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아 젠장. 미치겠다... 이 곳으로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어가는데도 후임이 들어오질 않는다. 여전히 걸레는 내 주무기이고, 보조무기로 소비도 손에서 뗄 수가 없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막내생활을 계속해야 하는건지... 스트레스가 정말 한가득이다.
"야! 재희야!"
"이병, 한 재 희!"
"오늘 내가 근무가 있으니까... 알지? PX가서 내가 말한대로 잘 사 놔. 여기 카드 줄테니까 너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먹고."
"예!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 내가 이건 너니까 맡기는거야. 잘 사놔."
게다가 이놈의 생활관 선임들은 어찌나 내게 잡일을 시켜대는지, 훈련이나 근무를 나가는 시간이 아니면 맨날 난 심부름꾼 신세다. 주업은 청소부, 부업은 심부름꾼. 군대에서 공부하고, 자기 하고 싶은 것 실컷 한다더니 그것도 때에 따라 틀리잖아! 정말... 이등병이라 그런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네.
"저... 한진우 상병님. 저 전화좀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뭐? 너 아까도 했었잖아. 또 하게?"
"그... 아까는 부모님이랑 했고, 이번엔 여자친구..."
"하여간, 그놈의 여자친구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알았으니까 갔다오면서 너 어제 탁구 내기 진 음료수나 사와."
"옛! 감사합니다!"
후, 정말 윤하한테 전화 한 번 하기 힘들구만. 왜 윤하 얘는 전화를 안 받는거야 대체? 오늘 분명 토요일이라 학교도 안 갈텐데... 오늘도 설마 독서실 가서 공부만 하고 있나 얘가...
[아름다운 그대 모습에~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달칵]
컬러링이 한 30초 정도 흘렀을까. '아... 이번에도 안받는구나'하고 좌절하려던 나는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윤하야!!"
[꺅! 아, 놀래라... 왜 갑자기 소리지르고 그래?]
"우쒸, 넌 남자친구가 전화했는데 반응이 그게 뭐야!"
[으웃... 나 독서실인데 니가 갑자기 소리지르니까 그렇지...]
난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윤하에게 갑자기 짜증이 났다.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의 기쁨은 또 어디가고 또 이러지...? 아우 이럼 안되는데.
"끙... 미안. 아까 공부하고 있었어?"
[응, 은주가 모르는 거 있다고 물어보러 왔었거든.]
그런데 윤하가 나와 떨어져 있어도 난 외도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과 한 학년 차이가 나서 잘 놀러다닐 수도 없고, 고3이니만큼 마침 재수를 하게 된 은주와 함께 도서실에 착실히 다니고 있어서 큰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밤에 이상한 사람은 없지?"
[뭐 있어도 은주가 있으니까 말야. 그리고 니가 가기전에 알려준 호신술도 있고...]
"큭큭 그래그래. 공부는 잘 되 가?"
게다가 서울의 유명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윤하의 열의는, 내가 입대 전에도 직접 보고 왔었던지라 오히려 때때로 매일 전화것는 것도 미안할 때가 있었다.
[너 혹시, 방해될까봐 전화 안 하고 그러면 안 된다? 내가 지금 누구 하나 믿고 이렇게 열공하는지 알지?]
그래도 그녀는 전화할 때마다 귀찮아하지 않고, 되려 사랑을 확인해 왔기 때문에 나로서는 정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둘의 사랑은 그녀의 공부 뿐 아니라 나의 군생활에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당연하지! 니 덕에 나도 이렇게 군생활 하는걸?"
[헤헷, 아 그러고보니 너 내 사진 가지고 있어?]
"어. 너가 준 증명사진 하나 있긴 한데 왜?"
[아~ 이번에 소포 좀 보내줄까 하구. 친구들이랑 다같이 사진찍은 거 있는데 너 한장 주게. 덤으로 과자도 잔뜩 싸서 보내줄게~♡]
아이구 이뻐라. 그녀는 어쩜 이렇게 뭘 해도 이쁠까. 내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날 위해 수험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많은 것을 해 주고 있었다.
"저... 그 윤하야. 면회는 언제 올꺼야?"
[면회? 음... 애들이랑 7월 말에 가려고-]
"아니아니. 윤하 너만 따로 함 오면 안돼?"
[... 너 뭐하려고 그래. 이상한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푸핫, 얘가 무슨 생각을! 여기서 보는 눈이 몇개인데 아무리 나라도 그건 무리라고!
"아니야! ... 어휴 내가 휴가때 뜨겁게 해 준댔잖아!"
