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약속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나오지 않는 아빠 때문에 유진은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8cm굽의 구두도 기다리면서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다.
[또각 또각 또각]
“저... 유진아, 좀 앉아있어.”
시끄럽게 울려퍼지던 구두굽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엄청나게 매서운 눈으로 지훈을 노려보던 유진은 그대로 지훈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씨-”
“야, 야 안돼!”
“안해 욕!! 아 진짜 배고파 죽겠는데 아빠는 언제 나오는거야..”
유진은 다시 시계를 봤다. 이미 30분이 넘게 훌쩍 지나가버린 시계를 보니 화가 또 치밀어올랐다. 아무리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아버지라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경호실장님.”
“어, 그래.. 헉헉... 고맙다. 수고해라.”
그렇게 씩씩대며 겨우 튀어나오려는 욕을 참고 있는데 멀리서 재희가 부하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유진은 최대한 성질을 죽이며 벌떡 일어나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그리고는 펄쩍 뛰어 재희에게 안긴 뒤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한거 아니에요? 이럴줄 알았으면 안오는거였는데?’
유진은 평소와 같이 재희가 너스레를 떨며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 그의 반응은 남달랐다.
“어... 어, 그래? 미안... 아빠가 일이 밀려가지고 처리하느라 늦었어... 미안해, 우리 딸!”
어라? 뭔가 이상한데. 유진은 평소같았으면 오히려 화를 냈을 재희가 이런식으로 자신에게 지고 들어오자 기분이 묘했다.
‘설마 딸이 된 탓에 아빠도 마음이 누그러지신건가?!’
그녀는 생각했다.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아빠도 엄마도 모두 나한테 죽고 못 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이미 아빠는 반쯤 자신에게 넘어온 상태로 보이니 엄마만 어떻게 하면... 이 집의 왕은 자기가 될 것이라고 망상하기 시작했다.
“흥. 얼른 가요, 배고파 죽겠네.”
“그래그래 우리 딸. 저쪽으로 가자, 지훈이도 따라오렴.”
“아아 네, 안녕하세요 아저씨.”
걸어가는 내내 유진이는 최대한 재희를 구워삶으려고 여러 가지 수를 던지느라 바빴다. 그런 두 사람을 뒤에서 쫓아가는 지훈이는 오랜만에 뭔가에 열심히인 유진이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바빴다.
“우와. 이런데가 다 있네.”
“그럼 이런 것도 마련 안 되어있을까봐? 여긴 높은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데.”
재희는 유진이가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지 얼굴에 머금은 함박웃음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유진이가 가져온 도시락을 하나하나 꺼내며 세팅을 하는데, 재희가 그 모습을 보더니 뭔가 울컥 하시는 듯 눈가가 촉촉해지셨다.
“... 왜 그러세요 아빠. 무섭게.”
“아니 그냥... 너희 엄마가 아빠 군대 있을 때 면회온게 생각이나서... 그때랑 너무 판박이야.”
거의 20년 전 군대에 있을 때 면회를 왔던 윤하의 모습이 겹쳐보인다며 재희는 손수건으로 슬쩍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세팅이 끝나자마자 유진의 곁으로 다가가서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우리 유진이 아빠가 안아봐도 될까?”
분명 재희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금 모습이 과거 윤하였을 때 자신을 돌봐주던 아버지 서진과 굉장히 닮아있다는 것을. 하나뿐인 딸에게 매달려 사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뼈저리게 느끼며 그 시절 아버지께 매몰차게 대했던 것으로 인해 가슴 한켠이 쓰렸다.
“에엥? 그... 그러세요.”
유진이 아들로 지낸 지 무려 17년이란 세월동안, 아기일 때 빼고 유진을 거의 안아보지 못한 재희는 딸이 된 기념으로 꼭 한번 안아주고 싶다는 소망을 실현시켰다.
“한 10년만인가... 이렇게 안아보는게.”
“...”
자신을 안고 있는 아빠를 보며 유진은 오만감이 교차했다. 아들일 땐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런 스킨십을 배제한 채 살았으니 아빠도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싶기도 하고. 워낙 문제만 일으키며 살아왔으니 그동안 자식 자랑도 제대로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유진아.”
“응?”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놓고 있던게 큰 실수였다는 걸, 유진은 금세 깨닫게 되었다.
“꽉 잡으렴.”
“으으응???”
