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15. 기적의 기적>
원래 몸으로 돌아온 지 이틀 뒤에, 나는 담당 의사에게 엄청나게 검진을 받은 후 퇴원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랜기간 몸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빠른 건강 회복을 위해 되도록이면 영양 균등에 맞는 식단을 짜서 평소보다 약간 적게 식사를 하라고 했다. 일 주일정도 간격으로 조금씩 늘리면 몸은 금방 원래 체질로 돌아올 거란다.
아 그리고, 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신기하게도 사라졌단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저희도 환자분이 쾌차해서 참 기쁩니다. 하하하..."
담당 선생님은 내가 깨어난 뒤부터 이틀간 연신 '기적입니다'란 말만 반복하셨다. 사실 신체의 수술이나 약물치료는 몇 달 전에 끝났기 때문에 정신이 돌아오는 게 문제였는데 이렇게 돌아온게 기적이라나 뭐라나.
"진짜 그때는 몸이 어떻게 됬는지 감각도 없었는데... 지금은 좀 가볍고 허약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걸. 1년이나 누워만 있어서 그런가...'
"너는 그렇게 어쩜 아무렇지도 않아졌냐. 죽다 살아난 지 이제 겨우 이틀밖에 안 된 애가 한다는 소리가...'
재희는 곁에서 날 부축해주면서 궁시렁거렸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눈 밑이 예전보다 거뭇거뭇해졌고, 살도 꽤 빠진 것 같았다. 그래도 잘 생긴 얼굴은 여전하구만?
"얘가 뭐 이렇지... 10년 전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신 죽겠다느니 뭐니 했던 애라니까? 아픈 건 지 혼자 늘 참고 맨날 멀쩡한 척 하고 말야."
"윽... 그렇긴 하지만... 낙천적인거라고 얘기해 달라고!"
우주는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우주 말로는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는데 그런 것 같진 않고... 민혁이한테 들었다거나 한 모양이다. 어째 내가 혼수상태일 동안 날 두고 재희와 싸우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이틀 동안 관찰한 결과 우주가 포기한 모양이다. 더불어 둘이 사이가 좋아보여서 참 다행이었다.
"낙천적이 아니라 너무 뭐랄까 안 좋은 쪽으로 쿨한거지.'
"그래그래 그게 맞는 말이다."
"너희들!!'
아저씨와 레이 언니, 그리고 소이치로는 어제 하루간 나와 함께 있었는데, 세 사람은 내가 꿈에서 본 과거 얘기를 묻자 '조백'이나 '능력자'등 생소한 얘기들을 모두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모든 과거사를 전해듣고 나니 어느정도는 전부 이해가 갔다. '꿈꾸는 힘'이라는 말도 안 되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우리 부모님이 그걸 알면서도 아무 얘기 안했다는 데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아저씨는 오늘 새벽 비행기로 다시 일본으로 떠나셨다. '백영'이라는 집단의 일을 위해 수뇌부가 모여 회의를 하러 간다나 어쩐다나... 하기사 나나 일반인들에겐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 그냥 출장가시는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레이언니는 가면서 언제 한 번 재희랑 놀러오라며 그땐 입히고 싶었던 코스프레를 전부 시켜버리겠다며 입맛을 다셨고 소이치로는 꼭 다시 청권 붙자며 DS3 온라인상에서 보면 아는 척 하라고 열혈 의지를 불태웠다.
"흐읍~ 하. 오랜만이다 지~인짜 오랜만이야!"
"학교도 1년만에 와 보지? 좀 바뀐데가 있어."
가희 소식은 재희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굉장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고 직전 나는 재희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재희 생각만 하고 있었기에 어쩌면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독일 유학을 떠난 지도 1년 가까이 되가는 가희는 제법 그곳 생활도 훌륭히 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한달 전 도착한 편지를 읽어 보니 학교에서 톱 근처의 성적을 내고 있다는 말과 함께 얼마 전 새로 사귄 노란머리 남자친구의 사진도 같이 보내왔다. 내가 엄청 잘생겼다며 깔깔거릴 때의 재희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희가 그래도 별 탈 없이 재희랑 헤어져서 다행이었고, 유학길에 올라서도 평소처럼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빨리 SNS로 그녀와 연락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학교나 병원이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일단은 좀 기다리기로 했다.
"오- 이거 뭐야. 교실 리모델링 했네?"
"응 완전 깔끔하지. 아... 그런데 넌 이쪽 아니다 참. 1학년 교실은 이쪽이야."
"맞다 윤하 아직 1학년이었지? 큭큭... 우쭈쭈 우리 후배님~ 1학년 교실로 갈까요?"
