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102화 (101/188)

102화

*

다음 날 학교에 가자마자 난 난데없는 학생들의 소란에 휘말려야 했다. 재희가 뚫어서 간신히 진입한 내 자리 앞에는 어제 내게 소원을 빌고 갔던 남학생을 선두로 수 많은 인파가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황당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데 어제의 그 소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마워요 누나!! 진짜 누나 손 잡고 소원빌었더니 이루어졌어요!"

아니 잠깐, 그래? 설마 그럼 이 사람들은 다 니 얘길 듣고 온 사람들이더냐!! 아니 그것보다 이 허무맹랑한 얘기를 그냥 우연일 수도 있는 걸 고지곧대로 믿고 왔다고?

"그런데 사람들이 그 말 듣고 이렇게 와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설마 진짜로 되다니... 나도 못 믿겠다."

난 사과하는 소년을 돌려보낸 뒤 곰곰히 생각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좋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자칫 잘못했다간 난 이러다가 우리학교의 삼신할매같은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닳아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어허! 잠깐!!"

바로 그 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며 인파를 좌우로 가른 뒤 등장했다. 얘들아! 도와주려고 온 거니 너희들?

"다혜야... 은주야!"

"훗. 자, 너희 심정은 다 잘 알겠지만 말야, 우리 윤하는 보다시피 퇴원한지 고작 4일 됬다고 4일!"

다혜는 내 야윈 팔을 번쩍 들어보이더니 버럭버럭 화를 냈다. 으아아~ 날 보호해주려는 건 좋은데 굳이 그렇게 화를 낼 필요까지야...

"이렇게 야윈 윤하에게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고, 은주는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거들면서 '암 그렇고 말고'를 계속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하의 '기적의 힘'을 시험할 테스터 10명에게만 오늘 무료로 이용할 기회를 주겠으니 알아서들 정하고, 그 다음부터는 매일 5명씩만 유로로 모시도록 하겠어!"

아... 그래 매일 5명 쯤이라면... 이 아니라 유로라니?! 얼마를 내게 하려고?

"가격은 소원의 종류에 상관없이 만원! 단 의뢰인은 반드시 윤하에게 소원을 얘기해줘야 한다는 것 잊지 말고, 윤하가 악의적인 소원이다 싶으면 거절할 수 있고 순번은 그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게 될거야."

그 말을 듣고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갑자기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밖을 보니... 맙소사 설마 가위바위보 하는거야 지금?

"저... 다혜야 꼭 돈 받을 것 까지는... 내게 기적의 힘이 있다는 것도 말도 안되는 얘기구...."

"후후 잘 봐. 오늘 테스터가 될 10인에 의해서 그 효험이 증명될 테니까."

"하..하하.."

허망하게 웃는 내 마음도 몰라준 채 다혜는 돈 굴러들어올 것을 생각하며 낄낄 웃고 있었다. 지장보살이 되는 건 면했지만... 본의아니게 사기꾼이 될 지도 모르겠다.

*

어찌 어찌 10명의 소원을 모두 들어준 나는 힘빠진 걸음으로 집에 가야만 했다. 다들 소원이 어찌나 터무니없이 어마어마한지... 그나마 일반적인 것이 사랑을 이루어달라는 두 명 정도가 다였다.

"고생했어 윤하야. 그래도 천만다행이네."

"으휴... 말도마, 다혜가 오늘 집에가서 바로 예약 카페를 만든다나 뭐라나..."

"정말 말도 안 된다 진짜. 과연 이루어질까?"

글쎄, 내 생각에도 100억을 갖고 싶다 같은 터무니없는 소원은 '그 분'께서 거절하실 것 같은데 말이지. 하여간 쓸데없이 꿈만 크다니까 다들.

"그럼 나 먼저 갈게. 잘가~"

"낼 봐~."

우주를 먼저 보내고 나서 둘이 된 나와 재희는 어제의 일 때문인지 무의식중에 자주 간격이 벌어졌다. 붙어 가자니 어제 재희의 고백이 마음에 걸렸고, 떨어져 가자니 자꾸 내 마음을 속이는 것 같아 켕기는 느낌에 그럴 순 없었다.

'끙... 뭐라도 말을 걸어야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던 나는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내 신체가 닿은 채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들, 혹시 재희도 이걸 믿고있진 않을까...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난 그가 어제 물어본 '사귀자'에 대한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난 분명 그를 좋아하고 있고, 그 역시 날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난 왜 자꾸 대답하길 핗하는걸까, 두려워서? 뭐가 두려워 그와 사귀는 걸 걱정한단 말인가. 아니면... 아직 내가 여자이며 남자와 사귀어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서...? 아니야 이것도 아니다.

