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에.. 근데 꼭 세빈이도 같이 가야 하는거야?”
지훈이가 지금 세빈에게 반말을 쓰는 이유는, 어찌됬거나 두 사람이 쌍둥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완벽히 인지시켰기 때문이다. 혹여나 실수하기라도 하면 별을 보게 될거라는 유진이의 경고도 있었기 때문에 아마 지훈이가 실수할 일은 없을 듯 하다.
“당연하지, 아까 내가 한 말 잊었냐. 언니가 이쪽으로 넘어오게 된 이유를 찾기 위해서 항상 동행할거라고 했잖아.”
이제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유진이도 마치 쌍둥이 언니를 대하듯 자연스럽게 세빈을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거부감을 느낄 때는 언제고, 하여간 한씨집안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는게 분명하다.
윤하가 되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녀로써의 생활에 곧바로 적응했던 재희의 유전자에, 게다가 너무나 머리가 좋은 윤하의 유전자까지 물려받은 유진이었다. 운동신경 말고 머리도 무진장 좋았지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가 만약 마음잡고 공부한다면 대단한 연구원이 되는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 근데 진짜 너랑 완전 똑같이 생겼다. 이러니까 쌍둥이라고 해도 속지.”
“그래 너만 조심하면 돼, 니 입만.”
세빈은 요며칠 유진과 같이 생활하면서 젊어진 몸에 거의 완벽히 적응했다. 워낙 유진이 활동적으로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그녀가 체육관을 갈 때나 조깅을 할 때 항상 자전거를 타고 동행해서 신체 적응이 빨랐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유진아, 지금 어디로 가는거니?”
“그게, 우리 학교를 졸업하려면 봉사활동을 년 20시간씩 꼭꼭 채워줘야 하거든요... 머 끽해야 우리들 하는게 이런 시설들 일손 돕는게 전부다보니 크게 힘들진 않아요.”
“호오~ 그래서 일손을 도우러 가는거구나.”
물론 유진은 이렇게 가는 게 매우 귀찮았다. 하지만 귀찮긴 해도 막상 일을 하러 가서 돕기 시작하면 느껴지는 보람찬 무언가를 굉장히 좋아하는 유진이었기에, 갈때는 ‘궁시렁’, 돌아올때는 ‘아 뿌듯해!’의 반복이었다.
“올해 4시간 남았는데 오늘 딱 도와드리고 나면 끝이에요. 뭐.. 이 곳 같은 경우는 워낙 예전부터 자주 오던 곳이기도 하구, 굳이 봉사시간 채우러 올 때 아니더라도 엄마랑 오는 편이라서 이젠 좀 되게 편해졌어요.”
“어? 엄마 말이니?”
“네. 울 엄마랑 여기 시설 후원하시는 분이랑 친구사이셔요. 아마 지훈이네 아저씨랑도 친구사이로 알고있는데? 오늘은 계실지 안 계실지는 모르겠네요.”
역에서 내려 십 분 정도 걸어오자 꽤 큰 복지시설이 하나 나타났다. 후원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돈 많고 잘 나가시는 분이며 아낌없는 후원을 해 주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라민 기숙 학교라...”
*
같은 날 학교 근처 아파트단지 내 놀이터
“아...”
“하암...”
두꺼운 야상을 입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두 남학생이 그네 위에서 심심한지 하품을 연신 해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키가 180정도는 되어 보였고, 한명은 털 달리 검은 야상을, 다른 한 명은 붉은 빛의 야상을 입고 있었다.
“야 밤탱이, 너 누님 소식 들은 거 없냐?”
“이런 썅 밤탱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곰탱이 색갸.”
“시발 곰탱이라고 하지 말랬지.”
“그럼 너가 밤탱이라고 안 부르면 됐잖아 미친놈아.”
둘의 거친 입에서 서로를 헐띁는 말이 끝없이 쏟아져나왔다. 놀이터에 놀러왔던 어린아이들은 이 둘의 폭풍 욕 배틀에 겁먹고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쪽을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튼 들은거 없어. 누님 보충수업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사라지셨다고. 같이 노래방이라도 좀 가자 그럴라했더니만. 아 왜 밥 사고 노래방도 쏜다는데 안 가시지?”