"아오... 한재희 너 자꾸 그럴래? 우리 교실 들어오기 싫음 계속 그래라?"
"아놔! 장난친 것 가지구 왜그래! 맨날 데리러 갈거다 흥."
민혁이 녀석은 어제 잠시 들러서는 밝은 표정으로 날 가볍게 안아주었다. 뭐 내가 만들어 둔 영상메시지를 본 모양인데, 죽을 상을 안하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상을 남겨뒀었는데, 예상대로 재희에게 전해들은 민혁이의 당시 상황은 굉장했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는데, 내 예감이 적중했다니.
"자 여기야, 1학년 2반."
"와... 그래도 여긴 그대로네."
"응, 1학년 건물은 아직 깨끗해서. 옛날생각 난다 윤하야."
그녀석이 나연이와 커플이 됬다는게 또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알콩달콩 잘 지내는 것 같고, 요즘은 옛날의 바람기는 죽이고 사는 모양이다. 둘이서 꽤 죽이 잘 맞는지 요리 대회나 자격증 시험 같은 것도 항상 같이 간다고 자랑질을 해 댔다.
"여기서 참 많은 일이 있었지."
"난 아직도 엊그제 같아, 여기서 축제 부스 할 때가."
"크~ 그 때 윤하가 진짜 절정의 매력이었지."
"윽. 부끄럽게... 됐으니까 빨리 교무실이나 가자."
은주나 다혜는 평소 하던대로 특기개발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다혜는 출판사에 제출했던 소설이 출판 제의가 들어왔다고 했다. 덕분에 소설 작가로의 길이 굉장히 밝아졌다며 즐거워했다. 다만 아직 학생이라 졸업할 때 까지는 공부에 매진하고 기존 소설들을 재고, 수정해서 계속 틈틈히 출판 작업을 할 거라고 했다.
"으어... 배고파. 안 그래도 말랐는데 배도 엄청 고파...."
"그래봤자 아직 죽밖에 못 먹잖아."
"끙. 많이 주지도 않고 말야... 희멀건 죽 싫은데. 봉죽 사주면 어디가 덧나?"
은주는 뭐 여전히 체육 올인이었다. 요즘엔 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교사가 되겠다며 책을 펼처들었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녀 주변의 친구들이 매일 고통스럽다고... 그래도 그녀가 자신이 못하는 분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거니까 뭐. 음... 당분간은 은주 주변은 피해야겠네, 까딱했다간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르니...
"실례합니다..."
"앗, 윤하 왔구나!!"
교무실에 들어가니 작년 담임샘이 날 반겼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선생님들도 꽤 퇴근해서 교무실도 허전했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 나 아직도 1학년 2반 담임이야. 너 우리반으로 온다면서?"
"우와 빠르기도 하지, 언제 아셨어요?"
그녀는 날 보더니 꼬집어보고 안아보고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하는 등 굉장히 부산스러웠다. 그리곤 또 같은 반이라며 손바닥을 치고 좋아했다.
"정말 다행이다... 이렇게 윤하가 다시 살아나서 전교생이 기뻐하겠네."
"네? 전교생이 굳이 기뻐할 필요까지야..."
"어머 모르고 있니? 재희가 말을 안 해줬나 보구나."
선생님으로부터 듣게된 말은 좀 충격이었다. 작년부터 끊임없이 병원에서 날 간호한 재희 덕분에 전교생이 우리 얘길 알게 되었다며, 학교의 전설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나 뭐라나... 아니 잠깐, 그러면 내일부터 학교가면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윽 심히 걱정되는데 이거.
"아무튼 윤하는 이제 우리학교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고 해야겠지? 후후."
"그닥 달갑지는 않는 소리네요."
몸도 비실비실해 졌는데 어째 그 인파를 다 감당해 낼지 걱정이 되면서, 건강을 회복하면 재희에게 무술이나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교장선생님이랑 얘긴 잘 됬어?"
"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등교하면 된대요."
돌아가려는데 담임선생님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가볍게 악수하며 말했다.
"남은 앞으로의 1년 잘 부탁한다 윤하야."
"...네 선생님!"
교무실을 나오니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던 재희와 우주가 벌떡 일어났다. 짜식들, 오지게 심심했나보구나? 그래 역시 내가 있어야- 꺄악!
"어우, 배고파 죽겠네. 빨리 가자 우주야."
"그래 고고!"
"와악!! 굳이 꼭 이렇게 안고 달려야해?!!"
내가 나오기가 무섭게 재희는 날 공주님안기로 번쩍 안더니 집으로 총알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야위었어도 그렇지 너무 쉽게 안아올리는 거 아니냐 너~?!!
아니 그리고 배고파서는 뭐얏!! 그것도 이런 달리기의 이유가 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