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예상했던 대로, 세빈이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가족들은 모두 패닉상태가 되었다.
“음... 그 갑자기 굉장히 당혹스럽겠지만, 우리 할머니셔. 2000년에서 지금으로 시간을 넘어오셨어.”
그나마 가족구성원 중에선 가장 별난 일을 많이 겪었던 윤하도 이번 사태엔 정말 놀란 듯 유진과 세빈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유진이가 여자아이가 된 것이 할머님과 관계가 있는걸까...?”
그리고 과거에 자신이 겪은 일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일에 어떤 사람들이 관여되었었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고 있는 윤하는 이번 유진이 사태에 할머님이 관계가 있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재희도 마찬가지로 일의 인과관계를 생각한다면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 논리에 더욱더 수긍이 되는 상황.
“에... 그럼 우리 증조할머니... 인거네?”
“그렇지.”
유진이는 거울 한번, 세빈의 얼굴 한 번 이렇게 번갈아 보며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서로의 모습에 아직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재희야, 뭐 일단 설명을 하자면 지금 내 모습은 내 젊었을 적 모습이 맞다. 네 딸아이, 아니 아들이 지금 나와 완전 판박이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어느정도 내 유전인 것 같긴 하구나... 여자로 변하면서 완전히 모든 것이 변한건 아니잖니?”
물론 유진이 여자가 되기 전과 후는 확연한 차이가 없었다. 변한 거라곤 그의 약간은 부족해보였던 여자같은 외모가 완벽히 여자로 변했다는 점일까? 그래서인지 세빈의 말에 모두가 수긍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주아가가 나와 닮은 모습으로 태어났고,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32년이 지난 미래로 떠밀려왔지. 결정적으로 네 아이가 여자가 되었다면 이건 분명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꿈꾸는 힘에 의해 일어난 일이 틀림없다.”
유진은 뭔 소린지 당췌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자기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알수 없는 얘기를 하는 게 신기해서 그런건지.
“윤하야, 네 얘기를 좀 들어야겠구나. 내가 비록 미약한 힘으로나마 예언몽을 통해 백영의 미래를 점치는 영수이지만, 이토록 오래 지난 후의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이 아닐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역시 그러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할머니. 차라도 내올까요? 이야기가 금방 끝나진 않을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하자꾸나.”
“여보, 당신도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유진이는 지금 들어도 아마 이해가 안 될테니 일단 자거라, 내일 학원 가잖아.”
계속 멍한 상태로 듣고만 있던 유진은 스스로도 이해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물 한 컵을 따라 마시고 나서 유진은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얘기들로 혹사당했던 뇌가 졸리다고 아우성치는걸 느꼈는지 침대에 누웠다.
‘뭔얘긴진 모르겠지만 여튼 심각한건 분명한가보군.’
이때까지만 해도 유진이 이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아무래도 그녀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 * *
2000년 1월 15일 자정. 곤백 근처의 야산.
“죽어도 대답을 안 하시겠다 이거군.”
장 티엔은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흐... 흐흐흐... 내가 말 해줄 것 같으냐?”
자신의 베기 한번이면 종잇장처럼 부스러질 연약한 종자들이, 쉴새없이 자신을 정신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흑향이 곤백의 우두머리를 잡아 그의 앞으로 데려온 것이 무려 7시간 전 일인데, 이 긴 시간동안의 엄청난 고문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정신나간 백영의 일원들은 항복이라는 것을 몰랐다.
‘여태껏 이런식으로 작전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천하의 내가!’
그는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곤백의 우두머리를 칠 뻔 했으나, 가까스로 그의 목이 칼과 닿기 직전 통제해 냈다.
“흑향, 별달리 알아낸 것은 없겠지?”
“예. 이자도 여태까지 처리했던 녀석들과 같습니다.”
가지고 있었던 소지품들도 모두 털어 냈고, 그 중에서도 쓸만한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곤백이라는 은신처 안의 모든 방과 비밀스러운 장소도 모두 찾아보았으나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뭘 하면 백영의 불여우를 찾을 수 있을까.
‘오랜만이군, 이렇게 냉정을 찾고 생각에 잠기는 것도...’
한참을 눈 감고 생각하던 장 티엔은 이윽고 눈을 떳다.
“곤백의 우두머리, 고맙군.”
“흐..흐흐 미치기라도 한 모양이군...”
[촤악]
그리고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자신의 앞에서 피흘리던 남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힘없이 육체가 땅으로 고꾸라졌고, 순식간에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
“대장! 그자를 죽이면 불여우의 행방을 찾기가..!!”
흑향이 놀라서 그에게 다가섰으나, 장 티엔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하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라 흑향. 할 일이 생겼다.”
약간 당황한 기색을 비치던 흑향은 굉장히 차분해진 그녀의 대장이 하는 말을 듣고 바로 정신을 차렸다. 노련한 그를 당황케 했던 이번 일도 어느정도 정리가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일단 심연(深淵)으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사령관께 보고할 게 생겼다... 보고가 끝나면 더욱 급히 움직일 것이니 남는 시간동안 흑귀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준비를 끝내놓거라 흑향.”
“알겠습니다 대장.”
**심연(深淵) : 흑영의 수뇌부. 서울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흑영의 얼마 안 되는 고위간부들 뿐이다.
장 티엔은 자신의 장검을 강하게 휘둘러 묻어 있던 피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리고는 뒤따르는 흑향과 함께 유유히 곤백을 빠져나갔다,
* * *
2032년 1월 19일.
유진의 집 근처 체육관
“후-, 후-!!”
[파팡! 퍽! 팡!]