“너같으면 가겠냐. 누님 우리 존나 싫어하잖아. 안그래도 맨날 피해다니는데도 같은 학교니 마주칠 수밖에 없고, 같이 있기 싫은데 자꾸 같이 놀자고 하니까 좋으시겠냐?”
“지는. 시발 너 저번에 누님이랑 오락실 갔을 때 좋다고 난리 떨었잖아. 청권 잘한다고 존나 떠들어대더니 누님한테 개처발리고.”
“아 씨발 그건 내가 지고 싶어서 진게 아니라고! 누님 청권 개잘한다고. 내가 살다살다 그런 플레이는 첨 봤다니까?”
누님 누님 이야기를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욕질을 하며 다투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네 쪽으로 다가왔다.
“찬웅 형, 따끈따끈한 핫 뉴스가 들어왔지 말임다~.”
“오 역시, 내 1등 똘마니 마이 브롸더 쪼~”
이들의 정체는 다름아닌 초장에 유진이가 언급했던 영운 기계특성화 고등학교의 골칫거리, 두 불량 써클 ‘광운’의 두목 박찬웅과 ‘적운’의 두목 강한율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지막 글자를 이용한 놀림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래서 박찬웅의 별명은 곰탱이이고, 강한율의 별명은 밤탱이이다.
“야 쪼, 뭐냐. 뭔 소식이냐.”
“어이쿠. 우리 한율 형님도 계시네요.”
“그래 짜샤, 누님 오고 나서부턴 찬웅이랑 친구 먹었다 아니냐. 뭔 소식인지 불어나 봐.”
이 머저리 둘을 포함한 두 불량써클의 모든 이는 ‘누님’이라 통칭하는 유진이의 수하에 있다. 물론 유진이는 이들을 자신의 부하로 절대 인정 안 하지만, 지겹도록 쫓아다니는 이들의 등쌀에 밀려 결국 ‘영운 5조’라는 것도 선포해두었다고 앞에서 언급했었다.
“제가 누님 자주 출입하시는 겜방이랑 게임센터를 뒤졌는데 말임다. 그쪽 주인분들이 사라진 우리 누님의 정보를 주셨지 말임다.”
“오~ 이새끼! 역시 너밖에 없다. 안그래도 누님 못 본지 일 주일이 지나서 매우 그립다.”
똘마니 쪼는 어디서 물어왔는지, 유진이가 오늘 저녁에 자주 가던 피씨방에 들릴 것이며, 거기서 대기타고 있다가 만나서 저녁이나 먹자는 계획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이 쪼라는 녀석이 광운의 머리를 담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쩐지 요새 안보이신다 했더니만, 체육관밖에 안나가셨던 모양이군. 봉사활동 가신 오늘이 기회구만.”
“야 마침 잘됬네. 가서 오랜만에 FPS좀 갈기고 있자, 나 요새 존나 근질근질함. 내 영혼이 헤드샷을 쏘라고 날 갈구고 있음.”
“미친놈. 그래 가자, 가서 겜이나 좀 하고 있음 오시겠지 뭐. 브롸더 쪼, 너도 가지 그래? 훌륭한 정보를 모아온 대가로 형이 피방 쏘고 저녁도 사주지.”
“진짜지 말임다? 저야 땡큐지 말임다~.”
그렇게 한동안 놀이터를 욕으로 시끄럽게 채웠던 두 두목은 조심스럽게 아이들에게 다가가 사과하며 지나갔다.
“어이 꼬맹이들~ 형들이 미안혀~ 입이 좀 험하지?”
“편히 놀아라. 니들은 이런 말 배우지 말고.”
뭐.. 예전 같았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이 불량써클 두목 녀석들이 이렇게 미소로 사과하며 지나다니는 것도 전부 유진이의 ‘영운 5조’ 때문이라고.
*
몇 시간 뒤 라민 기숙사 학교.