[...]
말이 없는 걸 보니 그녀는 또 얼굴이 시뻘개져 있는 모양이다. 얘는 이런 말만 하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네.
[아, 암튼. 보내줄게. 걱정 말고, 면회 갈 테니까 좀만 기다려! 우리 6월 모의고사가 얼마 안 남았단 말야.]
"알았다 알았어~ 공부 열심히 해요 여보~."
[푸핫!!]
푸하하하... 진짜 완전 귀엽다니까. 아 진짜 윤하를 안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아우아우, 진짜 군대만 아니었으면.
[그... 고마워 여보...]
얼마 전부터 나와 윤하는 서로를 부르는 호칭에 '여보'를 추가했다. 난 처음부터 이 호칭을 쓰자고 그녀에게 여러 번 말했으나, 윤하가 엄청나게 부끄러움을 타는 통에 그녀로부터 듣지는 못했다. 그래도 최근에는 개미목소리만큼 작게 기어들어가는 크기로라도 내게 대답을 들려줘서 얼마나 행복하던지... 하하.
"암튼 열심히 하고, 나 가볼게~"
[어, 벌써? ... 오늘 주말이잖아! 아직 아침이고. 전화 더 하면 안돼?]
아유... 정말 나도 너무 그러고 싶다 윤하야. 그런데 어쩌겠니... 난 이제 고작 우리부대 통틀어서 밑에서 두 번째인 이등병에 불과하다 어헝...
"나도 더 하고싶은데... 할일이 많아서... 알잖아 이등병인거!"
[헤에... 그렇지. 그럼, 알았어. 끊는다?]
윤하와 한 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전화를 붙잡고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아까 한진우 상병이 시킨 게 있으니 전화 끊으면 PX부터 가야겠군.
"응, 면회 날짜 잡히면 알려줘!!"
[오키~]
그렇게 그녀와의 통화가 끝나고, 아쉬운 마음에 터벅터벅 PX로 걸어갔다. 어디보자, 아까전에 김민준 병장놈이 부탁한게 뭐더라.
"... 아쒸, 엄청 많네 진짜 적어달라고 안했으면 망할뻔했네."
홧김에 바구니를 집어서 봉지에다 팍팍 집어넣었더니, 날 바라보는 PX병의 눈초리가 심상치않다. 헹 이딴 바구니 구멍이나 나버려라 팍팍.
생각보다 요청한 것을 전부 사려다보니 시간이 오래걸렸다. 평소에 사먹지도 못해본 물건들이 구석구석에 숨어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2만5천원입니다."
"여기요."
우와, 다 사고 보니 김민준병장이 주문한 과자와 음료수들과 간식들 가격이 엄청났다. 2만 5천원? 이 사람이 오늘이 토요일이라도 그렇지 설마 내일까지 이걸 다 먹겠다는거야 이 사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계를 보는데, 약속했던 시간보다 2분이 지나버렸다. 으악, 큰일났네 이대로 걸어가기라도 했다간 난 죽음이다. 빨리 후닥닥 뛰어가지 않으면 무슨 잔소리랑 욕을 먹을지...
"헉, 헉 헉..."
5분늦었다. 뭐라고 변명을 하지? 에이 그래도 겨우 5분인데 뭐라고 하겠어? 아니야, 뭐라고 하겠지. 아, 뭐라고 변명을 대지? 제발, 기분좋게 윤하랑 통화했는데 욕먹기 싫어!!
"어? 불이 왜 꺼져있지?"
무슨일인진 모르겠지만, 웬지 생활관 안이 어둡다. 왜이렇게 캄캄하지 오전인데? 다들 미쳐가지고 오침이라도 하는건가? 어떻한다, 일단 들어가 봐야하나...
[꿀꺽]
침을 한웅큼 삼키고 나서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돌린다. 끼익...
무슨 일일까 걱정하며 두근거리는 내 심장이, 이내 알수없는 감정으로 가득차오른다.
"어..어?"
문이 열리니 보이는 여러개의 불꽃. 살랑살랑 흔들리는 불꽃 아래로 익숙한 물체와, 으슥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러개의 얼굴들이 날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 둘-"
아, 뭐지? 잠깐. 지금 엄청난 쇼핑 후에 달려온 내게 이건 대체-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한재희!! 생일 축하합니다~!!"
"오오와아아아?"
난 벙찌고 말았다. 나에게 오늘따라 왜이렇게 심부름들을 많이 시키지 했는데, 설마 이걸 위한 밑작업이었던 겁니까 당신들!!!
