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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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달려와서 집에 들어오니, 유진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소녀를 보고 흠칫 놀란다. 그녀가 분명 자신의 증조할머니이며 무슨 연유로 내가 그녀의 모습과 판박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도 어색한 건 매한가지.
“에엣. 나와계셨어요?”
아무리 입이 거칠고 험하고 단순무식한 유진이도 알건 알고 지킬건 지킨다. 증조할머니라니, 자기보다 적어도 60년은 더 살아오신 분인데 어떻게 연장자 앞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
“아 유진이 왔구나. 와서 과일 먹거라.”
게다가 부모님에게로부터 엄청나게 주입식 가정교육을 받아온 터라 워낙 성질이 더럽긴 해도 지킬 건 지키는 게 유진이었다. 학교에서 불량한 아이들을 다스리게 된 것도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거늘, 어찌 감히 증조할머니께 무례하게 대하겠는가.
“앗 귤! 감사합니다~”
“엄마랑 아빠는 못봤니? 잠깐 밖에 나갔다 온다더니 돌아오질 않네..”
하지만 자신과 완전 똑같이 생긴 사람을 증조할머니로 대하려니 엄청난 괴리감이 그녀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 문득 그냥 쌍둥이 언니로 대하면 안되나 하고 생각한 유진이었지만 분명 그랬다간 부모님께 뭔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접어버렸다.
“곧 오겠죠 뭐. 저를 불러놓은 거 보니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시려는 것 같은데... 할머니랑 관계된 것 같아요.”
귤을 까먹으며 TV를 보는데, 잠깐 나갔다던 부모님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빨리 들어오라고 해놓고 자신들이 안 들어오다니! 유진은 강한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아. 언제 오시는거야~!!”
“늦는구나... 그냥 우리끼리 얘기 할까? 굳이 두 사람 없어도 설명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유진은 어떻게 설명해주셔도 알아서 알아듣겠습니다‘라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며, 빨리 듣고싶다고 세빈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 유진을 보며 세빈은 어머니 미소를 짓더니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얘기하기 시작했다.
“뭐 어렵게 설명 안할거니까 잘 들어보렴. 엄마아빠가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대강 들려줬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유진은 잠깐 생각했다. 엄마아빠가 무슨 말을 했더라? 두분 몸이 바뀌었고,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백영의 착한 꿈꾸는 힘을 가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많은 희생이 있었고, 그 중 지금 내 눈앞에 계신 증조할머니도 희생되었다고 들었다.
“아... 잠깐만요. 할머니 그러고보니 돌아가셨다고-.”
아차. 유진은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곤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말실수를 한걸 어떻게 주워담을까 걱정하던 찰나, 세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괜찮다. 이미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란다. 내가 이쪽 시간으로 넘어오기 전, 2000년 겨울에 이미 난 그해 내가 죽을 것이라는건 예견하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으니까.”
세빈은 안절부절 못하는 유진을 진정시킨 뒤 불과 얼마 전 있었던 생명의 위협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나도 알고 있단다, 2000년 여름에 내가 죽게 된다는 것. 하지만 예지몽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란다. 나조차도 그 상황에 직접 마주하기 전까진 내가 꾼 예지몽이 실제로 일어나는 지 알수 없으니까 말이지.”
장 티엔과 흑향, 두 사람의 흑영에게 습격받아 죽을 뻔 했던 위기를 다시한 번 생각하자 세빈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굳이 그 순간에 그렇게 목숨에 매달리며 슬퍼할 필요가 없었거늘, 조금이라도 더 백영의 안위를 생각해야 했을 시간을 헛되이 쓴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분명 난 어떤 연유로 인해 이 곳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운명이 날 이곳으로 이끌었고, 운명이 네 모습을 이렇게 바꾸었지.”
세빈은 차근차근 유진에게 자신이 2000년 당시 백영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넘어와있는 동안에도 그쪽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굉장히 걱정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난 어서 이쪽으로 내가 넘어온 이유를 알아내고, 어서 돌아가야만 하지. 백영을 지키러 가야 한다.”
“그럼 한 시가 급한거 아닌가요?”
“그렇지. 재희와 윤하가 설명해 준 대로라면, ‘저주의 날’ 나는 ‘역명자’가 되어 백영의 모든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테니까. 이상하게도 기록엔 내가 사라진 뒤 다시 나타나서 저주를 막았다고만 적혀 있지, 자세한 내용은 없더구나. 다시 말해 결국 내가 직접 일을 마주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유진이는 세빈의 손을 잡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자신이 이런데 머리쓰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머리가 잘 굴러가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오랜만에 떠오른 좋은 생각에 그녀는 기뻐서 말했다.
“할머니, 그럼 일단 저랑 다녀요.”
“응? 다니다니? 같이 어딜 가잔 말이니?”
분명 그녀가 미래로 넘어온 이유가 있을 것이고, 자신이 여자가 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유진은, 세빈과 같이 다니면 두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짜피 저랑 생긴 것도 지금 똑같잖아요? 쌍둥이 인 척 하고 학교라도 같이 다니다보면, 뭐라도 단서가 나오지 않겠어요? 학교에서 안 나오더라도 어디에선가는 분명 잡힐 거에요.”
세빈은 이런 유진의 감을 믿기가 약간은 걱정이 되었으나, 지금은 어쨌거나 유진이 말한 방법이 그나마 해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 세빈이 굳이 유진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미래로 넘어온 이후로 꿈꾸는 힘을 쓸 수가 없게 된 건 착각이 아닌 듯 하군... 며칠동안 계속 시도해 보았지만 먼 미래는커녕 가까운 내일조차 볼 수가 없으니. 어찌되었든 현재 나와 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유진이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나.’
