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네 명의 탤런트가 모여 '간바레 윤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로 끝난 영상은 그대로 SNS에서 퍼날라져서 교내에 순식간에 퍼졌고, 윤하는 이제 학교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그녀의 곁을 함께 지키는 나마저 졸지에 유명해졌고, 교내 신문엔 나와 윤하의 사연이 떡하니 1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 여파인지 병실로 병문안을 와서 날 응원해주는 사람은 물론이고 선물 공세를 펼치거나 기념 사진을 찍는 등의 행동을 하는 학생들도 잔뜩 늘어났다.
나 혼자 그 공세를 다 감당했다면 정말 힘들었을 뻔 했는데, 날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되었던 은주 패밀리와 민혁이, 그리고 우주가 이땐 또 도움이 되었다. 녀석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병문안 손님들의 눈길을 끌었고, 대부분의 손님들은 그 덕에 나와 윤하에겐 인사만 하는게 거의 정식화 되었다.
"어휴, 이제 그만 좀 와라. 질리지도 않나."
이런 엄청난 인파를 매일 받아 인사하는것도 고역인지라, 난 되도록이면 빨리 이 분위기가 식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래도 며칠 사이에 좀 줄었잖아. 아참, 나 저번에 윤하 면상북에 일본 연예인분들이 글 올려준 거 보고 생각났는데 이거 받아라."
우주가 너스레를 떨며 짐을 챙겨 머플러를 둘렀다. 그러면서 내게 사진 뭉치를 건네주는 녀석, 뭘 이렇게 잔뜩 인화해 왔나 했더니만, 푸헙!!
"크컥! 메... 메이드복!! 커헉 야...야한 드레스!!!!"
"내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여행 갔을 때 찍은 것들인데 이젠 난 필요 없다. 한장 씩 가졌으니 나머진 전부 너 가져 재희야."
난 일본여행에서 메이드카페에서 메이드복을 입고 찍은 윤하의 사진, 그리고 오에도 온천 호텔에서 우주의 생일날 기념으로 입은 하얀 드레스 사진을 보며 코피를 쏟을 뻔 했다.
사진을 받아들고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 못한 나는, 나갈 준비를 마친 우주를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역시, 너뿐이다 우주야."
"푸하하하! 그래 나 갈게."
이 녀석이 어찌보면 진짜 많은 고생을 하고 있는 No.2인 듯 한데, 내색 하나 안하는 데다가 이런 선물도 주고... 진짜 우정 파워 최고야.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그래. 해피 뉴 이어!"
*
12월의 마지막 날, 그리고 2010년의 마지막 날 밤. 시끌벅적했던 시간을 뒤로 한 채 난 윤하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야, 벌써 새해네. 진짜 오래됐다 그지 윤하야?"
그녀와 서로 바뀐 지 1년도 더 되는 긴 시간동안 있었던 많은 일이, 한 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마구 떠우르기 시작했다. 그녀와는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한 켠이 찡했다.
「누가 이렇게 따라오나 햇더니만...」
아아, 그녀와 몸이 바뀐 뒤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뭐... 뭐야, 알고있었어? 그럼 아는척을 해야지! 사람 무안하게!!」
풋... 첫만남 때 그녀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꽤나 순수해 보이던 그는 너무도 순진하게 내 거짓말에 속아버렸었지.
「그건, 나의 힘 때문이야.」
「뭐... 뭐라고? 정말로 마법이라도 썼단 말이야?」
그 때 그 거짓말은 어떻게 보면 사실이었긴 했다. 이 일을 일으킨 장본인이 다름아닌 아빠였기 때문이었으니까. 난 그 당시 그녀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좀 심한 말도 덧붙였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해봐,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XXX라던가 XX같은 것도 안 해봤을 리가...」
그 말에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시뻘개져 넉다운 되어버린 그녀는 그 이후에도 문자로 끊임없이 내게 몸을 돌려달라고 앙탈을 부렸었지.
그 후 학교에서 만난 뒤 가희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녀는 약점을 잡았다고 신이 나서 날 공원으로 불러냈었다. 물론 그 당시 나는 그녀가 그런 식으로 날 위협했다는 것에 굉장히 화가 나기도 했었지만, 금세 풀어졌다.
「그래서, 내가 능력자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협박하러 온 거야?」
왜였을까, 아마도 그 때 날 허탈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이 측은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솔직히, 전부 듣고 나니까 널 방해할 생각은 완전히 없어졌어. 이길 자신도 없고. 그런데...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 말을 듣고 난 금세 알아차렸다. 그녀는 날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야, 너 솔직히 말해 봐, 너 나 좋아하지?」
그녀는 그 질문에 화들짝 놀라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고, 난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럼... 이렇게 바뀐 모습이라도 내가 좋으면, 내 두 번째 마누라 하던지」
그 말은 지금 생각해도 진짜 민망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얏! 제정신이냐 너?!」
도망가던 날 보며 성내는 그녀의 모습이 그때는 왜 그렇게 귀여워 보였는지 미처 몰랐는데, 기억을 되찾고 난 지금은 모두 이해가 되었다. 난 나도 모르게 옛 기억속의 그를 지키고 싶어 끊임없이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이 신경이 쓰였던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좋으면 말이지, 널 첫번째 부인으로 삼아줄 수도 있어. 내가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 줄게!」
병문안 갔을 때 내가 그녀에게 했던 이 말은 속 없는 말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 말에 숨 넘어갈듯 웃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는데.」
난 진짜 이 말 처럼 은연중에 내 본심을 말한 것이었다.
