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 *
9달 뒤.
"저 선배야, 완전 멋지지 않아?'
"와 진짜 잘 생겼고, 마음도 완전 천사라니까."
끄응...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깜빡 잠들었군...
"진짜 이 학교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렇지, 엄청 낭만적이지 않아?"
어휴 벌서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하마터면 애들이랑 한 약속에 늦을 뻔 했네.
"또 가시나봐."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진짜 로맨틱하다."
난 날 보며 히히덕거리는 두 여학생을 뒤로 한 채 서둘러 도서관을 나왔다. 크- 눈부신 했살, 벌써 청명한 가을이라니... 믿겨지지가 않는구만.
"어머! 재희 오빠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이제는 이렇게 말 걸어오는 후배들이나 선배와 인사하는 것도 익숙하다. 새해가 시작되고 2학년이 되면서부터 날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져 자연스레 이렇게 되었다.
"얌마 한재희. 또 병원 가냐?"
"하하... 네 형."
"짜식, 아무리봐도 멋진 놈이라니까. 그건 그거고 다음 주에 축구 내기 잊지 않았지?"
"당근이죠! 타도 지제고!"
"타도 지제고! 그럼 수고?"
어쩌다 보니 2학년이 되자마자 입부 권유가 쏟아졌고, 난 클럽활동에 시간을 많이 쏟을 수 없는지라 축구만 열심히 하려고 축구부에 들었다. 자주 경기가 있어 바쁘긴 했지만 윤하에게 가는 것만은 거르지 않았다. 오히려 클럽활동을 하기 시작하니 그녀에게 해줄 얘기가 늘어나서 더 좋았다.
"어라... 아빠한테 문자 왔네."
그리고 아빠는 조직의 일이 바쁜지, 윤하를 잘 부탁한다며 레이 누나와 소이치로를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이게 벌써 3달 전 일이니까, 그래 올해 6월 쯤 이었을 거다.
"...뭐야 오늘 한국 도착? 웬일이래."
그리고 그렇게 떠났던 아빠가 모두를 데리고 오늘 다시 한국으로 온다는 급보가 내 핸드폰으로 전달되었다. 갑자기 웬 일인가 싶었는데. 아마도 내가 오늘 친구들과 다같이 만나 하려는 그것과도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여! 한재희! 뭘 그리 고민하고 있냐?"
"우왁! 놀래라. 아쒸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거야?"
한참 병원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우주 녀석이 튀어나왔다. 여전히 예전과는 다른 밝고 외향적인 모습이 진짜 나우주가 맞는 모양이었다.
"흐흐 지금 민혁이랑 나연이 빵집에 보내고 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필름 사러왔지."
"어라 벌써? 윽 내가 많이 자긴 했구만..."
"도서관에서 널 보고 수근거리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잘도 잔다."
난 아빠가 일본 갈 때 이 녀석도 같이 갈 줄 알았는데, 급한 일이 아니니 당분간은 내 옆에서 윤하를 같이 지키라고 명령했단다. 그래서 이 놈은 몇 달 째 나와 윤하 곁만 맴돌면서 늘 곁을 지키고 있다.
"이젠 익숙하거든... 1학년이나 3학년이나 나만 보면 난리지 왜?"
"니가 대단해 보이나보지. 대단하긴 하잖아? 실제로 지금 1년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윤하가 있는 병실을 지킨 사람은 너 뿐이야."
"아하하! 부끄럽게 뭐 새삼. 이야, 그러고보니 벌써 1년째구나..."
참 생각해보니 정말 긴 시간이 흘렀다. 사고가 난 지 무려 1년, 내가 그녀의 곁에서 하루도 떨어지지 않고서 보낸 1년... 매일 그녀에게 하루가 끝나면 즐겁게 대화하듯이 이야기를 해 준지 1년이 지난 것이다.
"그럼 내가 준비할 것 더 없어? 다 된 건가?"
"그래. 1년 전에 제대로 못 한 윤하를 위한 생일파티를 해 줘야지."
그리고 그녀만을 위해 준비했었지만 사고로 인해 미처 전해주지 못 했던 그녀의 17살 생일파티와 더불어 18살 생일을 기념할 수 있는 그 날이 돌아왔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최고의 선물은 재희 너의 존재 그 자체니까."
"하하..."
1년간 기다렸지만, 그녀는 쉽사리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 했다. 매일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탓인지 교내에서 나는 떠도는 사랑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혼수상태인 여주인공을 기다리며 자리를 떠나지 못한 비극속의 남자 주인공이랄까.
