
"그래... 암살자라면 암살자답게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 하거늘..."
그는 천천히 일어나 유진에게 다가가더니, 조용히 옷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었다.
"이거면 되겠지. 조만간 끝날 것이다 우리의 일도."
바로 그 때였다.
"대장!"
흑향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장 티엔을 불렀다. 아래층에서 들리는 사뿐한 발걸음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옵니다."
"백영의 쥐새끼들이로군... 어떻게 알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로서는 이 계집을 처리할 수고를 덜었구만... 움직이자 흑향."
그는 흑향을 이끌고 유진을 버려 둔 채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가 층에서 사라졌다. 약 2분 후, 유진이 쓰러져 있는 층에 올라온 혼다와 니시노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본 뒤 급히 유진에게 달려왔다.
"니시노, 어떠냐. 살아 계시냐?!"
"... 위험해요, 급히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아요."
"빌어먹을 자식들... 연약한 유진양을 이렇게나 심하게...!"
혼다는 급히 자신의 외투를 벗어 유진을 덮은 뒤 그녀를 업었고, 니시노에게 주변을 경계할 것을 지시했다.
"가장 가까운 병원이 어디지?"
"500m 거리에 대학병원이 하나 있습니다."
"엄호해라 니시노. 빠르게 이동하자!!"
바로, 그 때. 기절한줄로만 알았던 유진의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 잠깐 기다려라 혼다..."
"유진양?!"
"아니... 유진이가 아니다... 나다.."
유진이가 아니라니. 자신이 업고 있는것이 유진이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혼다는 그 말을 듣고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나다... 한세빈..."
"...?! 영수님?!"
============================ 작품 후기 ============================
+14.07.14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