봉사활동을 마친 세 사람은 마침 자리에 있던 후원자이시자 윤하의 친구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자 마음껏들 먹어요. 푸짐하진 않지만 정말 맛있게 했으니까..”
“으.. 으앙 나연 아줌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진짜 늘 만날때마다 요리 해주시는거 너무너무 맛있어요!!”
유진이가 알고 있는 이 엄마 친구 내외분은 금슬도 무척이나 좋고 일단 요리를 너무나 잘 하셨다. 부부가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로 일하고 있다니,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는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후원해주는 학교에 찾아와 모든 학생들에게 직접 대접하는 일이 절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진짜 운 좋게 만났네~. 안그래도 마침 딱 한가할 때 왔는데 유진이를 다 만나고~. 게다가 몰랐던 쌍둥이 언니까지. 지훈이도 별 일 없이 잘 지냈지? 아버지는 어떠시구?”
“아 뭐 아버지야 늘 잘 지내시죠. 요새 하시는 드라마 시청율이 좀만 더 올라가면 좋겠다고 맨날 자기 나오는 드라마 보면서 복습하세요. 진짜 연기에 목숨을 건 사람 같다니까요.”
지훈이는 미친 연기력이라고 평이 자자한 연기자 나우주의 아들. 아버지의 후광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굉장하고, 연예인 스카웃 제의도 여러번 들어왔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푸훗. 지훈이는 연예인 할 생각 없다고 했지?”
“네, 저는 메카수트에 미치려구요. 제가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이 맞는 것 같거든요.”
“그래그래, 유진인 부모님 별 일 없으시지?”
맛있는 음식 앞에서 대화 하나 없이 신나게 먹던 유진은 그녀의 질문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쓱 닦았다.
“네 엄마가 맨날 부럽다고 해요. 봉사활동 가서 맛난거 많이 얻어먹고 온다구요. 자기도 좀 데려가라던데요?”
“푸하하. 윤하는 여전하네~.”
“엄마도 나연 아줌마랑 민혁 아저씨 변한게 없다고 그러던데요 뭘. 둘 끼고 친구들끼리 보면 맨날 깨소금 완전 짜증난다구 그러세요.”
“... 윤하 요것이.”
마치 직접 말하는 것 같은 리얼리티에 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짜피 서로 장난삼아 말하는 걸 유진이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장난스럽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어른에게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건만.
“여튼 오늘도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네~.”
그렇게 훌륭한 셰프 두 분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유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차를 타고 돌아가셨다. 두 분이 돌아가고 나신 뒤 유진이는 남아있던 디저트인 체리 칵테일과 쉬폰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참,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부모님 인맥은 너무 쩌는 것 같아.”
“내가 생각해도 그래..”
“솔직히 난 너네 아버지가 더 대단하신 것 같은데. 진짜 아저씨 출연하신 영화나 드라마 볼 때마다 내가 소름이 돋는다, 너무 진짜같아서.”
둘이서 히히덕거리며 대화하고 있는데, 뒤에서 세빈이 슬쩍 끼어들었다. 뭔가 굉장히 고무된 모습이었던지라 유진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뭐랄까... 굉장히 행복해보이네 지금 내가 보는 미래는.”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이를 뒤에서 꼭 안고는 눈을 감았다. 유진은 당황해서 순간 얼음이 되었으나 이내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그녀의 팔에 손을 가져다댔다.
“아무래도 내가 온 이유가 이 미래를 지키는 것이라면, 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고... 돌아가서 우리 일족을 꼭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겠지.”
“그렇겠죠?”
“그러니까 잘 부탁한다 유진아. 나와 너의, 아니 나아가 우리 가족과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날 도와줄 수 있겠니?”
유진이는 ‘뭘 새삼‘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엄청나게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메카수트만 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크게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물론이죠!”
물론 며칠 뒤 벌어질 위험을 이때 알 순 없었을 것이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 작품 후기 ============================
+14.07.14 수정완료
[오랜만에 리리플]
우애니 // 감사합니다.. 기다려주는분들 덕에 제가 있습니다 ㅠ너도변하는거닷 // ㅋㅋㅋㅋ 펜타는 진짜 무리에요 추석이자나욧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