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 *
다시 2032년 1월 14일.
딸 유진과의 유쾌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황홀했던 면회를 마치고 또다시 일에 매달리던 재희는 알 수 없는 껄끄러운 느낌으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퇴근길에 오르기로 했다.
분명 이렇게 행복한 면회를 마쳤는데, 바라던 딸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망이었던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쁜 딸이 도시락까지 싸 들고 와서 날 기쁘게 해 줬는데!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찜찜한거냐 이거지.’
그가 급히 퇴근길에 오른 이유는 일 하는 도중에 자꾸 아까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도 어린 소녀가 자신의 할머니라고 말하며 자길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는데 궁금하지 않은 게 더 웃기긴 했다.
그렇다고 이 허무맹랑한 말만 믿고 병원을 가고 있느냐, 아니었다. 재희는 분명 자신의 본능적 감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에 이끌려 병원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런 이끌림에 굳이 몸의 제약을 두려 하지 않았다.
‘나의.. 할머니라.’
그런데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오류가 하나 있었다. 분명 자신은 20여 년 전에 몸이 바뀌었고 그 전에 살아계실 적에 여러 번 뵙긴 했지만 그녀가 기억할 재희의 모습은 분명 서윤하일 때의 모습일텐데, 어떻게 지금 윤하가 재희가 된 것을 알고 부른단 말인가.
‘그렇다면 원래 재희 쪽 할머니는? 윤하가 깊이 얘기한 적은 없지만 분명 윤하의 말로는 재희의 할머니께선 재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쪽은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겠지.’
분명 이렇게 하나하나 추측해보며 가능성 없는 예상들을 하나씩 쳐 내고 보니 남는 것은 단 하나의 가능성, 맨 처음 생각했던 어린 시절 윤하의 할머니라는 답이 나왔다.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 있는 이것도, 현실의 벽 앞에 서니 허구에 불과한 얘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분명 운명의 날 이전에 역명자로써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재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깊은 생각은 떨쳐버리기로 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직접 가서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되겠어.’
생각 대신 눈을 믿기로 한 재희는, 어떻게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 불길한 기운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
[Perfect!]
“이예~ 봤냐? 나지훈? 으하하하!!”
“... 너 쩐다. 언제 이런걸 연습한거야 도대체?!”
아빠와 헤어지고 나서 집에 들어가기 아쉬웠는지, 유진이는 좀더 놀다가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고 번화가로 나왔다. 지훈이는 윤하에게 유진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유진을 따라온 상태.
“내가 집에서 심심할 때 뭘 하고 있겠니. 그리고 니가 마치 하루종일 내 옆에 붙어 있던 것처럼 얘기 하지 마!”
“... 그야 그렇긴 하지만, 메카수트 때문이라도 너랑 거의 붙어있는 건 사실이잖아.”
어짜피 윤하도 늦게 들어온다고 했고, 재희는 또 일이 생겨 어딘가의 병원으로 가봐야한다고 얘길 했기 때문인지, 유진은 지금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권이라... 이거 예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당연하지. 내가 우리 엄마랑 하는거 너 몇 번 보지 않았었나?”
[Here comes a New Challenger!]
“아아~! 맞아. 그러고보니 너희 어머니도 했었지 참.”
지훈이는 아직도 기억이 났다. 얼마 전 휴일 유진의 집에 놀러갔을 때 윤하와 유진이 플레이액티베이션3를 깔아 놓고 불꽃 튀기는 대전을 벌였던 것을. 바닥엔 두 사람이 먹은 간식들의 잔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그걸 지켜보고 계시던 아저씨의 어처구니 없는 표정은 가히 장관이었다.
** 플레이액티베이션3(Play Activation 3) :
줄여서 플락삼(Pl Ac 3)이라고 부르는 최신 비디오 게임기. 2031년 일본의 손이(Son2)사가 개발했으며 가장 인기있는 타이틀로는 ‘청권:폴 피닉스의 역습(2032)’와 ‘에일리언 헌터G(2031)’가 있다.
“우리엄마가, 왕년에 일본가서 한번 오락실을 제패한 적이 있다나봐. 예전에 청권 시작하기 전에 궁금해서 이것저것 검색해 봤는데, 엄마 얘기가 나오더라고.”
“푸핫.. 말도 안돼. 하긴 그러니까 너랑 그정도로 맞붙을 수 있었던 건가.”
“그치. 내가 이래뵈도 온라인상에선 꽤나 알아주는 몸이란 말씀이야. 근데 충격인건... 엄마는 20년만에 해본다는데도 나랑 거의 비슷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윤하의 청권 실력은 되짚어보면 되짚어볼수록 대단한 것 같았다. 유진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어찌보면 그녀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이 두 여자를 그렇게 강하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자뵤!”
[Great!]
