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2. 조우>
2000년 1월 27일. 흑영의 중앙사령부 심연의 깊은 곳.
강한 어두운 기운이 주변을 감싸고 있고, 그 가운데에 간신히 빛나고 있는 전구 하나가 테이블이 있음을 밝혀주고 있었다.
“장 티엔이 실종된지 벌써 1주일이 지나가는군. 장로들이여 그간 충분히 일을 수습하고 정보를 알아낼 시간을 주었으니 이제 답을 들어도 되겠는가?”
무게감 가득한 중저음이 방 안을 울렸다. 3시 방향에 앉아 있던 장로로 추정되는 한 명이 이 말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정찰대를 보내 건백 내를 샅샅이 뒤졌으나 그의 흔적이라곤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남은 거라곤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그의 혈흔과 차원의 균열이 훑고 지나간 흉터,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중저음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흐음..’ 하고 탄식 가득한 한숨을 쉬더니 다른 사람들을 한번씩 쭉 훑어보았다.
“제 2장로 외에 다른 장로들은 이외에 알고 있는 것이 없겠지?”
“예 사령관님.”
그는 답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긴 검은 머리가 약한 빛을 받아 마치 유령처럼 일렁였다.
“이번 일은 우리 흑영에게 있어 엄청난 손실이나 다름없다. 그간 대부분의 위험한 작전을 도맡아 처리했던 제 1대장 장 티엔이 실종되었다는 것은 분명 작전을 수행하러 갔다가 건백에서 서규찬과 마주한 것이 분명하군."
저벅저벅,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러 장로들의 뒤를 한바퀴 돈 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 사령관은 책상을 강하게 ‘쿵!’하고 내리쳤다.
“지금 나, 사령관 흑귀(黑鬼)가 명한다. 전 장로들은.. 지금 즉시 ‘순응의 저주’를 준비하라...”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필시 그가 말한 그 저주라는 것은 최후의 최후에 꺼내들 히든 카드나 다름없던 것이었으리라.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우리 흑영은 이번 작전을 성공시켜 백영을 모두 몰아내고 이 세계를 손에 넣을 것이다. 그대들 장로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한 마리 호랑이가 되어... 절대 실수가 없도록 일을 처리하기 바란다.”
사령관 흑귀가 마지막으로 던진 강한 한마디를 끝으로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혹시라도, 일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백영을 칠 것이다. 신중에 신중을 가하라...”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쾅]
흑귀가 거칠게 문을 닥고 나간 뒤 방안은 일순간 정적이 흘렀으나, 이내 곧 시끄러워졌다. 장로들은, 어떻게든 그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바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라 사령(死靈). 일단 네 휘하에 믿음가는 정찰조를 시켜 장 티엔의 행방은 계속 알아보고, 전적으로 날 따라 움직여라.”
“예 장로님.”
제 2장로는, 황급히 나가버린 다른 장로들과 다르게 한동안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부하 사령을 투입시킨 후에도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장 티엔의 행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군...”
*
같은 날 광백의 깊은 곳.
“그렇군... 여전히 묘연하단 말이지.”
집무실에 앉아 있던 백영의 지도자 서규찬은 여전히 사라진 아내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흑영의 비밀 침투기지를 정리하러 간 사이 기습당한 아내는 실종 당일 차원의 균열에 빨려들어간 이후 종적을 감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 서 총수는 자나깨나 그때 지켜주지 못한 자신의 탓을 하며 한스러워 하고 있었다.
“총수님, 최대한 빨리 영수님을 찾아내겠습니다. 현재 흑영 관련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전 백영의 일원이 영수님을 찾고 있으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고맙네 이노우에. 수고가 너무 많구만. 그러고보니 이번 곤백 피해상황은 어떠한가.”
이노우에는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단 두명의 흑영 자객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곤백의 사람들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끔찍했습니다. 총수님도 보셔서 아셨겠지만, 생존자는 전무했습니다. 이번에 장 티엔을 처치해서 다행이지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비슷한 일이 더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 앞으로도 혹시 모를 흑영의 습격에 최대한 대비하도록 하게.”
슬쩍 서규찬의 표정을 훑어본 이노우에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의 근심이 깊다는 걸 적잖이 떨어진 거리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총수님은 이제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장 티엔이 실종되었으니... 흑영이 조금더 격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서 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난 괜찮네. 가서 이번 희생자들을 위해 염원의 기도나 올리고 와야겠군... 어서 가 보게 이노우에.”
“... 예 총수님.”
