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14. 그리고 365일>
몇주 뒤 깁스를 완전히 푼 나는 친구들과 함께 인천공항에 갔다.
"다들 고마워, 바쁠텐데 이렇게 나와줘서... 특히 선생님두요."
"우린 서로 칼을 겨눴던 사이잖니 가희야."
"하하하!"
바로 오늘 독일로 떠나는 가희를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반에서 꽤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가희가 떠난다는 소식에 반 아이들 전체가 선생님까지 모시고 공항으로 집결했다.
"아쉽다... 함께했던 8달간 진짜 못 잊을거야."
"그러게, 함께 공부도 하고... 축제 준비도 하고 즐거웠는데."
우주와 가희가 인사와 가벼운 포옹을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내가 가희와 작별 인사를 할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내가 입을 떼려는데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한재희, 진짜 말도많고 탈도 많았지?"
"...그러게. 이렇게 헤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아마도 이 시간 모든이의 관심은 우리의 작별에 쏠려 있는 듯 했다. 이미 가희의 유학 소식에 둘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교내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일 것이다.
"잘 가 가희야. 그간... 나란 남잘 받아줘서 너무 고마웠어."
"후후, 누가 할 소릴. 날 쥐락펴락 했던 게 누군데."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런데 말야. 우리 사귀었었다는 증거는 하나 남기고 가야 하지 않겠어?"
"어? 뭔 말-"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술을 무방비 상태의 내 입술에 살짝 가져다댔다. 얼마나 눈 깜짝할 새였는지 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주변의 여학생들이 꺅꺅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이걸로 됐다 한재희. 윤하를 부탁할 테니까, 힘내!"
"어... 어."
그녀의 마지막 키스... 황홀하고도 얼떨떨한 기분에 난 그 후 돌아가서 병원 근처에 도착할 때 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자 여러분, 저 가요!"
"잘가 가희야!! 행복하고!!"
"1학년 2반 잊지 말고~!!"
가희는 그렇게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모든 걸 털어내고 독일로 떠나갔다.
"영원히 잊지 않을게 1학년 2반!!"
*
"그래, 앞으로도 계속 병실에서 있을 거지?"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래."
돌아오는 길에 우주는 내 결심을 다시한 번 확인하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도 내색은 안 했지만 그동안 작전을 수행하면서 나와 윤하를 조율해 나가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변수도 많았고 위기도 많았던 09년 12월부터, 10년 9월까지의 9달간, 우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너에게 모든 진실을 알려준 걸로 내 '조율자'로서의 임무는 모두 끝난 것 같네. 난 이제부터 다시 원래 가면을 쓴 채 고교시절을 마무리 해야겠어."
"그래 고생했다. 10년동안 나 대신 재희 곁을 지키느라."
우주는 내 말을 듣더니 피식 웃었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인데 뭘."
"아 맞다. 저번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깜빡한 거 있어."
그는 궁금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 때 진실을 들으며 마음 속에 품어두었던 우주를 향한 잊고 있었던 질문을 난 조심스레 입 밖에 냈다.
"넌 무슨 생각으로 날 도울 결심을 한 거야?"
"뭐? 아하~ 푸훗."
"윽, 왜 갑자기 웃고 난리야?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 무안하게."
우주는 폭소를 터트리곤 한참을 웃다가 눈물까지 흘리며 내게 말했다.
"10년 전에, 재희가 널 위해 희생한다고 결심한 뒤로 내가 녀석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어. '처음 본 앤데 어떻게 니 목숨을 버리려고 해?'라고. 그때 그 놈이 뭐라 했는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첫눈에 반했다고! 아마 너 아니면 절대 사랑하는 이가 없을 거라면서 맨날 내게 그 얘길 하는거야. 진짜 귀에 못박히도록 들었다. 난 진짜 그때 이놈이 미쳤다고 생각했어."
"아, 그...그래?"
난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하여간 이놈의 자식 여기저기다 나 좋아한다고 많이도 떠벌리고 다녔구만!!