그래도 그렇지, 사람들이 보기엔 웬 고등학생 여자애가 신나서 실력자들을 격파하고 있는 모습이 보통 신기한 모습은 아닐 터. 지훈이는 다른 사람들이 유진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다는 것이 언짢았는지 한 판 끝나고 쉬고 있는 유진에게 어서 나가자고 재촉했다.
“싫은데.”
“엑.”
그러나 순순히 따라 나가줄 유진이 아니었다. 애초에 유진이가 지훈이 여자친구였으면 모르겠으나, 둘이 그런 관계도 아니었고, 원래부터 유아독존이었던 유진이 지훈이 말을 들었던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아 물론 예외는 있다. 메카수트 정비 때만 얌전해지는 건 빼고.
[Lovin' you- is easy cause you're beautiful~]
“으악 깜짝야!”
지훈이가 어떻게 유진을 여기서 끌고 나가 집으로 바래다 줄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오락실이라 볼륨을 잔뜩 올려놓은 유진의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아빠네. 아직 밖이신가?”
전화를 건 사람은 재희였던 모양. 지훈이는 아저씨에게 약간이나마 희망을 걸고, 제발 부디 유진을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응 아빠. 응... 네?!”
기도가 들었던 것인지. 유진은 통화하다 말고 황급히 벗어두었던 외투를 걸치고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엥? 왜그래 유진아.”
“아빠가 큰일이라고 빨리 와보라는데? 일단 와보면 안대서 가보려구.”
그래도 아빠 말이라고 바로 실행에 옮기는 유진을 보며 지훈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이 녀석 부모님 정말 무서워하지.’
“뭐해 멍때리고! 빨랑 가자.”
“아, 알았어!”
*
“이게 꿈인지 생신지...”
“미안하구나. 이런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나도 생각지 못했는데. 내가 도움이 되긴 커녕 짐이 되겠구나.”
할머니라고 자신을 칭하던 사람을 만난 재희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었다.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머물러 2분을 그 사람만 바라봤다.
그가 예상했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어린 모습의 그녀를 보니 재희는 머리가 아파왔다.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인정하는데 몸이 인정을 하지 않는 듯 답답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32년이 지난 지금으로 넘어오게 되신 거에요 할머니.”
“잘 모르겠네. 마지막에 거대한 차원의 균열에 빨려들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 세계였던 것 같다. 넘어오기 전에 큰 상처도 입었는데 이쪽으로 넘어오고 나니 상처도 사라졌고...”
분명 한참을 젊어진 모습이었지만, 재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녀의 얼굴에 약간씩 겹쳐보이는 것으로 보아 분명한 그의 할머니, 한세빈이 맞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차원의 균열을 통해 이리로 넘어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변한 모습이 어째서 얼마전 딸로 변해버린 자신의 자식과 이리도 닮았는지. 그는 머릿속이 정리되기 전까진 별다른 말은 삼가기로 결심하고, 최대한 진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유진이가 여자로 변해버린 것이, 할머니께서 미래로 넘어오신 것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병원에서 그녀를 모시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재희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되려 그의 그런 모습 때문에 세빈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갔지만, 재희는 일단 관계된 모든 사람들과 그녀를 마주하게 한 뒤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도... 우리의 저주받은 운명을 극복하려는 모든 작전은 성공적이었나보구나. 이렇게 먼 미래에 왔는데도 너희들이 이렇게 건강히 살고 있는 걸 보니...”
“...”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무려 22년 가까이 지났지만, 날 대신 희생한 윤하를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 그리고 그 날이 오기까지 날 속이려 엄청나게 애썼던 가족들의 노력이. 그리고 그것보다 더 이전에 백영을 구하기위해 애쓴 윗대 사람들의 노력이.
“그럼요.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날 살리려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나의 아내가 있었으니까요. 모든 것은 정말 운명처럼 흘러갔어요.”
세빈은 양 손을 가슴에 가져대고 눈을 사르르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백영의 영수. 우리 조직원들이 보지 못하는 미래를 읽으며, 그들이 가야할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란다. 유나가 죽는 그 순간까지의 미래를 인지하고 사람들에게 나아갈 길을 알렸지.”
“걱정이 참 많이 되셨겠어요. 모두 할머니께서 지시하신 대로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미래가 바뀔지 알 수 없는데... 그걸 직접 보면서 조율할 수 없으셨으니 말이에요.”
“그래도 나의 사람들을 믿어야지, 그들은 잘해 낼거야.”
재희가 몰던 차가 천천히 그의 집 차고로 들어섰고, 시동을 끄고 내리기 직전, 세빈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미래로 넘어오게 되리란 것도 어렴풋이 예상하곤 있었단다... 뭐 당시엔 그것이 내가 미래로 넘어가는 꿈이라곤 생각치도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