“... 유진이 저녀석이 원래 여자였다니... 안그래도 처음 왔을때부터 조금 의심하긴 했었는데 진짜였네.”
“그러게요 관장님. 저도 좀 의심하긴 했었는데 저녀석 운동신경이 워낙 좋아가지고 남자놈이겠거니 했더만... 하하. 뭐 여튼 예나 지금이나 저런 모습에 안 어울리게 예쁘긴 하잖아요~”
[투쾅! 퍽! 퍼퍽!]
“그나저나 영기고에서 여자 메카수터가 선발된 적이 있었던가..? 쟤가 첨인 것 같지 않냐?”
**영기고 : ‘영운 기계특성화 고등학교’의 준말로, 유진과 지훈이가 다니는 학교. 메가수트를 직접 활용하는 특수반 30명 인원과, 나머지 정비 및 기술개발 양성반 120명의 학생들로 이루어진다. 과거 전교생 600명 가까이 되는 일반 고등학교였으나, 2026년부터 시작된 인재양성 프로젝트에 따라 학교를 개편하여 현재의 특성화 고등학교가 되었다.
**메카수터 : 메카닉 수터(Mechnic Suiter)의 준말로, 메카수트를 이용하여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 국내외의 각종 중요 기관에 배치되는 인재들을 일컫는 말. 주로 특성화 학교들의 특수 학생들을 부를 때 쓰임.
“영기고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여자 메카수터는 드물죠. 실제 일하고 있는 전문가들도 남녀 비율 거의 20:1인가 그렇잖아요.”
단발이라고 하기엔 약간 긴 머리를 찰랑이며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는 유진에게 그 소리가 안 들릴 리가 없었다. 안그래도 열 받은 찰나에 샌드백에게 화풀이하고 있는데, 관장님이랑 부관장님은 신나서 자기 얘길 하고 있으니...
‘아오. 그냥 남자로 속이면 된다니까 왜 엄마는 언제 여기저기 얘기를 다 하고 다닌거야!!’
[쾅!]
“어유. 저것 봐라 저거. 생긴건 톡치면 날라갈 것처럼 생겨가지고 샌드백 부서지겠네.”
“얌마 한유진! 살살 쳐 임마!”
‘님들이 내 맘을 아세효?! 아놔!’
[쾅!]
결국 그 날 얼마나 샌드백을 두드려 댔는지, 천장에 박힌 나사가 살짝 풀렸다는 얘기가 나중에 들렸다고.
“한바퀴 돌고 올게요. 샌드백 내꺼임!!”
지훈이가 와서 뛰자고 말하기 전까지 샌드백에 화풀이는 계속되었고, 약 20분정도 걸리는 달리기 후에도 자기가 치겠다고 찜까지 해놓고 나가는 유진이었다.
“... 저것이. 어째 원래 성별을 밝히더니만 더 싸나워진거 같다잉. 안그냐 재호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관장님이 보기에도 그러세요? 저도 그런데. 길가다가 양아치들이 쟤 잘못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리겠네요.”
유진은 후다닥 체육관을 나와 근처의 공원으로 뛰쳐나왔다. 지훈이가 옆에 같이 있었기에 그녀는 나오자마자 주절주절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짜증나짜증나짜증나짜증나짜증나. 진짜 여기나 저기나 이뻐 이뻐 이뻐, 이쁜데 싸나워. 뭐 어쩌라고? 내가 썅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된 줄 아나!!”
“유, 유진아 공원이야 공원! 조금만 목소리 낮춰!!..”
“아 좀 닥쳐봐. 진짜 안그래도 성질나는데 욕까지 못하게 하니까 더 빡치잖아.”
지훈이는 이렇게 유진이의 거친 입이 계속되다가는 주위 시선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그녀를 말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가뜩이나 그녀의 부모님들께 부탁받은 ‘입단속’을 하려고 하는게 쉽지가 않아 힘든데.. 가뜩이나 성난 그녀를 달래는 건 더 어려웠다.
“지훈, 우리 운동 끝나고 씻은 담에 오락실 가자.”
“응? 오락실? 청권 하러 가게?”
“아니. 펀치머신 좀 부숴버리게.”
얘가 이러다가 메카수트 입고 펀치머신 때려서 아예 날려버리려는 속셈은 아닌지 하고 걱정이 되는 지훈이였다. 그녀를 따라가기 싫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찼다.
[Lovin' you-]
“여보세요!”
[어쭈. 오늘은 좀 빨리 받는다~?]
아주머니다! 지훈이는 야밤에 유진이에게 끌려가 오락실에서 시다바리가 될 뻔한 기회를 막아줄 것만 같은 아주머니의 전화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응.. 응 그래서 일찍 오라구?”
[그래 증조할머니랑 할 말 있으니까, 딴 데로 샐 생각하지말고 바로 와.]
“끙... 알았써...”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데다가 급하신지 아주머니는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리셨다. 너무 기쁜 지훈이었지만 겉으론 내색 하나 안 하고 조심스럽게 유진에게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어... 집안일.”
한숨을 푹 쉬는 유진의 등을 토닥이며 지훈은 그만 쓸데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내일 내가 피방 쏠테니까 마음 풀어~ 형 용돈 받으셨다.”
순간 번쩍이는 유진의 눈을 보며, 지훈은 아차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먹이를 발견한 야수의 눈으로 달려드는 유진이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내일 학원 없으니까 일찍 체육관 갔다가 달릴까~? 호호호.”
아... 그의 지갑에서 5만원이 날아가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린다. 2032년 물가로 pc방 한시간은 3천원이라는 거금이 들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14.07.14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