그럼 뭘까. 내 마음 속 어떤 것이 그에게 모든 걸 다 주려는 날 막는단 말인가. 혹시 과거 그에게 받았던 상처가 흉터 속에 가리워져 없는 척 하며 날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때 받은 상처를 또 받게 될까 두려워 마음이 무의식중에 트라우마로 남아 그를 거절하고 있는 걸까?

그래... 뭐든 좋다. 전부 상관없이 그가 너무너무 좋다. 이 세상 어떤 굉장한 남자나 여자를 내 앞에 데려다 논들 그들은 날 사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겐 한재희라는 사람이 1년 동안이나 간호하며 내 곁을 지켜왔다는 사실이 올곧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누가 이런 엄청난 일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난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재희가 아니면 안 된다고.

"재희야, 잠깐 멈춰봐."

강가에 도착한 나는 그의 팔목을 잡고 강둑으로 이끌었다. 우리 동네를 가로지르는 강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크기의 개천에 저녁 노을이 비춰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왜그래? 갑자기 여긴 또 왜..."

재희는 내 뜬금없는 행동에 어리둥절 했지만 이내 석양을 보자 마음이 짠해지는 듯 강 둑에 조용히 쭈그려 앉아 저녁 노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난 그런 그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오늘 그에게 꼭 대답해 주겠노라고.

"석양 이쁘다. 집에서는 잘 안보이잖아."

"그러게. 종종 여기 와야겠는데."

그런데 어째 내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재희가 닭살 멘트를 마구 날려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손발 오그라들게시리.

"그래도 저 석양보다 윤하 네가 훨씬 예뻐."

"야... 야!"

내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자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지금이 바로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일어났다. 재희는 날 따라 일어서서 나를 마주봤고, 난 생각하고 있던 말을 그에게 하기 시작헀다.

"재희야, 넌 내게 애들이 말하는 '기적의 힘'이 있다고 믿어?"

"....글쎄 '염원몽'이나 '예언몽' 같은 것도 있는데 있을지도 모르지."

내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졌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혹시 지금 정말로 바라는 소원이 있어?"

그는 한참을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아주 격앙된 어조로 '응!'이라고 내게 대답했다. 그 약간은 들떠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나도 조금씩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아까 애들이 내 손 잡고 했던 것처럼 소원을 빌어 봐."

"에... 지금? 근데 그거 진짜 되는거야?"

갑작스레 그가 싫은 기색을 보이자 난 화를 버럭 냈다. 어휴 이눔 자식 분위기도 못 타고... 왜이리 눈치가 없어졌담.

"아... 일단 해 봐! 혹시 모르잖아!"

"알았어... 왜 성질을 내고 그래?"

그는 내 성화에 못이겨 조용히 눈을 감더니 내 양 손을 곡 잡은 채로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눈을 감아 잠깐 기다리고 있는데, 소원을 다 빌었는지 그가 궁시렁거렸다.

"다 빌었어... 언제 눈 뜨면 돼?"

지금이다. 바로 지금 그의 소원을 이루어줄 때가 온 것 같다.

"10초 더 감고 있어."

"네-."

난 조용히 소리없이 그에게 다가갔고, 그에게 내가 해주는 첫 선물이자 그의 소원이 담긴 입술을 그의 입술에 살포시 댔다. 내 기습 키스에 놀란 재희가 번쩍 눈을 떳고 난 슬쩍 뒤로 물러나 조곤조곤 말했다.

"재희야, 어제 네가 물어봤던 거에 대답해 줄게."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아... 난 드디어 내 본심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네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아. 나... 네 여자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어."

비록 '기적의 힘'이라는 것을 빌려 말하긴 했으나, 이것은 분명한 내 본심이다. 무려 11년간 끊이지 않고 계속된 나의 의지이자 희망.

"사랑해 한재희, 영원히... 사랑할게."

"윤하야!"

그는 내 말을 듣고는 눈물을 글썽이더니 내게로 달려와 날 꼭 안았다. 그리고는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듯 내게 뜨겁게 키스해왔다.

난 거부하지 않고 그를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이상의 트라우마는 없을 것이라고, 깊이, 마음 속 깊이 다짐했으니까.

진한 키스를 마친 재희가 다시 날 껴안으며 말했다.

"나... 영원히 너만 지킬게. 지난 1년간이 그 증거야. 꼭... 약속할게!!"

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거의 다 넘어간 해가 뿌리는 아름다운 석양이 하늘에 걸려, 이제 막 순항을 시작한 우리의 사랑을 고즈넉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15. 기적의 기적> End.

============================ 작품 후기 ============================

+14.07.11 수정 완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