"진짜 주인공이 왔구만?"
"어서 와 재희야!"
"뜨헉, 이게 다 뭐야?"
그런데 사람들은 그 주인공의 슬픔을 항상 함께하며 든든한 도움이 되어주었고,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이들이 있었기에 난 힘들어도 늘 윤하곁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선생님에 아빠도... 소이치로랑 레이누나도? 뭐가 이렇게 잔뜩..."
눈 앞에서 날 반기는 작년 1학년 2반 급우들과 아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난 그냥 조용한 파티를 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커진 거람. 웃고 싶지 않은데 절로 웃음이 난다.
"오늘이 누구 생일인데. 빠질 수는 없잖니 재희야. 한걸음에 달려왔다!"
"하여간... 일은 다 하고 온 거에요? 또 급하다고 막 난장판으로 온 건 아니죠?"
아빠가 '이런 들켰네!'라는 표정을 짓자 난 웃음이 터졌다. 윤하야, 진짜 내가 이 분들 때문에 웃으면서 산다.
"자 잘 잡고 있어. 안아도 돼."
"잠깐, 자, 잠깐! 너무 급작스럽잖아!"
1년동안 깔끔히 회복된 윤하는 이제 몸에 아무 생채기도 없다. 물론 사고로 인한 흉터는 계속 남아있겠지만... 큰 몸 속의 상처도 다 나았고, 몇달 전엔 정신만 돌아오면 퇴원할 수 있겠다는 말도 들었다. 다만 혼수상태라 산소호흡기와 링거는 떼지 못한 상태이다.
"자 잘 잡아! 윤하 안 넘어지게."
"앗, 응..."
1년동안 오직 링거줄에 의지해 왓던 몸은, 이제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져 있었다. 어찌나 야위었는지, 안쓰럽긴 햇지만 그녀가 이렇게라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날 살게 했다.
"자자, 케익 불 붙이고 다 이쪽으로 모여!"
내가 늘 누워만 있던 윤하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힌 채로 넘어지지 않게 꼬옥 안고 있었고, 앞에는 케잌을 준비한 뒤 모든 사람이 우리 주변으로 몰려왔다.
"자 김치~!"
찰칵! 경쾌한 셔터음과 함께 사진이 찍혔고, 모든 사람이 내게 어서 촛불 끄라며 아우성을 쳤다. 아유, 알았다고요 거 참!
"빨리 불어~!"
자 붑니다? 같이 불어줘 윤하야. 후~우
"윤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마시자!!"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그녀를 위한, 그녀만을 위한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
"담에 봐~!"
"고생했어, 고마워 모두들!"
어휴, 정말 선생님은 또 병원에 술을 가져오셔가지구! 들켰다간 우리 바로 병원 옮겨야 하는데... 선생님 덕분에 몇몇 취객의 발생으로 파티는 나름 이른 시간에 끝이 났다. 친구들이 모두 다 돌아가고 나서야 병실에 적막함이 찾아들었고, 남은 사람은 우주와 아빠, 소이치로와 레이 누나 뿐이었다.
"정리도 대충 다 끝났구나."
"고생했어 우주야. 덕분에 즐거웠다, 후후."
아빠와 조직원 일행은 잠시 일 좀 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병실엔 나와 우주 두 사람만 남게 되었는데, 그마나 왔던 우주 녀석도 집에 갈 때 사 가야 할 게 있다며 급히 편의점으로 가 버려서 결국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금방 올게~"
"그래, 오는길에 박가스 하나만 사다주라."
"문제 없지. 잘 지키고 있어!"
그러면서 뭔가 힐끗 보는 녀석의 시선이 좀 신경쓰이긴 했지만 아무것도 아니겠거니 하고 난 자연스럽게 윤하 곁으로 향했다. 오늘 윤하를 일으켜 품에 안아서 그런지 그녀의 온기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충동적이었다고 보기엔 그간 윤하와 함께햇던 시간이 있었고, 우연이라고 보기엔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라는 게 걸렸으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건 뭔가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아마도 난 이게 운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운명을 거슬러 재희에게 내 짐을 지우고 나서도 이런 병원생활이 당연한 것인 듯 생활해 온 건 분명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된 운명에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우리가 운명처럼 10년 전에 만나 서로에게 이끌렸던 것 처럼, 지금 내가 그녀를 지키고 있는 것도 운명처럼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