"이... 이게 도대체."
"푸하하하, 야 한재희, 놀랐냐? 우리가 임마 널 위해서 준비한거야!"
"이새끼 표정봐라. 정신차려, 야 니 오늘 저녁에 널 위해 준비한 간식들은 잘 사왔지?"
게다가 내게 시켰던 심부름 물건들은 알고보니 나를 위한 선물들이었던 것. 아니 평소에는 그렇게 까탈스럽고 욕 바가지로 맥이던 분들이... 오늘따라 왜이러시는거에요 어헣헝.
"새..생일인거 어떻게 아셨습니까?"
"응? 아. 그래그래,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널 붙잡고 있으면 안 돼지."
한진우 상병이 봉지에서 내기 음료수를 꺼내가면서 신나서 말했다.
"우린 일단, 너에게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주는 오프닝 미션이라고. 진짜는 따로 준비되어 있지 후후후."
이상했다, 뭔가 알수없는 느낌이 날 휘감았다. 한진우 상병은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이 대충 예상이 되었다.
"우리가 생일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스페셜 게스트 덕분이야. 아, 그래 야 이거 입고가라 재희야. 우리가 널 위해서 밤새 몰래 다렸다 니 A급 전투복!"
정신이 혼미해졌다. 너무나도 고마운 짓을 연달하서 해주는 선임들과, 앞으로 벌어질 일이 너무나도 기대된 나머지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아아... 믿기지가 않는데. 설마 아닐수도 있겠지만... 분명 내가 생각하는 일이 맞을것 같다.
"가... 감사합니다. 언제 다리셨습니까? 완전 잘 다리셨..."
"닥치고 임마. 언능 처 입어. 스페셜 게스트 기다린다고."
억, 난 등짝을 맞고 일병 선임들에 의해서 억지로 깨끗한 전투복이 입혀졌다. 빠른 속도로 날 준비시키면서도 선임들은 내가 사온 과자중 몇개를 뜯어서 신나게 먹고 있었다.
"이.. 이병 한 재 희. 면회실 다녀오겠습니다! 충성!"
"그래, 잘갔다와. 오늘 5시까지 절대로 여기 올라오지마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등떠밀려 생활관에서 나온 나는 얼떨결에 그들이 알려준 대로 입대한지 2달 반만에 애인이 있어도 가기 힘들다는 면회실에 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난 왜 면회실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는 거겠지?
"후우. 하."
심호흡을 해 본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걸 떠올려본다.
아까전 전화했을 때 약간 당황한 듯한 윤하의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나중에 따로 오겠다고만 했지 날짜를 얘기해주지 않은 윤하의 생각을 떠 본다.
그렇다면 분명히.
"...."
저기 면회실에서 날 보며 손을 흔들고 있는 이는 분명 내가 생각하는 그녀가 맞겠지?
신기루는 아닐까? 허상은 아닐까? 내 눈이 이상해진 건 아니겠지?
"야~! 한재희!!!"
아 이제 환청까지. 아니 환청이 아닌가?
"어쭈, 대답 안 하지. 여보!!!"
아닌가봐. 환청이... 환상이 아닌가봐. 하하하하하하.
내가 생각하던 그녀가,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윤하의 모습이 분명하다.
무려 두달 넘게 목소리만 듣고 만나지 못했던... 나의 반 쪽.
"여보!!!"
그녀를, 미칠듯이 강하게 안아주고, 안아올려 풍차를 돌리고.
면회실 주변의 부대 사람들의 눈살이 찌푸려 질 때까지.
나는 그녀와 애정행각을 멈추지 못 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어떻게 왔어... 바보, 거짓말이나 하고."
왜냐하면 오늘이, 1년에 한번뿐인 제 생일이니까,
"왜긴. 우리 여보야 생일인데. 내가 모른척하고 안왔을까봐?"
"... 바보."
그러니까, 오늘만 용서해주세요. 전 행복해서 죽으렵니다.
<번외편> Fin.
============================ 작품 후기 ============================
Ayumu7 / 아아, 윤하랑 재희를 죽이고 싶어도 참으셔야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롱웰 / 남자는 꼭가야됩니다. 그래서 번외편도 군대이야깈ㅋㅋ너도변하는거닷 / 2부 이야긴 밑에서 하죠!
자메스 /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이야기 보여드릴게요!
오렌지색 하늘 / 번외편 여기있습니다. 크헤헤Nuclear_Soul / 야호 성공! 응? 아 절대 여러분의 배아픔이 즐거운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