순식간에 유진은 원심력에 의해 다리가 공중으로 떠올랐고, 재희의 엄청난 팔힘에 이끌려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정말 첫 면회 기분 난다! 옛날생각 너무 나네!!”
“으암ㄹ만ㅁ앍!”
재희의 돌아온 청춘 자이언트 스윙으로 인해 유진은 반쯤 혼이 나가버렸고, 결국 30분 동안 음식에 입도 못 댈 정도로 어지러움을 호소해야만 했다.
“아.... 진짜 다시는 하지 마요... 나 아직도 메슥거려.”
“미안... 미안하다 우리 딸...”
그 이후 재희는 계속해서 유진에게 사과를 해야만 했다.
“아 정말. 하마터면 기껏 싸온 도시락 손도 못 댈 뻔 했잖아요!”
계속해서 소래기를 질러대는 유진이 덕택에 재희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얘기도 못했고, 옆에있던 지훈이는 덩달아 머쓱한 기분에 어쩔줄을 몰라 했다.
“으, 내가 아침부터 얼마나 고생했는데, 엄마 돕느다... 먹으려고 하니까 손도못대게 하구...”
“여튼 어서 먹자 유진아. 아빠가 이렇게 딸이 싸준 도시락을 함께 먹는 걸 아침일찍부터 고대했단다!!”
“그래, 일단 먹자. 다 식겠다.”
유진이의 넋두리가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려는 것을 감지한 재희와 지훈이는, 재빨리 그녀의 다음 말을 막은 채 허겁지겁 도시락을 펼치기 시작했다.
“우와.. 이게 정말 유진이 너가 만든게 맞아?”
“완전 진수성찬인데? 아빠가 새우튀김 좋아하는거 어떻게 알았길래 이렇게 잔뜩...!”
두 사람은 입에 음식을 꾸역꾸역 넣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렇게 과한 칭찬을 받은 경험이 거의 없는 유진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일 수 밖에 없었다.
‘휴, 영영 도시락 못 먹을 뻔 했네.’
그녀가 구운 고소한 베이컨을 입 안에 넣으며 지훈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뭐, 뭐 내가 전부다 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굽고 튀기고 하는건 내가 거의다 했어...”
막 칭찬받는게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유진이의 머리를 재희가 쓰다듬어주었고, 유진은 기분이 좋았는지 배실배실 웃었다. 지훈은 그런 행복한 유진의 미소를 보며 맛있는 도시락을 먹으니 복상사 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크- 행복하다!’
* * *
2000년 1월 14일.
백영의 은거처 중 세 번째로 큰 규모를 가진 곤백(坤白)의 깊은 곳.
“크으으윽- 컥- 이것만은... 안된-"
[푸슉]
“시끄럽게 말이 많군...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 중얼거리는구나.”
“조용해졌습니다... 하나의 기척 빼고는 남지 않았습니다.”
깊이 눌러썼던 두건을 벗자, 익숙한 모습의 두 사람이 보였다. 얼마 전 세빈을 죽이려 했던 두 명의 추적자였다.
“흑향. 마지막 기척을 쫓아라, 그 녀석이라면 불여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예. 분부대로.”
“아 그리고, 절대 죽이진 마라... 죽기 직전까지의 고통을 줘서 사실을 불도록 만들어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흑향이라 불리는 여성은 눈을 감은 채 양 팔을 벌려 주변의 기척을 온 몸으로 느끼더니, 이내 뭔가 잡아낸 듯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들고 있던 단검 두 자루를 허리춤에 꼽은 뒤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 멍청한 녀석들. 세계를 손에 넣기 위하여 하나씩 이상을 실현해가는 우리 흑영과 다르게 여전히 절대신이라는, 존재 여부도 알 수 없는 것에 목매어 기도만 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장 티엔, 4년 전 발탁된 흑영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암살자이자, 염원력으로도 단연 으뜸으로 평가받는 흑영의 선봉장. 흑영 혁명군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가장 최전방에서 명령을 수행하기로도 유명하다.
“한세빈... 어디로 사라진거냐.”
그러나 그 장 티엔에게도 최근 백영의 영수인 한세빈을 놓쳐버린 것은 굉장히 큰 오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것도 크게 힘을 가진 것도 아닌 50대의 연약한 여자를 상대로 임무 실패라니, 그는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긴 장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없애주마.’
============================ 작품 후기 ============================
+14.07.14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