「됐네요, 난 여자인 서윤하가 좋단말야.」
그리고 이건 그 당시 그녀의 본심. 아마도 이 때 남자의 생활에 완벽히 적응한 나와는 달리 그녀는 여전히 남자였을 때의 습관이 그대로였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자기 가슴에 턱 하고 얹어줬겠지.
「밝히기는. 대단하다, 남자 다 됐네.」
격하게 흥분하는 나를 보던 그녀의 눈빛은, 정말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그 일이 있은 후 난 나도모르게 그녀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고, 그녀가 집으로 찾아와 내 위로 올라 탄 그 날, 내 이성의 끊을 놓쳐버릴 뻔 했다.
「야! 일어나! 뭘 그렇게 여자애처럼 소리를 지르고 그래?!」
「하.. 하지만, 있었다고, 그게 있었다고!!!」
다행히 그녀의 귀여운 모습과 부모님이 게시단 사실에 곧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난 진짜 그 때 선 넘기 일보 직전이었다. 원래 여자였다지만, 몸과 본능이 먼저 그녀를 향해 달려들라고 재촉하는 걸 막기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만약 지금 부모님만 안 계셨어도 널 덮쳤을지도 몰라」
「아줌-압!」
그리고 그녀에게 꽤나 넘어갔던 나는 또 한번 그녀에게 진심 아닌 진심을 얘기했다.
「쉿! 너 자꾸 이러면 여기서 강제로 내 부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그녀는 그것도 협박으로만 들었는지 오히려 내게 바득바득 달려들었다. 하여간 성질머리는... 한 번도 지려고 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은 이후에도 나와 자주 부딪쳤다.
그러나 나는 아빠가 작전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뒤, '지금이 기회다!'싶어 가희에게 고백을 했고, 그로 인해 윤하는 날 포기한답시고 내가 아닌 우주와 놀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난 왜 내가 질투하는지조차 모른 채 그런 그녀의 단짝 친구를 질투했고, 많은 부분에서 그녀에게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제발 5시 전에는 보내주라. 대신 다른 약속이라도 들어줄테니까... 부탁해!」
그녀가 내게 노예계약의 실행을 요구했던 그 때도, 반은 오기 때문에 일부러 더 그녀를 상처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안돼. 그러니까 거기 그대로 앉아 있어.」
하지만 그녀의 상처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고, 그 날 이후 그녀는 날 완전히 포기한 듯 우주와 더 사이가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난 그녀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를 계속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게 되었고, 이후 윤하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그녀를 신경쓰다가 그만 가희와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겼다.
가희와 다투고 왔던 그 날, 난 너무 속상한 마음에 자꾸만 내 마음속에서 맴돌던 윤하에게 속풀이마저 하고 말았고, 「너 왜 자꾸 이렇게 신경쓰이게 해, 어?!」
「그게 무슨-」
「젠장, 어떻게 되 가는건지 모르겠어... 가희가 좋은데, 그건 확실한데, 넌... 대체!」
답답한 마음에 그녀의 입술을 강제로 뺏으려다가 그만... 제대로 따귀를 맞고 말았다.
「너 미쳤어? 왜 그래 정말!!」
난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놀라 한동안 말도 못 했고, 그날 밤 생각을 정리하면서 어떻게든 그녀를 마음속에서 비워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일본 여행을 가 있는 동안 깊이 신경쓰지 않으려고 최대한 쌀쌀맞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내심 걱정 투성이었다. 여행이 끝나고 우주와 윤하의 관계가 발전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계속 날 괴롭혔다. 난 2주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이 지나자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윤하는 서서히 내 쪽으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발생한 납치 사건으로 인해 그녀가 해를 입지 않앗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안도했지만, 큰일을 당한 그녀가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남자와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소식도 우주에게 전해 들었었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윤하는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어.
난 그녀의 따뜻한 태도에 잊기로 했던 마음을 잃어버렸고, 초심과는 다르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가희에게로부터 점차 멀어졌다.
지금은? 난 오로지 누구만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가? 답은 단 하나, 내 마음 어떤곳을 살펴봐도 오직 한 가지 뿐이다.
「나 말야... 요즘 진짜 이상하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너만 떠오르고, 눈 뜨기 전에는 항상 너에게 따스히 안겨 있거나 손잡고 있는 꿈을 꿔」
「마지막으로... 좋아해. 진짜 진짜 엄~청 좋아해...」
그녀는 말했다. 떠나기 전 오직 나만 바라본다고, 나만 보인다고...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건 그녀가 떠나기 며칠 전부터, 내가 입 밖으로 낼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하던 말이기도 했었다.
'난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받기만 했어.'
나에게 너무나도 헌신적이었던 그녀, 그녀는 작년 한 해 나를 울고 웃게했던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다.
"고마워 윤하야..."
그녀는... 내게 1년동안 너무나도 고마운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넌 받기만 해. 이젠 내가 너에게 줄테니까..."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1년 간 내가 쉬지 않고 지켜야만 할 빛이다.
[뎅-]
그렇게 결심하고 그녀의 손을 잡은 내 귀로, 티비로부터 2011년의 시작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뎅-]
윤하야.
해피 뉴 이어.
============================ 작품 후기 ============================
다음화부터는...
드디어 클라이막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