"그래서 난 아버지께 모든 진실을 듣고 나서 총수님께 찾아갔어. 오로지 '내 친구를 위해, 내 친구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희생하려는 일을 돕고 친구도 지켜내겠어요!'라는 마음만 가지고서!"
"...와 대단한데."
그의 불알친구 사랑이 얼마나 크나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친구의 사랑과 신념을 위해 자신도 함께한다'라, 이 얼마나 멋진 우정인지.
"하여튼 그렇게 시작한 일, 끝낼 수 있는 건 너뿐이야 한재희."
"엉? 나?"
"그래, 나의 '조율자'역할과, 총수님의 '인도자, 시초자'역할. 그리고 레이누나와 소이치로의 '지원자'역할은 모두 끝났어. 작전은 대 성공이었지."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했다. 인도자... 시초자 뭐?
"그리고 최초의 '역명자'인 네 할머니와, 두번째 '기폭자'이신 너희 어머니, '희생자'인 윤하의 역할도 모두 끝났지. 이제 작전의 끝을 장식할 사람은-"
그리고는 손가락을 내 코앞에 가져다대며 크게 말했다.
"바로 재희 너. '종결자'가 해야만 할 일이 남아있어."
"...나? 내가 뭘 하는데?"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주에게 묻자 그는 난색을 표했다. 아니 잠깐 뭐라도 알려주고 나서 원가를 하라고 해야 할 것 아니야?
내가 아빠같이 염원력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옅은 예언력은 몸이 남자가 되어버리면서 사라진 것 같고, 도대체 무슨 힘으로 내가 이 거대한 일을 종결짓는단 말인가.
"글쎄, 그것까진 나도 잘 몰라. 아마 총수님께서도 알고 계실 지는... 총수님이 말씀하시길, 그 방법은 너만이 안다고 너희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말씀하셨다고 하시더라구."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는 턱을 괴고 생각하더니, 내 어깨에 손을 턱 하고 올려놓았다. 그리곤 비장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글쎄, 잘 생각해 봐. 너가 할 수 있는게 뭔지. 답은 너 안에 있다고 했으니까 말야."
"끄응... 알수 없는 소리만 하는구먼."
내가 신음하자 우주는 내 등을 토닥였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나보고? 지금껏 자기들이 맘대로 나 몰래 다 저질러 놓고선 나보고 마무리지으라구? 이게 무슨 짓이람 대체.
"에휴, 그나저나 그럼 이제 '백영'은 뭘 해?"
"흠... 글쎄. 총수님의 언변을 기다려 봐야겠지. 아마 조만간 중국 쪽에서 큰 집회가 한 번 열릴 거야."
우주는 하늘을 한 번 보더니 '캬~'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의 탄성소리 만큼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별이 가득한 밤 하늘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마치 보석을 뿌려놓은 것만 같았다.
"내가 예상하기론 아마 차기 백영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하시겠지만, 아마도 다시 세계를 위한 '조율자'가 되자는 말을 하시지 않을까 싶다."
"아주 옛날 선조들이 그랬던 것 처럼 말야?"
"그렇지. 그것이 원래... '그 분'께서 이 능력자들을 이 땅에 보냈던 이유이기도 하니까 말야."
난 그 말을 듣고 한숨을 푹 쉬었다.
"끙... 그럼 아빠는 또 바쁘다고 집에 안 들어오겠네. 요즘 그나마 병원에 자주 오는데 도로아미타불이 되겠구만."
"하하! 바쁘실 테니까 이해해야지. 그래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계시다구?"
"어이구 그러세요. 그러신 분이 오늘도 이렇게 병실에 없으십니다. 내가 공항 갔다온다고 자리 좀 지키고 있으라고 말까지 했는데."
우주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생하라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나는, 윤하 곁으로 가서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나 아니면 누가 우리 윤하를 지키겠어?"
============================ 작품 후기 ============================
+14.07.11 수정완료