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욱신]
갑자기 느껴지는 심장 쪽의 고통에 세빈은 눈을 떴다.
깨자마자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은 몽롱한 그녀의 정신을 깨웠고, 곧 그녀의 정신마저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사무쳤다.
“어떻게... 된거지..”
차가운 겨울 날씨에 밖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인지 몸이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눈은 어느덧 그쳤는지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주변에는 쌓인 눈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골목의 풍경만이 보일 뿐이었다.
‘목말라...’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 세빈은 비틀비틀 골목을 빠져나가서 힘겹게 큰길로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 걸, 그녀가 서 있는 곳은 그녀가 알던 곳과는 너무나 달라 보이는 세상이었다.
그녀가 알던 세상의 약간은 때묻은 듯 모던함이 느껴지던 건물들은 온데간데 없고, 수많은 유리와 철골구조물로 가득한 건물과 고층빌딩들이 그녀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가 알던 차들이 아닌 유선형의 차들이 거리를 다니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홀로그램이 움직이는 판을 하나씩 들고 다니고 있었다.
“이게 대체..무슨...”
그리고 너무나 놀라운 광경을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굳어있던 세포들이 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배 쪽에서 갑자기 고통이 몰려왔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는 아직 남아있는 복부의 혈흔을 보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출혈이 심했... 는데....’
[털썩]
몰려오는 고통과 함께 그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세빈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한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녀를 달콤한 잠에서 깨기 싫게 만들었고, 누군가 눈을 감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부드럽게 만져주고 있었다.
“으음...”
“어, 환자분, 정신이 드시나요?”
서서히 눈을 뜨니 환한 불빛이 잠시 시야를 흐리게 했다. 몇 초 후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었다.
‘...의사?’
“눈동자를 불빛비추는 쪽으로 움직여보실래요?”
세빈이 의사라고 판단한 사람은 가운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더니 그녀의 눈에 비추었다. 세빈은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했지만 하라는대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여주었다.
“네 정상이시네요. 옷에 혈흔이 엄청나길래 위급한 환자이신줄 알았는데 심각한 부상은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추위랑 영양실조로 인해 잠시 기절하셨던 것 같네요.”
의사는 세빈에게 그녀가 어떻게해서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 등을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 들어보니 아까 두 번째로 기절한 곳에서 어떤 괴상한 여자가 업어다가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세빈은 온 몸의 감각이 예전보다 약간 둔해진 느낌이 들어 손가락도 움직여보고 팔다리도 움직여보았다. 너무 추운 곳에서 오래 있었던 탓인지 아직도 몸이 살짝 굳어 있었다.
“일단 내일 오후까지는 병실에서 몸 따뜻이 하시고 따뜻한 물 가져다 드릴테니 드시면서 영양제 맞으시면 되구요, 퇴원하시기 전에 부모님께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시면 될 것 같네요.”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 중에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음을 느낀 세빈은 뭐라고 물어보려다가 그냥 말았다.
‘... 52살 먹은 사람한테 부모님을 모셔오라니 저 의사 어디 이상한거 아니야?’
그도 그럴 것이 세빈의 나이는 2000년 기준으로 52세였다. 많은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꽤 연로한 편에 속했으니 어린애처럼 취급하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와서 세빈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여전히 몸이 얼어있는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추워..’
*
얼마나 잤을까. 세빈이 다시 눈을 뜨니 저녁이었다. 세빈을 위해서 방 안에 난방을 빵빵하게 틀어놓았는지 방안이 후끈후끈했다.
이불을 걷고 나오면서 세빈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기가 들었는데, 이정도로 방을 데펴놓으니 오히려 열이 났다.
세빈은 난방을 꺼달라고 요청한 뒤 볼일도 볼 겸 세수도 하러 화장실에 가기로 결심하고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슬리퍼를 신으려 허리를 굽혀 찾아보다가, 그녀는 뭔가 이상한 점을 또 느꼈다.
‘어라. 허리가 안 아프네?’
비만 오면 쑤셔왔던 허리가 아프지 않은 게 느껴지자 세빈은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슬리퍼를 신고 자리에 선 세빈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봤다.
‘유연해.. 뭐지? 회춘이라도 한건가?’
평소같았으면 뼈 소리가 우렁차게 났을 관절에서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움직여도 부드러웠다. 관절이 아프지 않으니 세빈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장실에 도착한 세빈은, 도착과 동시에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에 놀라 간호사가 뛰어오는 등의 소동이 있었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 이게 뭐야. 내가 왜...”
잠시간 느꼈던 몸의 자유로움과 가벼움, 그리고 고통 없는 관절이 뇌리를 스쳐갔고 그것의 이유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이 광경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세빈은 환호를 해야할지 좌절해야 할지 오묘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젊었을 때로 돌아갔어-?!”
마치 10대의 탄력넘치고 뽀송뽀송한 피부며, 탄탄한 바디라인에 똘망똥말한 눈망울. 본의아니게 모든 아저씨 아줌마들이 꿈꾸던 회춘을 해버린 세빈은 그저 넋 놓고 젊어진 자신을 바라 볼 뿐이었다.
“하아.. 이걸 좋아라 해야할지..”
물론 회춘한 건 좋은 일이었다. 몸에 관절염 같은 노인성 질환도 하나 없이 모든 활동에 제약이 없는 건강한 몸.
누가 봐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세빈은 걱정거리가 산더미 같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수(靈首)라는 지위가 절대 혼자만 생각해서는 안 될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서규찬 총수가 백영의 물리적 통솔권을 쥐고 있다면, 세빈은 모든 백영의 능력자들을 단결토록 만드는 정신적 지주. 그녀가 원래의 모습을 잃고 어려졌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정신적 통솔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지금 내 이 모습을 보고 모두들 날 믿고 따라와 줄까?’
늙긴 했어도 연륜이 넘치는 그녀의 모습은 모든 백영의 일원들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너무나 앳된 모습에, 믿음직한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는... 정말 말 그대로 그냥 한 명의 소녀일 뿐이었다.
힘없이 터덜터덜 침대로 돌아온 세빈은 그대로 털썩 누웠다.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온 몸을 집어넣어 웅크린 채 그녀는 좌절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옅은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어찌 해야할지 걱정하고 있는 그녀의 귀로 또다시 충격적인 무언가가 전해져왔다. 아마도 병실의 한쪽에 놓여진 TV에서 나는 소리였을 것이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32년 1월 13일 저녁 8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냥 뉴스구나 하고 다시 잠이나 자려고 눈을 감는데, 세빈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이불을 세차게 걷어낸 뒤 TV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뭔가 달랐다. 그녀가 살던 시대에서 보던 뉴스가 아니었다. 년수를 잘못 들은게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뉴스에서 비치는 세계나 한국의 모습은 절대 2000년은 아니었다.
세빈은 어안이 벙벙했다. 멍하니 몇분동안 TV만 쳐다보다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떼서 옆 자리의 환자에게 물었다.
“저... 혹시 올해가 몇 년인가요?”
그 사람의 세빈을 보는 표정이 이상하다는 듯 보였지만, 세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궁금한 건 오직 지금이 몇 년이냐는 것이다. 그녀가 살던 2000년이 아니면 몇 년이란 말인지.
“2032년인데요?”
아. 이건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세빈은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것을 간신히 부여잡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꿈이야. 꿈일거야... 자고 일어나면 다시 2000년으로 돌아가 있을거야...’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려 눈을 질끈 감은 세빈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자메스 : 그럼요 적응되면 괜찮아집니다.
너도변하는거닷 : ㅋ? 적절한 2연참 아이오나 : 아- 계산해본 결과 더되는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십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