"아 참. 혼다, 혼다는 어찌 되었느냐."
"... 여전히 행방불명입니다."
이전에 세빈을 구하러 갔다가 행방불명이 된 혼다 역시 소식이 없는 상태. 규찬은 자신이 아끼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 아내를 찾는 인원은 1/10으로 줄이고, 나머지 인원 중 절반은 혼다를 찾도록."
"네? 하지만 총수님-."
"시키는 대로 하거라. 나도 균열에 빠진 사람들이 어찌 되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 예 총수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슬픈 뒷 모습을 하고 있는 서 총수를 뒤로 한 채 이노우에는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갔다.
* * *
2032년 2월 5일. 유진의 집.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어머 지훈이 왔구나? 녀석~ 갈수록 멋있어지네. 꼭 네 아빠랑 왜이렇게 닮았니!”
윤하는 나이가 먹어갈수록 자신의 단짝친구 우주를 판박이로 닮아가는 지훈이를 보며 흐뭇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유진이 집에 있죠?”
“응 그래. 아마 나갈 준비 하고 있을거다. 이쪽으로 귀좀 가까이 와 볼래 지훈아?”
지훈이의 귀에 가까이 대고 윤하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너랑 데이트 한다고 지금 유진이가 얼마나 설레있는지 아니? 푸훗...”
“네..네네?! 넷?”
그는 화들짝 놀라 뒤로 도망가면서도 좋아서 죽겠는지 표정이 헤~ 하고 변해 있었다. 윤하는 그걸 보고는 피식 웃으며 조금만 거실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부엌으로 사라졌다.
‘유... 유진이가.. 나랑.. 나랑 데이트..!!’
누가보면 유진이가 원래부터 여자였는 줄 알았을 정도로 지훈이는 여자가 된 유진이에게 너무나도 약했다. 원래 남자였을 때도 약간은 흑심을품고 있던 녀석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 귀찮아... 망할, 봉사할동은 정말 싫어...”
지훈이가 머릿속으로 헛된 망상을 마구마구 피우는 사이, 유진이가 준비를 다 마치고 방문을 쾅 하고 열어제끼며 거실로 걸어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혼자 헤헤거리고 있는 지훈이를 보자마자 그녀는 웬지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야, 나지훈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어.. 어?! 흠 으흠!!”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유진이 때문에 지훈이는 깜짝 놀라 소파에서 미끄러질 뻔 했다. 그는 민망한 모습을 보인 것 때문인지 머쓱한 표정으로 유진이의 눈을 바라보질 못했다.
“기달려 화장실 좀 다녀올테니깐. 바로 가자. 지금 늦었어.”
“응. 천천히 다녀와~~~”
휴~. 지훈이는 사라지는 유진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망상도 정도껏 해야지... 이러다가 자신의 감정을 주체 못해 단짝친구였던 그녀에게 안 좋은 감정을 심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지훈이는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유진이는 분명히 날 그냥 친구로만 보고 있다. 그러니까 나도 똑같이 대해야지. 으 안 그랬다간 내가 먼저 상처받고 말 거야.’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지훈이는 소파에 등을 쭉 기대고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그 순간 쭉 뻗은 그의 손 끝에 누군가의 피부 감촉이 느껴졌다.
“어..?”
무심코 뒤를 돌아본 그는 아까와는 다른 차림을 하고 있는 유진이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분명 30초 전엔 저 옷이 아니었는데 언제 소리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온 거지?
“유진이 뭐야 너.. 언제 옷 갈아입은거야?”
아. 그런데 뭘까 이 굉장한 광채는!! 아까전 입고 있던 캐주얼한 차림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겨우 진정시킨 지훈이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야~ 가자 나지훈~~”
그리고 이 황홀한 심정을 어찌해야 될지 몰라 당황하고 있던 지훈에게 들리는 유진의 목소리는, 그가 보고 있는 유진이로부터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쪽 화장실에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지훈이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유진이가 두명?!!”
지훈이는 그대로 입이 떡 벌어지며 이게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분신술이라도 썼느냐며 얼토당토 않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결국 유진이는 세빈과 자신 사이에서 바보가 되어버린 지훈이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뭐 그 이후 봉사활동 하는 기관에 도착할 때 까지 유진이는 이 말도 안되는 초자연현상에 바보가 되어버린 지훈이를 이해시키느라 설명을 하려 애를 써야 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욕 참느라 더 고생했을 것 같기도 하다.
============================ 작품 후기 ============================
+14.07.14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