32년 뒤의 미래로 넘어오고 난 뒤에 생겨버린 능력의 부재. 꿈꾸는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세빈은 그 어느때보다 부담감과 걱정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괜찮은 생각인 듯 하네.”
“에... 그럼 이 방법을 쓰려면 제가 좀 무례를 범해야 하는데 괜찮겠죠?”
유진이 조심스럽게 반말을 써도 괜찮느냐를 물었다. 분명에 엄마나 아빠가 봤다간 코 깨질 지도 모르는 짓이엇지만, 세빈을 돕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뭐 너희 엄마 아빠 옆에 있을 땐 할머니라고 부르더라도, 학교에 같이 다니는 동안만큼은 쌍둥이 언니라고 부르는게 좋겠구나.”
“아.. 네 언니... 에.. 언니....”
그런데 유진은 언니라는 단어에 격한 거부감을 느꼈다. 16년 살면서 써 본적도 없는 여성어! 여성어를 직접 입으로 내려니 아직 몸과 마음의 괴리가 가득한 유진이로썬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편하게 불러. 나도 이렇게 부르면 되겠지? 유진아.”
“아 네, 아니, 응.”
유진은 굉장히 어색함을 느끼며 어떻게든 이 대화에 적응해보려고 애를 썼으나, 쉽게 적응해버린 세빈과는 달리 역시 어려워 보인다. 아무래도 나이차이도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세빈과는 달리 유진은 거슬러 올라가 반말을 해야 되니 어려운건 당연지사.
“그럼, 부모님 오시면 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도록 하죠.”
유진은 어떻게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 워낙 사람 돕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유진이었지만,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부모님께 들은 과거에 있었던 전쟁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게 무슨 거짓말이냐며 넘어갈 이야기지만 실제로 사람이 과거에서 넘어왔다는 사실이 딱딱 들어맞고 있고, 자신이 일단 여자가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한 현재, 유진에게는 이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분석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세빈은 생명의 위협을 겪고 미래로 넘어왔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그녀는 어떻게든 과거에서 저주의 날 백영을 지킬 것이고, 그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생명에 위협이 가해져선 안될 터.
‘내가 어쩌면 과대망상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라면... 분명 생명에 위해가 가해질 거야.’
* * *
2000년 1월 20일 새벽, 백영의 은거처 중 두 번째로 큰 규모인 건백(乾白)의 수뇌부.
“후욱... 흑향! 괜찮느냐!!”
“대장... 전 틀린 것 같습니다... 부디 살아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볼테니 빨리..!”
장 티엔은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올바른 판단이 서질 않았다. 당연히 성공해 보이겠다고 약속했던 흑영의 총수, 자신의 사령관과 계획했던 이 완벽하다고만 생각했던 작전이 예상치 못한 방해로 인해 실패는커녕 생명부지도 힘들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장 티엔. 무슨 속셈으로 이 곳에 왔는지는 안 봐도 뻔하구나. 그러나 이건 미처 예상 못했던 모양이지? 바로 내가 있다는 것.”
분명히 없을 것이라 예측했던 백영 총수의 기습. 그 한 방으로 인해 도망갈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서규찬... 네놈은 분명 광백(光白)에 있을 거란 정보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곳에!!”
**광백(光白) : 사람들 몰래 숨어지내는 백영의 수도 격인 은거처. 흑영에 대비한 방어선이 가장 단단한 곳이자, 가장 많은 백영 사람들이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백영의 참모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활동한다흑향의 출혈이 심했다. 이대로라면 살기는커녕 둘다 목숨부지도 힘들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흑향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네 녀석이, 나의 아내를 기습하여 그로 인해 아내가 차원의 틈에 빠져버린 건 알고 있겠지. 그래서 내 손으로 직접 복수해 주기 위해서 네 녀석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여기에 오게 되었지.”
서규찬 총수는 분노 가득한 얼굴로 장 티엔을 노려보며 손을 뻗었다. 아내가 실종된 원인을 제공했으며 살해 위협을 가했고, 곤백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괴씸한 적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
장 티엔은 한세빈이 균열에 빨려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자신이 쓸데없이 백영을 들쑤시고 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이노우에와 맞붙었던 바로 그 날, 한세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전장에는 비겁한 작전 따윈 없다고 했던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에 꿈꾸는 힘이 요동쳤다. 장 티엔은 그가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부상까지 당한 지금 상태로는 이기긴 커녕 처참하게 패배하게 될 게 뻔했다.
‘젠장... 별 뾰족한 수가 없군. 운에 맡기는 수 밖에...!!’
“... 개죽음보다는 조금이라도 덤벼 보시겠다?”
장 티엔은 있는 힘껏 꿈꾸는 힘을 끌어모아 주위에 요동치는 서규찬 총수의 꿈꾸는 힘에 맞서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부하 백향을 지키고 반전을 꾀하려는 생각이었다.
일전에 이노우에와의 결전에서와 마찬가지였지만, 더욱 강대한 힘이 부딪치자 차원의 균열들이 엄청난 속도로 두 사람의 주위에 생겨났다.
주변을 둘러싼 백영의 무리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장 티엔은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재빨리 흑향을 들쳐업고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거대한 차원의 균열이 그의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잘 가거라. 장 티엔.”
[쿠오오오]
이윽고 백영의 무리가 모두 사라지고, 차원의 균열이 그 공간을 가득 메웠다.
약 30분 뒤 균열이 모두 없어졌을 때엔,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1. 세빈> End
============================ 작품 후기 ============================
+14.07.14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